2015년 12월 29일 화요일

네 자신의 총명함을 의지하지 말며(잠 3:7)

현대는 지식의 시대라 불릴만큼 정보의 총량이 과다하다. 인터넷의 발달과 스마트 폰의 탄생은 대도서관에 필적하는 지식의 양과 소스를 단 한손에 거머쥐도록 했다.

사람들은 필요할 때마다 언제든 원하는 정보의 개요를 취할 수 있으며, 핵심내용만을 골라 축출할 수 있는 능력을 갖췄다.

그와 동시에 연구하고 생각하는 법 또한 정체되었는지 모른다. 학문의 진지한 태도가 결여되고 있는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 현상에 대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는다. 한 권의 책을 두고 곱씹고 곱씹으며 한 우물만 파는 태도는 무식한 일이 됐다. 정보의 신속화로 트렌드를 맞추지 못하면 도태되는 일은 허다하다.

이것이 오늘날 21C 정보사회가 구축한 짙은 그림자일지도 모른다. 참으로 가볍지가 않던가?

이런 흐름은 교회에도 침투하기 시작하여 많은 것을 바꿔 놓았다. 예배형식의 지나친 간소화, 교회의 기업화, 교회건물의 현대화, 찬양의 최신화(?)등으로 말이다.

위 모두가 인간적인 편의를 위해 구축되어버린 것읏 아닌가 싶다. 한가지 예로 두툼한 성경책을 지고 다니기 보단 스맛폰 하나를 들고 가볍게 다닌다. 물론 이것이 잘못됐다는 것은 아니나 성경을 읽고 해석하는 내용을 볼 때 기도와 묵상을 활용하는 것이 아닌 단순 검색에 의존하는 경우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이 정보검색하여 편집하늑 능력이 마치 내 힘인듯양 착각하고 있지는 않은가? 하나님을 의지하기 보단 내 손안에 쥐어져있는 내 지식이 아닌 것들에 의존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지혜자는 자신의 총명함에 의지하지 말고 모든 길에서 그분을 인정하라 권면한다.(잠3:6~7)
인간은 불완전하다. 자신의 이기적 욕망을 택하고 자유의지를 더럽힘으로 더이상 올바른 행동을 하기는 불가능하다.

지혜의 원천이자 근본이신 하나님과 멀어진 이후로는 인류는 도저히 참된 삶을 살아갈 수 없게됐다. 알아도 알아진 것이 아니요, 일반적인 지식의 취득이 한낯 먼지처럼 흩날려지는 것 밖에는 안된다.

지혜는 지식의 근본이라 했다. 스스로가 지혜이신 그리스도를 의지하지 않는것은 무지의 길을 걷는 것과도 같다. 무지는 곧 아무것도 없는 죽음의 길이다.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여 그리고 믿지 못하여 죽는 것이다.

결국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인 것이다. 여타 포털사이트의 지식백과를 통해서 얻어지는 지식은 불명확한 조각들이다.

설령 그 조각들을 잘 짜맞췄다 해서 그것이 완전한 지식인 것은 아니다. 창조된 세계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뤄졌고 스스로 지혜로우신 그리스도를 통하여 본질을 바라보도록 하셨다.

마치 빛이 어둠을 비춰 현상을 밝혀내듯이 말이다.
즉, 우리는 그리스도란 빛 없이 현상을 진실되게 바라볼 수 없다.

우리의 행동 삶 모두 하나님을 통하지 않고는 정상적이지 않은 것이다.(잠3:6)

2015년 12월 27일 일요일

소경의 태도

요한복음 9장에 등장하는 눈먼자는 태어날때부터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자였다.
하지만 예수께서 그의 눈을뜨게 해주시면서 그의 삶은 180도 전환하게 된다.

태어날때부터 아무것도 못본자가 세상을 다시바라보게 됐을 때 어떤 느낌이였을까?
현대 의학케이스 중 전혀못보던자가 눈을 뜨게되면서 불행하게 되는 기록이 있다.
3차원을 인식하지 못하고 2차원으로 인식을 하고 현재 보게되는 모든 것들에 대한 환상이 깨져 좌절과 절망으로 가득한 인생을 살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 태어날 때부터 보지 못하던 자의 반응은 전혀 다르다. 이미 예수께서 앞서 이 눈먼자에 대해 언급하신다.
"이 사람이 죄를 지은 것이 아니요, 또한 그의 부모가 죄를 지은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일을 그에게서 밝히 드러내고자 함이니라."(요 9:3)

그가 눈이 먼 이유는 예수님의 이적과 표징을 위한 하나의 그릇이였다. 그의 눈을 뜨도록 해서 진정한 인식이란 무엇인지를 보여주고자 하는 계시가 담겨있는 것이다. 소경이 시력을 되찾음은 죄로 인해 눈먼 우리들이 다시금 빛을 바라보게 되는 것과 같은 맥락이다.

다른 의미로는 하나님께서 눈을 뜨게 해주는 자가 있는 반면, 계속해서 눈먼 상태로 두는 자들도 있다는 얘기이기도 하겠다. 오늘 이 본문을 쭉 읽어나가면서 놀라운 것은 바리새인들이 이 눈먼자를 끌고 가서 심문을 할 때 태도다.

처음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된 자가 두려움에 떨기는 커녕 바리새인들의 거친 심문에도 담대하게 복음을 전달한다. 막상 보이게되어 행복을 느끼기도 전에 고난들이 들이닥쳐들어왔는데 그의 태도는 되려 당당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 그에게 지혜와 명철을 더하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는 담대했다.

그는 이미 그리스도의 제자가 됐다. 바리새인 앞에 불려갈 때까지만 해도 그는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알고있었으나 예수님의 시선에서 그는 이미 자신의 제자였다. 담대히 복음을 전하게 되는 이유로 그는 출회 당하고 만다. 당시에 공회에서 추방당함은 사회생활의 전반적인 통로들이 모두 막힌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이제야 눈을뜨게 됐는데 그의 앞길이 매우 막막했을 것이란 생각이다. 그러나 그순간 예수께서 그가 추방됐다는 소식을 듣고 찾아가신다.

그가 예수님을 찾아갔다는 내용이 기술되지 않은것으로 보아서 그는 매우 의기소침해 있었음을 추측해 볼 수도 있겠지만, 예수님께서 친히 그의 소식을 듣고 방문했다는 것이다.
만나자마자 예수님의 첫마디는 "네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느냐?"였다.

