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6월 30일 화요일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잠 1:5)

모든 지식의 근본일 뿐만 아니라 삶의 목적이기도 하다. 인생을 참으로 복되게 사는 유일한 수단은 바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문답 1문은 인간의 주된목적에 대해서 묻는다.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영원토록 즐거워 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 청년들의 신앙생활의 답은 어디에 두고 있는걸까? 우리는 이 지식의 근본을 잘 유지하고 있는지 의문이다.삶의 각박함 뿐만 아니라 인생에서 매번 일어나는 실수와 관계로 인한 상처로 얼룩진 우리들 마음의 자화상은 일그러져 있다.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는 자세는 미련함으로 빠져드는 안일한 태도다. 쾌락에 젖어가는 이 사회에 도덕적 훈계와 윤리적 질타는 멸시 받기 일수다. 하물며 일반적인 도덕관념도 무너지는 마당에 진리를 선포하면 잠꼬대 하는 경우로 비춰지기가 쉽다. 그래서 직장에서는 침묵의 태도를 고수하며 그리스도인임을 감추고 살아간다.
특정 사건을 계기로 신앙을 드러낼 기회를 포착했을 때만 비로소 자신의 믿는 바를 드러낸다.
당당히 신앙을 고백해야 할 시기에 고개를 숙이는 것이 다반사가 된 것이다. 또한 아비의 훈계와 어미의 법을 떠나지 말라는 권면에도 불구하고 가정에서 내려오는 신앙교육도 현대에 와서는 단절되어 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을 습득할 수 있는 교육의 공간이 마땅치가 않아지면서 신앙의 뿌리는 약화됐다. 학업과 취업이라는 생존에 국한된 강요로 인해 신앙이 뒷전으로 밀렸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여전히 시공간의 제약 없이 큰 소리로 부르신다. 소리가 멎은 뒤에 하나님을 찾는 것은 늦지 않을까 싶다. 하나님께서는 듣지 않았던 자들에게 두려움과 재앙과 공포가 엄습할 것을 선포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삶을 빌미로 조건을 내걸며 핑계로써 신앙을 뒷전으로 미뤘던 자들은 새겨듣지 않으면 후회할지 모른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을 경외하지 않는 자들이 끝내 재앙을 만났을 때 웃으시고 두려움이 임할 때 비웃는다 하셨다. 온 마음이 다 서늘해진다. 우리는 얼마나 귀를 막고 눈을 가리며 입술을 막고 말씀에 대해 침묵해 왔는가...
심지어 잘못됐다는 것을 알면서도 미련한 처사를 취하는 우리의 행동은 참 어리석다....

잘못된 행위의 열매를 먹으며 이 꾀에 의해 배부르지 않은 자가 되어야 할텐데.....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 없이 안전하다...
우리의 근본은 하나님께 있다. 하나님을 경외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하나님되심으로 우리가 그 안에 거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의 진정한 안식처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웨스트민스터 총회 역사 공부 후기 - 2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공부 후기 - 2]

1부에서 언급했듯이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 다른 양상으로 전개됐다. 본격적으로 들어가기 앞서 16-17C 영국의 지형도 변화를 살펴 봐야한다.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아일랜드 3국의 형태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국이 지지하는 종교들은 달랐다. 잉글랜드(국교회) , 스코틀랜드(장로회), 아일랜드(로마 카톨릭)
이것은 영국에서 벌어진 종교개혁이 낳은 독특한 결과다.

영국 당대 종교개혁 시기에 집권했던 왕들은 다음과 같다. 헨레8세 - 에드워드 6세 - 메리 튜더 - 엘리자베스 1세 - 제임스1세(스코틀랜드 제임스6세)

자 이제 구체적인 역사 정황으로 들어가 보자.

영국식 종교개혁은 외부로는 대륙의 종교개혁 여파로 인한 열강들의 정치 상황과 국내정치 상황들이 복잡하게 맞물려 있다. 다만 대륙형 종교개혁이 전형적으로 상향식 개혁이었다면 영국은 반대로 하향식 개혁이라는 독특함을 보인다.

하향식 개혁이라 함은 중앙(왕 - 시발점으로는 헨리8세)으로부터 아래로 일어난 것이란 얘기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서 헨리8세 시기는 제대로 된 종교개혁이라 볼 수 없다. 즉, 실패한 종교개혁이란 얘기다. 일반 세계사에서는 뭉뚱그려서 헨리8세가 영국 종교개혁의 초석을 마련했다는 견해가 있지만 그것은 오해다.
헨리8세 당시에는 종교개혁에서 보편적으로 볼 수 있는 순수한 요소들이 짙지 않기 때문이다.