그는 주저 없이 대답한다. "주님, 그분이 누구시니이까? 내가 그분을 믿고자 하나이다."
받은 믿음을 주저없이 사용하였다. 예수님은 그의 마음에 이미 믿음을 두셨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그는 복음을 자랑하였고 그로인해 추방당했지만 참된 신앙고백을 할 수 있었다. 예수님은 그의 답변을 듣자마자 친히 자신을 계시하신다.

그러자마자 "주님, 내가 믿나이다."란 깊은 고백이 우러나온다. 소경의 태도는 결코 스스로가 갖출 수 있는것이 아니였다. 우리는 이 소경처럼 담대히 진리를 고백할 수 있겠는가?
때론 사회에서 소외될 수 있음을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할 수 있겠는가? 잘못된 관념을 향해 진리로 답변할 수 있겠느냐는 말이다.

결코 스스로는 그런 경지에 도달할 수 없다. 예수님은 소경의 눈을뜨게하시고 자신을 먼저 바라보게 하셨다. 인식의 차원이 달라진 것이다. 마땅히 봐야할 대상을 담은 것이다.
그리고 결코 그를 내버려두시지 아니하시고 하나님은 굳건한 믿음과 복음을 전달할 용기들을 심어주셨다. 소경은 그것을 사용했다. 자신이 마땅히 본것에 대해 꾸밈없이 사실만을 전했다.
그가 시력이 회복된 것은 사실이고 결코 인간적인 힘이 아닌 신성의 작용이였다.

지금 이 소경의 태도에서 나는 무엇을 느꼈는가? 이 사람의 참된 신앙고백과 말씀에 대한 즉각적인 순종이 그의 힘에서 비롯된 것으로 생각하는가? 참된 복음을 가지고 살아낸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나의 힘이 아닌 오직 그리스도의 은혜로 가능하여지는 은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삶을 간절히 바래야한다. 예수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나의 힘이 아닌 하나님의 뜻으로 살게 해달라고 간청해도 모자랄 판이다.

더 이상 눈먼자가 아닌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며 사는 그리스도인이고 싶다.

2015년 12월 21일 월요일

2015년 12월 22일

2015년의 끝이 왔다. 
아침 일찍 출근하여 회사 컴퓨터로 글을 남긴다.

올 한해 많은 일들이 있었고 힘든 시기들도 많았다. 그때를 돌아보며 하나님을 붙잡았는가 생각해보면 내 욕심이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언제쯤 정신 차릴래? 싶으면서도 인자하시고 정의로우신 아버지를 의지할 수 밖에 없다는 결론이다.

이번주 16년을 준비하는 칼럼을 작성해야 한다. 참 부족한 사람이 못난 글을 쓰는구나 싶으면서도 내 자신에 대한 통찰을 엿보는 시간이도 해서 꼬박꼬박 쓴다. 새로시작되는 한해는 좀 더 부지런히 깊이있게 써야할텐데 나의 삶은 늘 부끄럽다.

아버지의 한량없는 사랑을 깊이 체험하고 싶은게 내년의 목표라면 목표겠다.
진실로 하나님의 사람이 되고 싶다.

오늘 하루도 하나님께서 동행해 주시길 간절히 소망하며....
참으로 감사하다.

어려운 일들이 해결된 것은 아니지만 하나님께 감사할 것들 투성이다.

2015년 12월 19일 토요일

반가운 얼굴들

늘 교회에서 얼굴을 보는 지체들이지만 14년도 구본미 가족은 참 애틋하다. 교회에 정착하는데 큰 힘을 준 지체들이자 많은 가르침을 준 그룹이기 때문이다.

특히나 이 가족에서 공동체에 임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참 많이 누렸다. 그래서 오랜만에 모였어도 참으로 편안한 구성원들이다.

몇몇 지체들은 모임에 참석하지 못하여 아쉽긴 했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다...

각자가 이제 1~2살씩을 더 먹었지만 우리가 날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깊어지기를 소망한다.
각자의 직분과 삶의 자리에서 복음을 증거하기를 바란다.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나님께서 이끄시기에 믿고 의지해 나갈 수 있으니 말이다.

2015년 12월 17일 목요일

마음의 소리 1000화

마음의 소리가 1000화를 맞이했다. 첫회가 연재 될 때가 2006년 9월 8일. 파릇파릇한 06학번 신입생이 무려 2학기를 맞이하여 꿈과 낭만이 박살나고 현실을 깨달아 살아가던 그 무렵이다.
87 형제들은 최악의 던전 '군대'가 코앞으로 다가와있고 다가올 암흑시대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래도 그때마다 마음의 소리가 즐거움의 소재였던걸로 기억한다. 조석 작가님의 군생활 에피소드가 확장되어 뭔가 알수 없는 4차원 개그로 발전해버렸고.....
...
우리는 나이를 먹고 바빠짐에 따라 마음의 소리 구독을 중단(?)하는 사람들도 생겨났다. 나도 며칠전부터 오랜만에 들어가서 봤는데1000화가 코앞이라고 하더라. 이런 팍팍한 시대에 소소한 개그소재를 다루는 작가가 있다는게 참 다행이면서도 씁쓸하다는 생각이다.

고등학생 때 인생의 좌우명이 '인생은 만화처럼'이였는데 ...당시 드럽게 팍팍한 선생들 밑에서 '공부만이 살길이다'라는 고정관념을 배우다보니 나 또한 암암리에 내면이 드럽게 팍팍해져 있었던 것 같다.
고등학교 탈옥 이후 반년이 지난뒤 접한 이 '마음의 소리'는 이 팍팍한 일상도 추억이라는 교훈(?)을 줬다.

이상 1000화 소감을 마친다.

음...근데 지금은 근무시간인데 이런 감상에 젖어있다.ㅋㅋㅋㅋㅋ
오늘 점심 뭐먹지?

회개, 경건 - 지은이 : 토마스 왓슨 / 옮긴이 : 김동완 / 출판사 : 복있는 사람들

17C 신학자이자 목회자인 토마스 왓슨의 두 저서를 탐독했다. 다른 청교도 고전들에 비해 두께가 얇지만 그 내공의 깊이는 남달랐다. 이런 귀한 책이 성도들 특히나 청년들 사이에서 많이 읽히면 좋겠지만 단순 희망사항일 뿐이다. 단단하고 깊이있는 생각이 베어있는 고전 특유의 특징때문에 지루하게 여겨서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의 오묘함과 신령함에 대해 깊이있게 묵상하여 글로 옮긴다는 것은 쉬운일이 아니다. 앞선 신앙의 선배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삶속에서 실천하면서 익혀온 것들을 글로 남기는 이유는 후대 신앙인들을 위해서임도 있다. 이런 귀중한 은혜의 유산들이 널려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다지 찾아 보지 않는 이유는 오늘날 신앙에 대한 태도가 미적지근 하기 때문은 아닐까 싶기도 하다.