헨리8세(1491~1547)가 종교개혁을 단행한 의도는 앤 불린이라는 한 여인에게 심장이 꽂힌 것이 원인이었다. 그는 앤불린에게 구애를 했지만, 정작 그녀는 왕의 정부가 되지 않으면 인생이 비참할 것이란걸 자신의 주변에서 확인했기 때문에 단호히 거부했다. 그 의미는 정부로 맞이하지 않을거면 댁 하고는 결혼 안하겠다는 뜻이었다.

앤 불린을 어떻게든 자신의 여자로 만들고 싶었던 헨리8세는 정부인 캐서린과 반드시 이혼을 해야했다.
하지만 당시 영국은 종교가 로마 카톨릭이었기 때문에 교황의 허가 없이는 이혼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헨리8세는 과감히 이혼을 허락 해 줄 것을 교황에게 요청했다. 나름 레위기 18:16과 20:21을 근거구절 삼아 타당성을 띄도록 포장까지 해가면서 말이다. 교황 입장에서 볼 때 이 터무니 없는 요청은 단호하게 거절 당할 수 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헨리8세는 맹렬히 삐지기(?) 시작했고 결국 불륜을 정혼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로마 카톨릭을 버리고 국교회를 창시하게 된다. 그 결과 캐서린과의 이혼은 성사됐고 그는 앤불린과 재혼해 그녀를 정부로 맞이한다.
당시 대륙쪽에서도 천재로 칭송받던 당대 최고이 인문학자중 한명이자, 유토피아의 저자인 토마스 모어는 왕의 독단적인 만행에 항소했지만 눈밖에 나버려 비참한 죽음을 맞이했다. 그는 철저한 로마 카톨릭 신자였다.

왕이 새여자를 맞이하고 싶어서 단행된 다소 황당한 종교개혁은 당연히 제대로 갖춰져서 진행된 것이 아니었다. 그렇지만 이때다 싶어 대륙의 종교개혁을 영국내로 유입하고 싶었던 개혁파 성향을 띈 토마스 크랜머와 수상 토마스 크롬웰은 잉글랜드 국교회가 대륙의 개혁파 교회를 지지 하도록 교두보를 두는 계기로는 작용했다. 허나 이것을 종교개혁이라 보기엔 너무나 약하다.

헨리8세의 시기를 정리하자면, 왕의 실질적인 관심사는 왕권의 강화와 정치적 입지 확보를 위한 의도가 가장 컸다. 때문에 종교개혁의 의도는 전혀 없었다고 봐야하는 것이 정확한 견해다. 그것은 1534년에 헨리8세가 공표한 '수장령'이 잘 증명하고 있다.

그러나 그가 정부 캐서린을 버리려고 개종한 행동의 결과는, 영국의 정치와 종교에 개혁과 피바람 까지 불게 할 정도의 원인으로 작용 됐다.
그도 그것까지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 3부에 계속

2015년 6월 29일 월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공부 후기 - 1

'종교개혁의 정점'을 찍었다고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총회 역사를 심화과정으로 황작가님을 모시고 함께 공부했다. 장소를 제공해주신 시광교회와 이정규 강도사님께 감사드린다.

이 스터디 모임에서 간과해서 안될것은 어떤 전문적인 아카데믹함 보다는 '느낌적인 느낌'을 잡기위한 것이다. 후에 따로 역사 내용에 전문성을 가지고 연구하여 교회에 기여하는 학자 혹은 성도가 양성되기를 소망한다.
나를 포함 이 강의를 들은 분들중에서 나왔으면 좋겠다. 아님 자식들에게서라도...(쿨럭;)

주의사항(?)은 이만하고 본격적인 후기정리에 들어가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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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총회의 역사를 균형있게 살피기 위해서 16-17C로 이어지는 종교개혁의 상황과 영국종교개혁의 상황을 봐야했다.

종교개혁의 공통성은 중세교회의 잘못된 점을 바로잡자이지만, 그 특징은 산발적이고 지역적이며 실패와 성공이 복합적으로 얼룩져 있다는 것이다. 각 시대마다 개혁이 강조되는 부분들은 달랐으며 주로 교리, 시편송, 교회정치, 예배, 성찬, 교육에서 이뤄졌다.
개혁의 근간은 당연히 항상 성경에 둔다.

그렇지만 전반적인 모양세를 보자면 더디지만 진리를 수호하며 바른 교회로 향하는데 성공했다. 하나님의 은혜라고 밖에 설명이 안된다.(결정적 증거는 우리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종교개혁의 화두는 '성경'과 '교회전통'이며
누가 더 성경적인가? 누가 더 바른 교회전통을 고수하고 있는가의 싸움이었다.