토마스 왓슨이 이 글을 집필하는 시기도 그러한 시기...아니 시작되려는 전초전이였던 듯 싶다. 17C에는 계몽주의의 발현으로 다양한 철학적 사고와 과학적 사고가 집합하여 산체를 이루던 시기였다. 오늘날 사고방식의 근간이 되는 시기가 이 때였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지식의 혼돈이 시작되던 이 시기에 '무신론' 또한 출발했다. 토마스 왓슨은 이런 격동의 시대에 성도들의 신앙의 뿌리가 흔들리는 것을 방지하고자 이 글을 집필한듯 했다.
그는 회개와 경건에 대한 깊은 의미를 성경에서 찾아냈고 그것을 논리적으로 우리에게 들려준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의 제작자 답게 개요를 먼저 논하고 그다음에 '질문과 답'형식으로 서술했다. 특히나 적용부분에 있어서 기술한 내용은 토마스 왓슨의 꼼꼼함을 엿볼 수 있었다.(비록 번역된 책이기 때문에 깊이를 맛보는게 덜했지만 말이다.)

과연 '신학의 체계'를 저술할 만한 깊이있는 경건의 실력자였음을 확인하는 대목이였다.
이 두 권의 책도 여타 청교도 서적과 마찬가지로  앞선 내용에 죄에대한 경고성 멘트들이 다분하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기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앞선 대목에 놓다보니 독자들은 심히 당황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청교도 서적의 깊은 묘미는 앞선 주제에서 죄에 대한 심오한 경고들이 가득하지만 후반부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조함으로 따듯한 위로를 준다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앞부분에서 고전하여 심한 마음에 부담감을 가져 책을 덮는 경우들이 허다하나 끝까지 인내하여 읽다보면 그것을 능가하는 따듯함을 맛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이 두책은 한번에 같이 읽는게 좋다고 생각한다. 순차적으로는 먼저 회개를 읽고 그다음에 경건을 읽는 것이 좋을듯 싶다. 경건한 사람은 회개를 소홀히 하지않고, 참된 회개자는 곧 경건한 사람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는 이 두권의 책을 탐독하면서 아직도 부끄러움이 많은 신자라는 것을 느꼈다. 토마스 왓슨이 이 두 주제를 가지고 얼마나 기도와 말씀을 가지고 씨름을 했는지도 발견했다. 이 책은 그의 경건과 회개에 대한 회고록 그 자체였다. 그의 책에 의하면 경건한 신자는 성령충만함으로 뜨거움이 가득한 신자임이 틀림없다.

오늘날은 뜨거운 신자에 대한 오해와 편견이 가득하다. 그저 교회에만 올인하는 사람을 뜨거운 신앙인으로 보는 경우가 태반이다. 혹은 말씀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사람을 부담스러운 시선으로 보는 태도도 있다.  하지만 왓슨은 신자가 자신의 죄에 대한 애통함으로 인해 하나님께 부끄러워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회개하는 태도를 보인다고 말한다. 선지자 예레미야처럼 눈물이 마르지 않는 회개자가 되어야 한다고 권면한다.
참된 경건자는 그 마음속에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매우 커서 말씀에 순종하지 않고서는 베기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그리스도께서 반드시 그렇게 되도록 이끄시기 때문기 때문이다. 그는 이렇게 얘기한다. "성령님의 일반사역은 사라지지만 성화사역은 사라지지 않는다."

또한 하나님의 전적주권을 얘기하면서도 성도의 방종에 대해서는 엄히 꾸중한다. 믿음을 선물받은자가 말씀 순종에 대해 방임적인 태도를 보일리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는 믿음을 가진자라면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으로 거듭나기를 강하게 권면한다. 자세한 내용은 책을 통해 확인하면 되겠다.

강력하게 일독을 권한다.

2015년 12월 16일 수요일

2015년 12월 13일 임시 공동의회 소감

어제 교회에서 대예배 이후 임시공동 의회를 가졌다. 정관에 대한 가기준안이 세워지고 여러의견을 나누는 모습을 보았다.
다들 피곤하실텐데 참석하셔서 하나님과 공동체에 대한 사랑을 솔선수범해 보여주셨다.
청년의 입장에서 배울 수 있는 부분들을 많이 보게되는 은혜를 누렸다.
딱딱할 줄만 알았는데 의외로 웃음도 넘쳐서 즐거웠다. 개인적으로 '정관'은 잘 짜여진 것 같다고 생각한다. 아쉬운 것은 아직 교회론과 교회정치에 관한 의식이 자리잡히지 못한 현실을 우리들이 겪고 있다는 것이다.
첫번째로 교회헌법 용어가 어렵고 생소하거니와 그 내용과 의미도 오해의 여지가 있었다. 예를들면 '항존직'이란 용어의 근본적인 내용은 '항상 존재하는 직분'이란 의미다. 쉽게말해 교회의 직분중 목사, 장로, 집사는 성경이 명시하는대로 늘 존재해야 한다는 얘기다.
한 목사나 장로가 한번 뽑히면 임기가 끝날 때까지 계속 이어진다는 의미로 받아서는 안된다.
두번째로 장로와 집사직분에 대한 오해들이 있다. 장로가 세워지는데 나이의 많고 적음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세워질 후보자의 경건과 영성의 깊이가 우선시 되어 선출되어져야 할 것이다. 물론 연륜에서 오는 지혜도 무시할 수 없기에 총회 기준은 만35세에 두고 있다.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의 측면에서 봤을 때 젊은자가 나이많은 자 보다 더 경건할 수 있다. 그리고 더 잘 가꾸어 나갈 수도 있을 것이다. 장로가 나이가 많아야 한다는건 한국의 유교적 사고 바탕을 기반으로 된 함정이라 생각한다. 생각보자 장로는 체력이 강하게(?) 요구되는 직분이다. 나이많은 분도 소화못하리란 법은 없지만 35세부터 선을 둔 이유는 체력적 요소도 고려한 듯 하다. 다음 총회가 정리한 장로의 직분과 사역의 범위를 살펴보면 왜그런지 가늠해 볼 수 있다.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교회 정치 제5장 47조. - 장로의 직분과 사역의 범위
1.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
2. 교회의 영적 관계를 살피는 일
3.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하는 일
4. 교인을 권면하는 일
5.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
6.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7. 교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8. 목회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목사에게 알리는 일>
셋째 장로교회의 정체성에 대한 인식이 매우 부족하다. 이건 모두의 숙제다. 웨스트민스터 5개 문헌에 대한 관심이 적다는 것은 교회시스템에 대한 이해도가 떨어진다 봐도 될 것 같다. 물론 그것이 21C의 장로교회에 딱 맞는 옷은 아니지만 가장 모범적인 선례를 참고하지 않는다는 것은 문제이지 않을까?
정관의 사상적 기초는 신앙고백서에 있다. 예배모범과 교회정치는 말씀이 근간이 된 교리의 기반위에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결론