그 결과 종교개혁은 '사제'제도에서 비롯된 모든 부패의 척결과 성경적이지 않은 미신적 요소의 예전형태를 폐쇄했다.

또한 모든 성도들에게 성경을 보급했으며 그것을 가르쳤다. 그리고 교리문답서와 신앙고백서를 작성하여 성경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 성도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교리교육의 체계를 마련했다.

대륙에 종교개혁의 불씨가 거대한 화염으로 번져나가면서 대륙과 가까운 섬나라인 영국도 이 영향권에 노출될 수 밖에 없었다.

다만 영국의 종교개혁은 대륙과는 다르게 조금(?) 독특했다.

- 2부에 계속...

2015년 6월 28일 일요일

불의에 항거하라

성도가 세상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세상도 너희에게 판단을 받겠거든 지극히 작은 일 판단하기를 감당하지 못하겠느냐
우리가 천사를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그러하거든 하물며 세상 일이랴
(고전 6:2-3)

정당하고 바른 소리를 외칠수록 이제는 공격을 당하는 세상이다. 특히나 진리를 수호하는 신중한 발언에 있어서도 발끈하는 법이 많아지는 것 같다.

설령 이러한 바른소리를 내는 자들의 입술에 재갈을 물려 강제로 틀어막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공의의 속성에 따라 불의가 넘치는 이 세상은 자연히 심판받게 될 것은 명백하다.
"공의로 세계를 심판하심이여 정직으로 만민에게 판단을 행하시리로다(시 9:8)"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한편으로 선하신 뜻이 이 지상에 완성되기 전까지는 교회를 통하여 자신의 '의'를 드러내고 계심도 분명하다.
그분은 성도들에게 상당히 높은 차원의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끌어내심으로 세상뿐만 아니라 천사까지도 판단받게 하신다. 눈에띄지 않는 지극히 작은 불의까지도 그 판단을 피할 수 없단다. 성경은 그 점을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세상은 점점 더 어두워져 가고 있다. 무엇이 옳은지 그 판단을 더 상실해가고 있고 심지어 올바른 정의가 무엇인지 분간하지 못할 정도로 갈피를 잃었다. 한 때 마이클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란 저서가 선풍적인 인기를 끈것도 혼란한 시대정신을 대변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오늘날 현대는 더 짙은 암흑속으로 빨려들어가는 것 같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이 차가운 어둠속에 늘 교회에 빛을 두셨다.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통하여 항상 이 세상이 불의로 가득찼음을 드러냄과 동시에 복음이란 따스한 볕을 드리우셨다. 교회를 통해 당신의 선하심을 확장시키신 것이다.

다만 대다수의 많은 교회들이 그 빛으로써의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장하기 보다는 세상의 것들을 교회안에 정착시키고 있는 판국이다.
신앙의 선배들이 피를 뿌리며 유산으로 남긴 교회의 전통들을 옛것으로 취급하고 먼지속에 넣어버렸다. 그 결과는 젊은 세대들이 써야될 분별의 안경을 뺏어간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렇다고 희망이 아예 없지 않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실패함이 없으며 지금도 우리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놀라움으로 선한 일들을 이뤄내신다.

일부 소수의 건강한 교회의 성도들이 교리교육을 통해 진리를 수호하는 역할을 다하고 있음을 SNS를 통해서건 소속된 교회를 통해서 확인되고 있음이 그 예라고 볼 수 있겠다.

물론 지금 그들이 성경말씀과 교회의 전통(신조와 신앙고백서)에 입각한 바른 진리를 선포함으로 인해 받는 피해는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일부는 극단적인 행동으로 인해 갈등을 조장하고 있다는 지적도 피할 수 없겠다.

그렇지만 오히려 정통교리의 입장에 가까울수록 교회의 입지가 좁아지고 있음이 현실이다. 되려 교회내 일부 성도들도 성경적이지 않은 사회적 일들에 동조하기 시작면서 진리를 왜곡하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불의에 항거하여 바른 소리를 뱉는 성도들을 공격하는 경우도 심심치 않은듯 싶다. 여러모로 교회 내외부에서 받는 압박이 극심하다. 아이러니하겠지만 그게 제대로 된 길을 가고 있다는 증거이지 않나 싶다.

"하나님께서 비록 불의하게 압박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당장에도 돕지 않더라도 그가 그들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갖지 않는 때가 한 순간도 없으시다."(존 칼빈)

우리는 이러한 확신 을 가지고 불의에 정당히 항거함과 동시에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복음을 전달하고 증거하기를 힘써야겠다.
또한 과격한 행동과 언사는 삼가하고 예를 갖추는 지혜를 발휘해야 함을 잊어서도 안될 것 같다.

그러나 너무 신중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불의하다고 하신것에 나의 입술을 멈추고 산과 들로 피해 숨죽이며 눈치를 보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하나님께서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에 "아니라고 말씀하신다!"외치는 용기가 필요하다.

2015년 6월 27일 토요일

믿음이 연약한 자를 대하는 태도

믿음이 연약한 자를 너희가 받되 그의 의견을 비판하지 말라(롬 14:1)

바른 신학...즉 정통교리에 대한 지속적인 공부를 하다보면 자연히 아는 지식이 늘어남으로 해서 교만의 범주에 노출되기가 쉽다.

나보다 교리를 모르는 지체와의 비교의식에서 출발하게 되는 교만의 근종은 마음 한구석에 자리를 잡아 조금씩 뿌리를 깊게 내린다.

이것이 악성으로 돌변했을 때 나타나는 증상은 정죄의 칼날을 휘둘르게 되는 것이다. 결국 이웃뿐 아니라 나 자신의 영에도 상처를 가하는 잔학함으로 이어진다. 이것은 사랑이란 면역력을 잃어버림으로 인해 초래된 증상이다.

상대가 말씀과 교리를 잘 모른다고 해서 언제까지고 계속 모르는 것은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에 따라 그 영혼이 가진 믿음의 안정적인 성장을 이뤄내시기 위해 은혜의 물줄기를 단계적이면서도 지속적으로 공급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굳은신뢰가 견고하고 균형있게 자라나는 것은 지체마다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하나님의 때를 기억하며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그들의 연약함을 받아주라 권면하는 것 같다. 가령 지체가 이상한 기도의 태도와 잘못된 말씀의 해석을 꺼내더라도 참고 받아주되 비판은 가하지 않아야 함은 이들이 아직 소화력이 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롬 14:2)

젖을 먹어야하는 영유아기의 아기에게 이유식을 주는것이 미련한 태도다. 그와같이 초신자에게 어려운 교리를 들이대는 것 또한 미련하다 볼 수 있다. 오히려 하나님께선 그들에게 말씀의 젖을 주시고 계시는데 말이다.
하나님께서는 젖을 주시려고 하는데 우리가 지체에게 이유식을 들이밈은 명백한 소통의 부재다.

우리도 미성숙한 신앙의 시기가 있었음을 되돌아 봐야겠다. 하나님께서 성숙한 신앙으로 이끌어 내시기 까지 우리는 얼마나 많이 헤메였던가?
그러므로 연약한 지체를 대할 때 하나님께 기도로써 여쭤보며 자신이 먼저 말씀으로 연단받음이 필수적이다.

참된 최고의 스승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성숙한 지체들은 이 점을 명시하며 연약한 지체에게 배운 사랑으로 인내하며 차근차근 말씀과 교리를 전해야 할 것이다. 우선은 삶으로써 말이다.....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가르치실 때의 태도가 그러하셨다.

2015년 6월 26일 금요일

주보 칼럼을 작성하며...

보잘것 없는 글재주를 인정받아 주보 칼럼을 작성하고 있지만 여간 부담스럽다.
글을 쓰면서도 경건하지 못한 내 자신을 돌아보며 부끄럽기 때문이다. 보잘것 없는 글이라도 마음은 하나님께서 귀히 써주시길 바란다.

교만함이 베어있지는 않나 뜯어보고 벗겨본다.
그러나 글이란것이 참 오묘한게  자신이 작성한 내용이 무엇인지 파악못하게 살며시 안개를 피운다. 특히나 신앙을 다루는 주제에 대해서는 심혈을 기울여야 하것만 그렇지 못한 나를 본다.

연암 박지원은 글을 쓸때 단 일획이라도 틀리면 그 자리에서 바로 종이를 꾸기고 버렸다고 한다.
어느정도 나이가 지긋히 들었을 때까지도 수십수차례나 쓰고 버리고를 반복했다고 하니 글의 대가라 칭송받을만 하다.
박지원이 신자는 아니지만 여러면에서 배울점은 많다.

여러가지 작문스킬도 좋지만 작성하면서 느끼는것은 역시나 하나님 앞에서의 경건이다.
제 아무리 좋은 글을 가래떡처럼 뽑아낸다고 한들... 신앙이 주제인 글에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담겨 있지 않으면 어찌 좋은 글이라 할 수 있을까?