교회 공동체안에서 정관이 세워지는 과정을 함께 논의하는 자리라는 것에서 그 의미가 크다. 정족 수는 채워지지 않았지만 거의 모든 교인들이 함께 했다는 것을 보면서 아직 하나님과 그 교회를 사랑하는 분들이 많다는 것을 알았다. 모든 청년들이 참여한 것은 아니지만 많은 수가 이 자리에 참여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청년들이 많은 의견을 내기를 바라는 것도 없지 않아 있었을 것이라 생각이 든다. 그러나 공동의회에서 제시해야 하는 의견은 신중해야 하기에 대다수가 침묵을 지킨 것으로 보인다. 
가장 중요한 것은 정관의 설립과 직분자 선출의 기준을 세우는 것에 있어서 기도와 묵상이 필수적인 기반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교회의 머리되시는 분은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인간적인 의사를 최대한 낮추고 하나님의 말씀을 중심으로 공동의회를 이끌어야 함을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다소 아쉬운 점들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과도기라는 입장에서 보면 아직은 시작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성도분들이 다양한 의견을 내셨지만 이 과정에서 바톤을 이어 받는 것은 청년과 우리 다음세대들이다. 그들이 이 자리에 함께 했다는 것만으로 많은 공부가 됐을 것이라 생각한다.
교회정치 예배모범으로 이어지는 내공은 이번 세대에서 개화할 수 있는 시기가 아니다. 하지만 이런 과정들이 축적됨도 필요하거니와 이것을 잘 전달하여 이어주는 것도 현재를 살고있는 성도의 몫이다. 그래서 우리 교회가 교육시스템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배우고 즉시 적용하기는 굉장히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의 일하심은 확실하시기에 믿고 준비하며 나아가야 한다. 교회와 앞으로 세워질 직분자분들이 어떤 분이 될지는 모르지만 하나님의 뜻에 부합하여 세워지기를 소망한다.


<우리가 함께 봐야 할 문헌(고신, 합신 헌법해설도 포함시켰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유산/실천
- 로버트. A. 레담/P&R
헌법해설 - 유해무 저/ 고신총회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주석 <교회정치/예배모범> - 박윤선 저/영음사
합동헌법 - 대한예수교 장로회 총회교육부

각오를 다지며

시기가 어찌됐든 하나님께 그 뜻을 둠이 맞다는 생각이다. 무수한 변수와 상황들이 있으나 모든 지휘권은 하나님께 있음이다.

두려움이 엄습하더라도 하나님 앞에선 아무것도 아닌 것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다. 알면서도 잘 못하는 것은 받은 믿음을 사용 안해서렸다.

너무나 긴 침체를 사실 겪고있다. 내 자신의 오만한 콧대를 꺾어주시기를 바란다.
진실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되고 싶다.

2015년 12월 12일 토요일

회심을 언제했는가?

교회 친한 형에게 이런 메시지를 받았다.
"호성아, 넌 언제 회심했어?"

형의 성품과 인격을 알기에 이런 질문의 의도가 굉장히 순수하다는 것을 안다.
하지만 이 질문이 가진 위험성은 구원파의 "구원은 언제받았어?"란 질문과 종이 한장의 차이다. 회심이란 청교도 신학에서 가장 강조를 말하는 것이라고 오늘날의 대부분 목회자들이 얘기한다. 물론, 그 부분도 어느정도 맞는 얘기지만 신자들이게 이런 특징들이 나타난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사실인듯 하다.

초대교회서부터 종교개혁기까지 대부분의 고결한 선배들이 남긴 '고백록'들은 그런 부분들을 여지없이 보여준다. 넘겨짓지 말아야 할 것은 회심은 성도에따라 느끼는 사람이 있고 아닌 사람이있지만 그들의 인생가운데 발생하는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주체는 하나님이시며 인간 스스로가 회심을 발생시킬 수 없다.
또한 일생에 단 한번일어나지만 일어나는 기간은 길 수도 있고 짧을 수도 있다.
확실한 것은 그 사람이 철저히 하나님의 사람으로 거듭난다는 부분이다.

오늘날에는 회심에 대한 의미와 강조가 약하다. 그리고 그 의미가 굉장히 얕아져있는데다가 왜곡되어져 있는 부분도 많다. 우리는 가지고 있는 믿음에 대해서 의심하는 것을 경계하는 분위기가 조성되어있다. 한국 교회가 신앙교육에 있어서 부족한 면을 심각히 보였기에 나타난 부정적인 현상이다.

경건의 선배들은 일정부분 자신의 믿음에 대해서 깊이 있게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것은 결코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의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참된 성도인지를 돌아보는 것이였다. 그리스도를 통해 택함 입은 영혼들이 구원을 받는 것은 확실하지만, 자신이 과연 그런 존재인지를 기도와 묵상 그리고 시련을 통해 점검해 보기를 필수적으로 여겼다.

그렇다고 해서 믿음에 대해 큰 의심을 갖는 것은 아닌 부분도 있다. 하나님은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라는 것을 확실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부분들에 있어서 신앙의 선배들을 본받을 필요가 있다. '신본주의'적 사상이 현저히 낮은 것이 오늘날에는 더더욱 필수적이라 생각한다.

오늘 받은 이 질문을 통해 다시한번 마음을 다시 잡는다. 정말 하나님께 감사하다. 이런 못난 나를 내버려두시지 않으시고 끊임없이 권면하시고 치신다. 두렵고 떨림으로 경회함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기를 소망한다. 죄로 돌이키려 할 때 여지없이 나를 쳐주셔서 돌이켜주시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마음이 더욱 깊어지고 그 사랑을 가난한 영혼들을 위해 베풀기를 원한다.

모든 선함의 주체는 성령님이시다. 그러므로 그분께 담대히 모든 것을 맡기자.
모든 것은 삼위하나님의 존엄하신 계획과 뜻대로 이루어질 것이 분명하기에 그렇다.

2015년 12월 6일 일요일

밴댕이

내 마음에 옹졸함을 읽었다.
좁디좁은 속에 뒷끝들이 가득차 숨쉴 틈조차 주질 않는다.