2015년 6월 24일 수요일

작은생명으로도 능히 원수를 침묵시키시는 하나님

주의 대적으로 말미암아 어린 아이들과 젖먹이들의 입으로 권능을 세우심이여 이는 원수들과 보복자들을 잠잠하게 하려 하심이니이다
(시 8:2)

하나님의 영광이 어찌나 큰지 앞절에서 시편기자는 그 위대하심을 찬양한다.
하나님께서는 홀로 영광받으시고 스스로 높임받으시는 존재이시기 때문에 자신의 영광을 하늘들 위에 두셨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땅을 바다 삼아도 하나님 영광의 무한함은 모든건을 덮고도 남을 분량이다.
그렇기에 그분의 지극히 작은 손짓에도 어마어마한 분량의 영광이 흘러넘침을 부인하는 신자는 없을 것이다.

불신자들은 자신의 삶에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기에 그 어떤 상황에서도 자신의 영광만을 드러내려 한다. 설령 그가 도덕적이고 능력이 넘칠지라도 그가 가지고 누리고 있는 모든것들을 제공하시고 보존하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믿지 못하고 손사레를 치며 부인하겠지만, 그분은 젖먹이와 어린아이들의 입을 통해서도 능히 원수들을 막으실 수 있는 분이시다.

그분은 지적인식능력이 성장한 유아의 입술로 자신을 능히 드러내실 수 있다. 그러나 그것보다 더 놀라운 일들로 영광을 드러내고 계시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바로 갓 태어난 신생아가 어머니의 젖을 빨도록 하게 하시는 자가 누구인지 생각해보라...
태어난 아이가 생존하기 위해 본능데로 어머니의 젖을 물고 강력하게 빨아대는 힘의 원천이 어디서부터 나오는지 생각해보라...
그 본능이 어떻게 생겨나는지 누가 대답할 수 있을까?

하나님의 섭리가 작디작은 신생아에게도 미처있음은 원수들은 모른다. 또한 인간이 유아기에 어머니의 젖을 빨고 성장하도록 설계하신 것 또한 모른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이 작은섭리만으로도 능히 원수들의 입을 틀어막으실 수 있다고 말씀하신다.
그렇기에 우리가 어찌감히 나의 성장과 살아있음을 나의 능력이라 하겠는가?

우리가 부모의 품에서 나고 길러졌지만 이 지상에 그 부모를 탄생시키시고 그들을 통해서 나를 형성하시고 길러주신분이 누구시던가?...

오늘날 우리가 아이를 그저 낳고 기르고 하는 것이 단순한 것이 아니라 그분이 일하신다는 것을 알아야하겠다. 생명의 탄생이 어느때는 작고 흔한일처럼 보이고 취급되지만 결코 작지도 흔치도 않으며, 원수까지도 입다물게 할 수 있는 위대한 일인 것이다.

물론 아직까지 아이의 탄생은 위대한 일로 비춰지고 있다. 얼마못가 생명과학과 유전공학의 기묘한 장난(?)으로 별것도 아닌 일처럼 비춰질까 염려된다. 이들의 연구결과는 그들의 만족의 주머니를 두둑히 채우고 명성을 올릴정도로 발전했다. 하지만 남녀를 통해 정상적으로 탄생되는 생명의 신비에 비하면 이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그들은 아는지 모르겠다.

결국 잘못된 유전공학의 성과가 세간에 혁혁한 전공을 세우고 노벨상의 경종을 울릴것이다. 생명을 기만하는 태도임을 모른채 그들은 인류가 진보의 한걸음을 내딛었다며 박수를 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작은생명이 탄생하여 울부짖는 울음소리로 그들의 오만함을 향해 심판의 경고를 날리고 계심을 그들은 모르고있다.

2015년 6월 23일 화요일

고용보험센터 방문

고용보험센터에서 교육을 받아야 하기에 땡볕을 뚫고 일산시내를 걸었다. 더위와 메르스 파급으로 어수선한 시기에도 많은 사람들이 먹고살기 위해 강당을 채웠다.

청년은 나 혼자밖에 없고 좌석에 모두 4~50대들로 가득찼다. 청년구직자 수 뿐만 아니라 4~50대 구직자들도 많다니... 참 마음이 그렇다. 그러나 그 생각도 잠시 교양과 매너를 한구석으로 치운 50대 아저씨들 덕분에 불쾌아닌 불쾌를 경험했다.

교육중에 버젖이 큰 소리로 통화를 하지않나
줄서있는데 내가 어리니 그냥 그 앞을 새치기 하질 않나...