호흡을 가다듬고 천천히 생각에 잠겼다.
오늘 나눈 기도제목에서 내가 늘 경건의 시간에 대한 확보를 꺼낸다는 것을 감지했다.
이것은 정말 내가 나태하다는 반증이기도 하거니와, 한편으론 솔직하게 못나누는 부분도 있기에 그렇다.

내면에 자리잡은 깊은 기도제목은 입밖으로 좀처럼 꺼내지질 않는다. 주변환경과 사람을 고려하기 때문이기도 하리라...

상대의 영혼을 위한 배려도 없지는 않다.
그렇지만 이 좁디좁은 속으로 인해서 꽁한 내 심정 하나님께 나눔이 최상이다.

내 성정까지 뒤집으실 수 있는 분이시기에 그렇다.
그래서 하루를 마무리하며 기도함으로 나아간다.

2015년 12월 3일 목요일

복음전달

오랜만에 도장 다닐 때 후배를 만났다.
의젓하게 성인이 된 모습을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어린시절의 철 없음은 던져버리고 남자로써 자신의 뜻과 꿈을 관철시켜 나아가고 있다.

대견하기 그지 없다.
이런 친구에게도 복음이 필요할거라 생각한다.
예수님을 믿으면 더할나위 없이 좋으련만...
여전히 복음을 전달하는 것에 서툰 나를 본다.
되려 아직도 경건의 열망이 약한 모습을 보게됐다.

제대로 얘기도 꺼내보지도 못한 것 같다.
그렇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과 계획에는 차질이 없음을 안다. 당신의 백성들을 통해서 자신을 전달하실 것도 알거니와... 설령 내가 크나큰 실패를 겪을지라도 그분은 실패를 모르시는 분이시다.

반드시 하나님께서 행하시고자 하는 바는 이루어지리라...
나의 연약함을 두고 그분께 용서를 구하며, 다시금 성령충만함을 입어 영원한 계획과 뜻에 참여시켜주시기를 간절히 바라는 바이다.

2015년 12월 2일 수요일

'클레멘스 일서' 핵심요약.

1. 구약은 신약의 기초다.
2. 구약시대의 제도나 예배의식은 기독교회의 제도나 예배의식의 모범이 된다.
3. 교회는 카리스마적 공동체라기보다는 계층구조를 가진 제도 혹은 단체다.
4. 성직은 사도적 계승에 의하여 계승된다.

2015년 12월 1일 화요일

하루를 돌아본다.

오늘도 감사한 하루를 마쳤다.
그러나 죄인중의 죄인... 오락가락하는 나의 영적상태와 행태는 보기 역겨울 정도로 실망스럽다. 신자에게 누구나 영적침체는 있지만 나는 늘 나를 의심한다.

왜 그 미련에서 벗어나지 못하는가?
예수님께서 믿음을 주셨것만 그것에 굳게 의지하지 못하는 나를 본다.
그런즉 선줄로 알았거든 넘어질까 조심하라... 요새 내 마음속에 늘 스치는 말씀이다.

죄 한번지었다고 해서 당장 1분 앞이나 내일의 일에 큰 지장이 있는것은 아니다.
행여나 무슨 일이 일어날까 노심초사함도 어찌보면 미련한 일이다.
그러나 둔감해진다거나 익숙해진다거나 하는 것은 위험하다.
하나님께로 멀어질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단은 자신을 광명의 천사로 치장하기를 좋아한다. 늘 우리의 앞선에서 빛을 가장하여 어둠으로 삼키고자 한다. 신학적 위용이 뛰어나거나 외식적인 사람들이 이 함정에 걸려넘어지기 쉽다. 기도함이 약해진다면 이런 가능성들에 노출된다.

때론 율법주의에 빠진것은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를 머리로만 아는 것은 아닌지 말이다. 앞선 글들에서도 늘 이런 생각들이 반복되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아직 어린 신앙인건가? 깨어 굳게서서 남자답게 강건해야 함이 절실하다.

그럼에도 기도함이 더디다. 되지 않더라고 기도해야한다. 17C의 신학자 토마스 왓슨은 경건한 사람은 늘 기도와 달라붙어 있는 사람이라 말한다. 하나님께 드리는 올바른 기도를 드렸을 때 그것을 안이루시지 않기 때문이다. 서원을 함부로 해서는 안돼는 것 또한 기도는 하나님께서 듣고 판단하여 당신의 뜻에 맞춰 이루시기 때문이다.

신자의 삶은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오묘하고도 웅장한 섭리에 맡겨져 있다. 하나님께서 들어주시는 기도 또한 성령께서 우리안에 내주하시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다. 중보자인 그리스도께서는 기도할 수 없는 우리를 기도하게끔 성령을 보내셨고 설령 부분적으로 잘못된 기도라 할지라도 걸러내주신다. 그렇지만 중언부언하는 기도는 피하라고 엄히 경고하신다.

우리는 진실된 마음으로 살아야한다. 비록 반복된 죄의 행실로 피폐하고 넘어지더라도 그럴수록 간절히 기도해야한다. 오늘도 기도해야한다. 짧은 시간이더라도 하나님과의 긴밀한 시간을 확보해야 한다.

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추억의 조각

30까지 한달을 남겼다.
신자로써 세월은 아무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인이기에 유한을 느낀다.
남은 한달 가만히 생각에 잠기며 머릿속의 추억을 되돌려보고는 한다.

그래서 퇴근 후 동네를 산책하면서 어린시절부터 걸었던 그 길들을 유난히 많이 걷게 되는 것 같다. 어찌보면 연약한 나의 미련 같다가도 아련함에 손을 대려는 모습들도 언뜻 보게 된다.
추억의 조각에 베일 수 있다는 것을 본다. 지나간 과거는 잊으라는 말들이 있으나 뜻대로 안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우스운건 왜 시간을 더 뒤로 돌아가서 보게 된 걸까? 지나간 시간들과 오늘날의 모습들을 맞춰보며 참 내가 본 눈이 다르지 않았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간격이 메꾼건 '다름'과 '차이' 그리고 '변화'임에도 느껴지는 자성은 무엇인가 싶다.

미약한 끌림에도 흔들리는 마음을 본다. 어리석다 한탄하면서도 또다시 고등학생 시절처럼 미적지근한 노래들을 들으면서 감성에 빠져버린다. 그 조각 움켜질수록 패이고 아플텐데 바보같게도 놓지를 않는다.

기도한다. 이 미련한 죄인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반대로 고백하기도 한다. 이 죄인... 그곳이 좋다고... 어쩌면 좋냐고....

말씀과 떨어질 수 없다. 과거와는 결별해야 한다.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도 이 추억의 조각 아픔을 지닌채 꼭꼭 움켜쥐고 있는 내 모습이 참 한심했다.

"사람이 자기 가슴에 불을 품었는데 옷이 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잠 6:27)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돌아보다.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성도에게 노동의 터란 '성화'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각각의 가치관을 보게된다.
개성들이 다 묻어있지만 본질은 결국 하나를 추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자신의 스타일과 생각을 중심으로 주변에 적응하고 대인관계를 형성한다. 타인에 대한 호감과 배려도 '자신'을 위하는 경우임이 많다.

심지어 크리스챤도 이 함정에서 자유하지는 못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행한것이 실제로는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경건'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성령님과 그의 말씀안에서만 가능하다.
최근의 내 삶을 보면서 그러한 태도가 심각히 결여됐음을 알았다.

주님이 주신 믿음을 단단히 붙잡고 가슴치며 회개해야 함이 절실하다...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쑥과 마늘]

그걸 10단 넘게 씹더라도 사람되는거 아니더라...
'호랑이와 곰' 신화가 주는 교훈은 '사람'되기가 그렇게 힘들다는걸 후대에게 재밌게 전하려한 선조들의 지혜라 생각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마치 쑥과 마늘을 깊은 동굴에서 생으로 오랫동안 씹는 고독함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게다가 곰은 옆에 있는 호랑이의 불만과 투정까지 견디는 수고도 감수해야 했다. 문명에 개화되지 못한 사람의 삶이란 짐승과도 같았다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문명에 개화된 자가 짐승을 능가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치에 밝아 교양과 문화의 창호지를 두텁게 발라 붙였을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우는 요령을 터득했을 뿐이다.

성경은 인간이 인간다워 지는 것은 말씀이 자신안에 두어졌을 때라고 말한다.(시 119:11)
근본을 두지 않고 교양과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집안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체 창호지로 가리우는 것 밖에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린 교양도 없고 신앙도 없지 않던가?......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Heinrich Bullinger]

지인분이 선물해주신 귀한 책이 도착했다.
불링불링(?)하다...

제 2세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가운데 이런 책은 참 반갑다. 두께가 얇아서 더욱 만족스럽다. 휴대하기가 편할 것 같다.

불링거는 칼빈과의 애증(?)이 깊은 인물이다.
둘은 그 어려웠전 시대에 진리를 위해 긴밀히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예정'에 대한 신학적 견해가 달라 마찰도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꽤나 끈끈한 사이를 유지한 것 같다. 이런 태도는 깊이 배워야 할듯 싶다.

책 커버에 있는 초상화를 보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생각난다. 선물해 주신 분께 무척이나 감사를 표하고 싶다~~~~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지난 토요일 양평을 방문했다.

가족들과 좋은 시간 그리고 뜻깊은 만남을 가졌다.
그리스도인으로써 귀감이 되는 스승같은 분을 만난다는건 기쁜일이다.

성도간의 교제를 톡톡히 누렸다.
참 감사한 시간이였다.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감기몸살을 앓으며...

일을 꽤 쉬다 다시 시작해서일까?
오랜만에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상사의 배려로 어제와 오늘 일찍 퇴근했지만 동료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몇번 거치면서 몸건강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한다.

신앙도 몸살이 온다. 은닉된 죄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 딱 찾아온다. 양심의 불편함은 잠시고 서서히 마비된다. 깊이 골병이 들었을 때는 말씀도 잊게 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상실한다.

다만 이것으로 인한 고통이 발생했을 때는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통증없이 영영 죄의 결박에 꽁꽁 묶여버렸다면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부터 오는 열과 통증은 '회개'의 촉구 신호를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그것이 내면의 괴로움으로 오든 상황의 고난으로 오던지 말이다. 앓아봐야 말씀이 귀한 줄을 알고
다가간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이탈하는 것을 눈뜨고 보지 않으신다. 그러나 가장 극심한 처방은 침묵을 고수하시는 때다. 말씀을 읽어도 기도를 해봐도 예배를 드려도 도무지 반응이 없다.

속히 회개하고 자신을 진단하며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았던 은사들 또한 망가지고 잃어버린다. 다시 회복시키기도 힘들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받았던 것들이 자신을 위함으로 전락함이 원인이다.

속히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우리는 이미 믿음을 받았다. 영원하신 통치자인 예수님을 우리의 주권자로 두게끔 선물받지 않았던가?

무너지고 싶지 않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고 그분의 말씀이 내 삶이되고 이웃들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여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 역사가 내게도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레리눔의 수도사 빈켄티우스의 말

신성한 고대의 거룩한 교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것도 [우리] 후손들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Nothing ought to be believe by posterity save what the scared antiquity of the holy Fathers consentient in Christ has held.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이란 의미에는 올바른 정통해석도 같이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16-17C 신학자들은 위대한 교부들의 해석을 버리지 않고 존중하며 연구했다.

앞선 5C의 경건한 수도사도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이런 말을 남겼는데, 오늘날엔 이런 얘기하면 가타부타 사설들이 달린다.
믿어야 할 것들과 절대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은 확실히 정해져있다.

그만큼 무엇이 정통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인듯 싶다. 하지만 성경과 정통을 동등한 권위시 해버리는 '전통주의'의 오류는 기피하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일치된 바른 해석의 결과물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를 갖춰야 함이 절실하다....

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전장

[전장 - Battle Field]

노동은 은혜의 현장인 반면 영혼의 단말마가 퍼지기도 하는 전장이다. 전장과 '은혜의 현장'간 공통점이 있다면 시시각각 언제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슴이다.
전장에서는 아무리 치밀한 계획과 전술로 무장한 지략가라도 한순간에 일망타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때론 수시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등뒤에 강을 두고 가장 중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광포함'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근본적 이유는 전장과 마찬가지로 생사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중 최상위 영역도 기초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도달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매슬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끼게 되는 장소를 '자아실현'에 뒀다. 그러나 그 단계 사이사이가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란 것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기독인들은 노동의 현실이 전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곳이 은혜의 현장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말씀이 최적으로 적용되어질 수 있는 풍부한 은혜의 터다. "은혜는 한겨울에 자란다."고 말한 사무엘 러더포드의 명언은 이 노동현장에서 최선으로 발현된다 생각한다.