아무리 먹고사는 문제가 급급하다지만 이게 뭐라고 저렇게 행동하시는지 알 수 없다.
대한민국 왜이러나...?

실업급여를 타는것도 절차가 상당히 까다로웠다.
나이드신 어른분들은 이해못하는 내용이 상당수다. 그런데 이 모든 원인이 부당수급때문에 그렇게 된거란다.

먹고 살려고 그런건데 너무하네라고 따지는 입장이나 그것도 엄연한 범죄라고 따지는 입장이나 사실 둘다 모호하다.

문득 마이클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에서 다뤘던 분배정의의 오류가 떠올랐다. 공공성을 걸고 넘어지지만 결국 어떤것이 공정한 분배인가의 돌뿌리에 부딪힌다.

국가의 횡포(?)와 시민의식 결여의 시너지 효과인건가?...

그래도 거저 얻어먹을 수 없다는 것에 감사했다.
일하지 않는 자 먹지도 말라라고 하지 않았나?
작은 수고를 통해 주시는 은혜의 소산을 받아 먹음이 더 기쁘다.

2015년 6월 22일 월요일

우리 교회 청년들을 생각하며

우리 교회 청년들이 지쳐있음을 본다. 나도  청년부 일원으로써 이 지친기색에 함께 노출되있다.
바른 신앙과 신학을 쫓아 건강한 교회를 찾아왔음에도 처음 가졌던 열정들이 모두들 식었다.


시대의 문제와 세상의 문제들이 겹쳐 신앙생활의 많은 걸림돌로 작용되는 것을 나눔을 통해 보게된다.
그 갈등의 골 사이에서 고민하는 청년들은 하나같이 지친기색이 역력하다.


그러다보니 교리 또한 머리로만 아는것에 지쳤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가 도대체 어디까지 알았다고 할 수 있을까? 무엇을 알았다고 하기에 머리로만 아는것에 지쳤다고 하는걸까?
하나님을 알고싶어서 발버둥치는 간절한 영혼들과 비교했을 때 우리는 영적폭식이 아닌 지적폭식으로 변질 된 것은 아닌지 점검해 본다.


모교에 있을 때 내게 로마서를 가르치셨던 전도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셨었다.
"영적폭식은 해도해도 좋은겁니다."
우린 지금 지식을 채우러 교회로 오는 것인가 영혼을 채우러 교회에 오는것인가 비교해볼 일이다.
아니... 되려 교리를 배우는것에 지쳐서 교육을 빠지고 있으니 이건 뭐라 설명해야할까?


머리로 알았다는 것에 있어서도 의문이 든다. 우리가 성경전체로 교리를 바라봤는지 점검해 봐야 될 일일듯 싶다. 그런 의미에서 신앙고백서는 괜히 있는 것이 아니다.
물론 우리가 신앙고백서의 문답네 한번에 동의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의 촉수가 경건으로 뻗어나가지 못한다면 그저 딱딱한 이성이란 부산물에 머무르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되려 마음은 냉랭해지고 육신은 피로해질 수 밖에 없다.


교리를 배웠다고 해서 삶의 전반적인 부분이 해결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일어나는 모든 상황들에서 무엇에 의지해야 하는지 정확한 답을 준다. 그것이 버겁지만 한편으론 하나님 없이 우린 아무것도 아니기에 정해진 답이 있다. 즉, 우리가 말씀을 직접적으로 적용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아니, 불가능하다. 이것을 교리로서 사고하고 판단하는 것이다. 교회전통의 중요함은 여기에 있다. "너가 누구를 믿고 의지하느냐?"


교리는 곧 삶이다. 머리로만 아는것에 지쳤다고 하는 지체에게 사실 위안과 다독임을 줘야하지만 한편으론  태도들에 문제가 있다.


과연 교리를 제대로 배웠다고 할 수 있는가? 분명 당신은 처음 교리를 접할 때 아는것에 대해 행복해 했다. 성도가 하나님을 알아갈 때 비로소 행복한 법이다. 삶은 우리의 힘으로 살아지지 않는다. 말씀을 배우고 교리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 힘으로 되지 않는다는걸 배우는 것이다.


전적주권에 의지하는 사람의 삶이야 말로 행복한 삶이다. 우리의 의지보다 하나님의 의지가 선행한다는 것을 아는 것이니까.


물론 삶에서 무수한 상황들이 우리에게 아리송한 답들만을 제공한다.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의지하는 것은 누구인가? 하나님이시지 않는가?....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구석구석 미치지 않는곳이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의지하고 행동하는 것이 올바른 것인가?... '교리'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의지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말씀 아닙니까?"라고 질문이 나올 수 있겠다.
그것도 맞다. 교리위에 말씀이 있는것이 맞다. 위와 같이 얘기하는 것은 교리가 말씀을 바르게 바라보게 하는 척도로써의 의미를 담았다.


우리의 삶은 한번에 변화되지 않는다. '성화'되어 가는 과정인것이다. 그 가운데 숱하게 넘어지고 깎이고 부딫힘이 있다. 설령 지체가 무수한 단점과 결점들이 보이더라도 우리는 사실 이해할 수 있다. '타락'한 본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 또한 저런 침체에 빠질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하겠다. 그러나 저마다의 믿음과 고백이 이어지는 가운데 그 뚜렷한 기준을 마련하는 것이 '교리'다. 삶의 점검도 되는 것이라 하겠다.


'교리'에 지친 청년들에게 위로와 다독임이 필요한 시기인것 같다. 동시에 우리 스스로가 과연 경건에 힘썼는지도 점검해 봤으면 좋겠다. 사실...사회생활은 핑계인것 같다는 생각도 많이 든다. 왜냐면 다른건 몰라도 언제든 기도할 시간과 말씀을 읽을 시간은 확보될 수 있기 때문이다. 말씀 10장을 읽었다고 다 읽은것이 아니다. 2시간 기도했다고 양질의 기도를 드린것은 아니다.


단 1구절이라도 성령님의 내적조명하심에 의지하여 읽어내며 그 해석까지도 맡겼다면 배부른 것이고 단 1분이라도 창자가 끊어질 정도로 그분께서 가르치신 기도법으로 소통했다면 충분하다.


죄성때문에 게으르고 나태함을 방패삼아 경건을 밀어내는 우리들 모습을 보며 깊이 생각에 잠겨봤다.

사무엘 루터포드(Samuel Rthurford)전기

17C 목회자 루터포드의 전기를 다 읽었다.
킹슬리 랜델의 시각을 빌렸지만 시대를 풍미했던 이 작은 목회자의 이야기가 맘에 닿는다.

전기를 읽으면서 얻는 유익은 다음과 같다.

1. 이 보잘것 없는 인물을 하나님께서 어떻게 사용하셨는가를 보는것과

2. 그를 통해 우리에게 남겨주신 유산이 어떤것이고 우리가 어떻게 누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과

3. 그 인물을 통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는 것이다.

루터포드는 웨민총회에 영향을 미쳤던 위대한 신학자이기도 하므로 장로교의 역사에를 거론하는데서 빠질 수 없는 인물이기도 하다.

그의 고결한 성품과 단단한 학식은 교회의 진리를 지켜나가는 일을 해나가는데 주어진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의 잘못된 진리에 항변하는  뜨거운 용기와 성도들을 향한 따듯한 사랑은 내가 배워야 할 태도같다.

물론 시대는 그에게 냉대했지만 "은혜는 한겨울에 더 자란다..."는 말을 남길정도로 그럴수록 믿음의 확신이 굳건해져 나갔던 것 같다.

시련은 이 지상에서 잠깐이지만 다가올 그리스도의 영광은 영원할 것이라는 걸 이 선배는 잘 알았다.

또한 그의 견고한 학식은 성경의 교리를 체계적으로 정리할 정도로 탁월했다.
그는 성경전체로 교리를 볼 수 있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분명 웨민총회의 표준문서 작성에 기여를 했을 것이다.

루터포드의 생애를 보면서 참 고결한 삶을 살아간 사람이구나란 결론을 내렸다. 하지만 첫챕터부터 언급되는 추문에 대해서는 나도 의아한 점이 많다.

다만 알수있는건 루터포드도 그 문제에 대해서 하나님께 뉘우쳤으며, 이 후의 삶에서는 경건을 향한 열정이 넘쳤음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람이 오늘날의 많은 성도들에게 여러가지 이유들로 인해 주목받지 못하는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일부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성도들 사이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음은 부인할 수 없는 일이라 결론을 내리고 싶다.

2015년 6월 20일 토요일

소요리문답 스터디를 진행하면서...

지체들과 소요리문답을 시작한지 어언 2달이 넘어가는 것 같다. 단원은 '타락'까지 넘어갔다.
이제 곧 '그리스도의 중보'단원에 들어가는데 어려운 길인데도 잘 따라와줘서 감사하다.

인도자의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와 사랑은 이들에게 더 가득한 것 같다.

부당한 한국 현대사회에서 굳건히 자신의 자리들을 지키며 그리스도를 증거하려 발버둥치는 이들의 행보가 아름답다.

서로가 서로를 주안에서 격려하며 나아감이 성도간의 교제가 어떤것인지를 알게한다.