다만 청년들 대다수가 교회에서 배우는 가르침과 노동현장에서의 적용을 동떨어지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 한국교회들이 복음에서 빗나간 어리석은 행보도 두둑히 한 몫 했다.
그 결과 바른 작은교회가 교리교육과 그 실천에 힘쓰더라도 벅찰 수 밖에 없다.
이미 중병이상의 상태라 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교회의 윤리적 역할이 미비해지자 의식있는 청년들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부르짖는다.
심하게는 신학자 및 목회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아쉬운 점은 이들도 신학적 역량은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편협적인 사고 방식으로 주위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전투는 승리를 바라봐야지 광포함(BERSERK)을 뒤집어 써서는 안된다. 의의 전쟁이라 포장을 한 십자군 전쟁도 결국엔 탐욕을 위해 광포함을 뒤집어 쓴 모습이였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왕은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분의 군사다.
이미 승기를 거머쥔 전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수세에 몰린 호적은 그야말로 몰살의 위기에 있기에 발악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적들의 저항으로 인한 전투로 인해 부상과 치명상을 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광포보단 용기를 가지고 부딫히자!

우리 구주께서 친히 앞장서서 싸워 이기셨다는 것을 잊지말도록 하자!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책임 강박증

핸드폰이 꺼져있는 바람에 오늘 늦잠을 잤다.
출근준비중에 죄인중의 괴수인 내 모습을 봤다.
아..나도 한 예민한다는게 받아들여지는 중이다.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알 수 없다.

야근은 누구나가 지쳐하는 일이다.
누군들 일을 일찍 끝내놓고 쉬고 싶지 않겠는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동료들과 분투끝에 금일의 넘치는 일을 정리했다.

노동은 은혜인것이 맞고 참 감사한 일이지만 육신이 고된건 피할길이 없다. 그래도 감사히 일할 수 있는게 기쁨인건 맞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는건 앞에 있던 고단함을 날려버릴 정도다. 육신의 피로가 가신것은 아니지만 그것 이상의 은혜가 넘친다. 오늘 그것을 경험했다.

같은 부서 대리님께서 야근후 식사중에 조심히 입을 떼셨다. "호성씨 교회가 어디에요? 저 사실 기독교신자인데 방황을 그치고 마음 둘 곳이 필요합니다..."

뜻밖의 전도기회가 찾아 왔다는 기분이다...
"내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함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한영혼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실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대리님께서 신자인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근무하다 내가 신자인걸 아시고는 묘하셨다고 한다.

기도와 묵상이 필요함과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데 진실된 사랑을 동반시켜주시기를 소망한다.
오늘 업무와 야근으로 뭉친 침체? 당연 한방에 날아갔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8)

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침체

한 개인영혼의 침체는 그 사람의 신앙에도 큰 위협을 가하지만 공동체의 질병이기도 한 것 같다.
반대로 한 사람의 경건은 공동체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윤활제와도 같다.

그러나 교회의 영원한 생명과 힘은 그리스도다.
개인이 침체여도 그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한 사람의 경건 또한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곧 종교개혁일 기념하는 날이 다가온다. 침체된 중세교회를 개혁한 선배들의 분투와 노고가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무엇때문에 그랬는가에 의미를 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침체에 더 가깝다. 종교개혁이 이뤄냈던 진보보다 더 퇴색된 신학과 신앙으로 얼룩져 있다.

보수와 진보진영으로 나뉘어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주는 즐거움과 삶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되려 이데올로기화 시켜 잘못된 방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하지만 인간이 이것을 어떻게 변질시켰던지 간에 신학 그 자체가 지니는 본질은 건드릴 수 없다.
그것을 어떤 형태의 이론화를 시켰던 '그리스도' 그 자체의 신학은 영원, 무한, 불변이다.

삼위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주 제1의 신학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어떤 대상과 본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도 제 이위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하나님으로 소급되지 않는다면 외곡된 해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위기의 신앙이면서 침체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현대는 각박하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의 선배들이 어떻게 그 침체의 시기에서 저항할 수 있었는지 배워야 한다.

오직 성경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모든것을 다시바라봐야 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음침한 침제의 그늘에 강력한 조명을 비춰주시기를 소망한다......

2015년 10월 8일 목요일

하나님의 가장 약하심이 인간의 가장 강력함보다 더 강하다.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무한성이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런 주옥 같았던 신앙선배들의 표현들이 오늘날에는 왠지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 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작은 은혜의 방편이라도 하나님이 쓰시면 크게 사용되는 것은 성경이 늘 증명하고 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도 그 증거중 하나다.

"그 성읍의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내가 이제까지 행한 모든 것을 그분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다, 한 그 여자의 증거로 인하여 주님을 믿으니"
(요 4:39 KJV)

진정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마리아 촌의 창녀였던 여자가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써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물가의 이 여인을 만나러 가셨다.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정녕 이 여자는 힘 없는 약자였다. 남편이 하도 바뀌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기에 손색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이런 여인과 예수님께서 말을 섞는다는 것은 약점을 만들어 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으니 말이다.(요 4:27) - 당시 유대법상 사마리아인과 말섞는게 금지되어 있었다. -

하지만 기이하게도 제자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묻는바가 없었다.
그들 마음속에는 이미 깊이 있게 예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함부로 물을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야' 라는 생각이 시작된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마을에 복음을 전했고 성읍의 많은 백성들이 그리스도께로 모여들었다. 마치 지극히 작은 점에서 시작되어 면으로 확장되듯이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관계됐다는건 어찌보면 당시 예수님의 적(?)들에게 꼬투리가 잡힐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연약하고 작은자를 쓰셔서 이뤄낸 결과들을 보라......

"하나님의 가장 약하심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것 보다 더 강하다"란 표현을 뱉을 수 밖에 없다.

2015년 10월 4일 일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향한 신학적 도전들

1. 로드파의 공동 기도서와 교회법(국교회)

2.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은 아미랄드 파의 가정적 보편구원론

3. 반율법주의(antinomianism)

고백서의 신학적 체계가 견고해 질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여진다.

그 견고함의 중심에는 "성경 본문에 대한 장기적인 고찰에 의해서 발전되고 강화됐는데, 성경 석의(exegesis)가 그들의 사역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멀러 인용

그것은 또한 교부들 이래로 석의의 역사와의 광범위한 친밀성에 의해서 특징지어졌다.

예정론에 있어서 후택과 전택을 둘다 허용한것은 성경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을 뿐더러 칼빈주의적 일치를 고려한 결과로 보여진다.

덕분에 신학의 방어체계는 치밀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로버트. A. 레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에서 발췌.

17C 당시 총회를 향한 신학적 도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해지고 있는 것들이라 보여진다. 세기와 단체명만 바뀌었을뿐 그 근원은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선배들의 발자취를 통해 현대 교회에 닥쳐오는 위기들에 대한 대비와 예방을 동시에 갖출 수 있다.

총회가 치밀한 신학 방어체계가 갖춰지게된 필수요소는 이 두가지라 생각된다.

1. 성경본문에 대한 장기적인 고찰이 동반된 성경 석의(exgesis)

2. 교부들 이래로 석의의 역사에 관한 광범위한 친밀성

이 두가지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건 총회는 결코 초대교회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성경본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는 것은 가장 상위에 두었다. 선배들은 전통적으로 이어내려오는 이 두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성경을 "norma normans(규범하는 규범)" , 교리는 "norman normata(규범된 규범)"으로 말이다.

오늘 주일예배 설교말씀(마 28:18 ~ 20)을 다시 생각해보며 위의 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똑같았다.

우리 교회가 교육을 강화하는 이유도 17C의 상황과 현대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교역자분들과 성도분들이 인지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교회가 성경과 신학을 가르키기를 잃었다는건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진리를 왜곡시키겠다는 말과 같다. 교회를 향한 신학적 도전들은 날이갈수록 예리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세우신 교회들을 통해 세워놓은 견고한 신학적 방어체계인 '교리'가 있다.
이것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없어선 안 될 필수적인 은혜의 수단들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 : 20 )

2015년 9월 30일 수요일

Data off/ 인식전환 On

본의 아니게 데이타를 다썼다. 이틀간 나의 폰은 침묵을 지키게 됐다. 없어도 불편하지도 심심하지도 않았다. 되려 한 문장을 곱씹는데도 더 긴 시간을 소요하게 되는 꿀맛을 누렸다.

사색을 할 때는 디스플레이 보단 하늘을 더 쳐다보게 된다. 그러나 앞으로 2시간 뒤면 데이터는 완충된다. 다시 반폰바라기가 되겠지만 스맛폰은 현대에 있어서 필수적인 아이템이면서도 아닌듯 하다.

데이터를 오프하면서 느끼는건

1. 레티나 스카이 보다는 육안 하늘이 더 낫다.
2. e-book보다는 양장본이 더 낫다.
3. 앱 바이블 보다는 종이 성경책이 더 낫다.
4. 카톡하다 문자하니 새롭다.

우린 죙일 모니터만 보는 인생들인데 뭐가 있다고 팝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은 눈이 마땅히 봐야 할 것을 담게 되는 것이라는걸 놓쳤다. 끝도 없는 무한을 바라보는 것... 하늘조차 다 담지 못하는 눈이었는데 말씀이 육신되신 그 분이 담겨 주셨다는건 충격이 아니던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 10:23)

2015년 9월 29일 화요일

연휴 끝

길었던 연휴가 끝나고 내일은 본격적인 출근이다.
어떤 일들이 기다리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주신 이 노동에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 또 공부하며 배워나가는데 귀한 밑거름이 되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이다.
이 곳에서도 하나님의 귀하신 섭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시 썼다.

낙엽이 지기전에
                        지은이 : 배호성

서늘한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마른다
다가온 계절을 입고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내 한 걸음 그대에게 옮겨보리다
메마른 낙엽이 지기전에
메마른 낙엽이 지기전에

그때에 내가 다가 갔으면 더 좋았으련만
지금 떨어지는 낙엽만큼 내 걸음도 떨어지면 좋겠소

- 오랜만에 써봤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Potius sero quam numquam.

라틴 경구다.
"전혀 안하는 것 보다는 늦게라도 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이다.

'전혀'(numquam=never)란 의미가 붙은걸로 보아 시간, 나이 개념의 상관없이 도전하라는 의미인 것 같아 보인다.

오늘날 현대는 고대와 달리 시간이나 나이를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많이 박탈 당해서인 듯 하다.

"모든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나 "전혀 안하는 것 보다는 늦게라도 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시간을 아끼라'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듯도 하다.

그러나 지나갔더라도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만학도면 어떤가? 지금부터라도 체력관리는 필수인듯 하다!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 1:46)

빌립이 전한 복음을 듣고 반응한 나다니엘의 냉소다.
이런 작은 촌구석에서 그런 위대한 존재가 어찌 나오겠느냐는 편견이 깔려있다.

당시 유대의 메시아관은 화려함과 웅장함이 덧칠해져 있었다. 그는 자연히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날은 비판과 불만이 난무하는 시대다. 잘못된 것들 투성이지만 나다니엘과 같은 실수는 피해야 되지 않나 싶다. 자신의 교회가 작다고 위대한 직분자가 안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신학적 위용과 해석을 자랑하는 신학교라고 해서 위대한 경건자를 잘 발굴해 내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잘못된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그안에 경건한 성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타나셨듯이 오늘날 참된 경건자는 참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탁월한 명성과 지위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삶으로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인이 진짜일 수 있다.
그런자들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다.

나는 과연 그런 그리스도인인가?...
과연 나다니엘의 속내를 꿰뚫어 보셨던 예수님을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빌립과 나다니엘(요 1:43 - 51)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서 직접만난 빌립은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못베기는 상태가 된듯 하다. 그가 나다니엘을 찾아갔는지 어쩌다 마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시야가 오셨다고 즉각 알린다. 텍스트라 상황의 디테일은 알 수 없지만, 나는 빌립이 상당히 기쁨에 들떠 호들갑을 떨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빌립은 말그대로 은혜의 충만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비해 나다니엘의 태도는 빌립의 행동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 침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그의 발언이 그 상황을 보여준다.

"나사렛에 무슨 선한것이 나겠느냐?"

미전하고 작은 촌 동네에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나올리가 있냐는 냉소적인 태도로 빌립의 입을 막았다. 왠지 빌립은 이곳으로 그리스도께서 걸어오고 있는데 침착한 나다니엘이 속터지게 답답했을 듯 하다. 나다니엘이 그런 모습이였던 것은 당대 퍼져있던 메시아관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가깝게 표현하면 잘못된 교리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해도 되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임팩트가 있어 보이듯이 여기고 있는 모습들이 있다.

빌립은 자신의 혀로 나다니엘의 옷깃을 낚아챘다.
"와 보라"
마지못해 끌려나간 나다니엘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은 그리스도셨다. 마치 빌립이 나다니엘을 데리러 갈 줄 아시고 나타난 것처럼 표현되 있는듯 하다.

맞다. 그리스도는 나다니엘을 미리 먼저 아셨기에 찾아오셨다. 그것은 48절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칭찬을 건내신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니엘이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선 나다니엘을 선하다 하신다. 그는 이 말씀 이후에야 비로소 바른 믿음이 생겨났다. 그전까지 그는 외형만 바른 신앙인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니엘을 의롭다 칭해주심과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심으로 당신이 구속주이심을 여지없이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심을 보여준다. 나다니엘은 어린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였다. 그는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이기 때문이다.(요 1:13) 이와 동시에 주어지는 교훈은 하나님께 감춰질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