하나님의 섭리가 구석구석 닿지 않는곳이 없음을 체감한다. 다만 아직까지도 이런 교리교육에 익숙치 않아 하나님의 작정에 대해 불확실한 반응을 보이고 있음을 확인한다.

그리고 그동안 한국교회가 아주 중요한걸 놓치고 있었음을 내눈으로 보게된 셈이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음을 점검하게 된다.

하지만 늦은것은 아니다. 우리가 신앙의 선배들이 남긴 이 개혁의 유산들을 이어받게 된 것이 어쩌다 벌어진 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다. 한국 장로교회에 희망은 남아있다. 지금 젊은 세대들이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일어날 때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아버지의 뜻대로 살아가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순종하며 살아가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기를 바란다...

아버지께서 우리들을 그렇게 이끌어주시리라 믿는다.

2015년 6월 18일 목요일

바른 교사감

나는 과연 바른 교사감인가 고민해본다.
성경이 말하는 바른 교사는 경건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는 자다.

누구보다도 그리스도를 사랑하며 하나님의 전적주권을 인정하고 몸소 실천하는 성도다.

이들이 특별히 교회내에서 해야하는 주된의무는 크게 2가지다.
하나는 올바른 신학을 세워 외내부의 이단이 교회내에 침투하는 것을 방어하고, 둘째로는 바른 신학교육을 교회내에 실시하는 것이다.

이 두가지 역할을 잘 해 내기 위해서는 남과다른 특별한것이 먼저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신실함이 중요하다.

바른 교사의 길을 가기란 남들보다 앞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맛보고 성도들이 곁길로 새지 않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세우신 자들이다.

엄밀히 성도가 성장하면 모두 교사로써의 역할을 해야한다. 후대가 신앙의 유지를 제대로 이어받도록 하기 위해서다.

하나님께서는 복음을 우리를 통해서 계시하시고 가르치기를 좋아하신다. 그래서 교사는 성경을 늘 가까이 해야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시고 신자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지를 알려주시기 위해 직접 저술하신 책이 성경이기 때문이다.

교사는 성경을 깊이 연구하고 순종함에 있어서 모든 촉을 세우고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령님께 전적으로 의지하여야 한다.
말씀은 성령님의 조명하심 없이 한이오타도 해석될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삶이 살아있어야 한다. 입술로만 고백하고 자신의 죄에 대해서 회개함과 뉘우침 없이 교사의 직분에 앉아있는건 교만한 것이다.

교사란 무엇인지를 고민하고 생각해보며 마음이 무겁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하는 나의 삶을 보며 과연 내가 인도자의 자격이 있는가? 고민이다...

완벽한 성도는 이 지상에 없지만... 적어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경청과 순종...
두렵고 떨림으로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이 살아있어야 한다.

오늘도 하나님을 묵상하며 나의 연약함을 두고 기도를 드린다...

2015년 6월 17일 수요일

신자의 슬픔(시 6:6)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 6:6)

신자는 이 생에서 어떠한 고난을 맞이할 수 있다.
질병, 사고, 다툼, 관계의 단절등... 모든것이 끝났다는 생각에 이를정도로 사방으로 고난들이 우겨쌈을 가할때는 눈앞이 캄캄한 절망만이 가득하다.

시편기자는 이러한 고난의 배후에 하나님께서 역사하심을 깨닫고 느끼고 있으며, 이런 고난이 자신의 죄가 원인이되어 일어나고 있음을 알고있다. 그러나 무수한 고난으로부터 구원하실분이 하나님이심을 알기에 간곡히 자신의 상태를 고하고 있다.

그는 괴로운 상황때문에 하나님께 메달렸지만, 되려 드러나는 자신의 죄가 너무나도 치욕스럽고 가혹하여 하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는 상태이므로 그 슬픔이 침상을 다 적실정도다.

이런 상태에 이르렀을 때 비로소 하나님의 자비에 온전히 의지하게 된다. 고난과 시련으로 인한 막연한 상황이 오히려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일지도 모른다는 얘기다. 칼빈은 이 부분을 주석하면서 "신자가 하나님께 간절히 메달릴 수록 그 분의 진노에 대한 생각으로 말문이 막힌다."고 말한다. 우리는 도저히 스스로 주님께 나아갈 수 없는 진노를 사는 존재이며 그렇기에 슬플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실에 닥친 고난의 상황보다 하나님의 진노를 사는것이 우리에게 더 시급한 위기인 것이다. 그 진노로써 주어질 고통에 비하면 삶에서의 고난은 새발의 피보다도 더 낮다고 봐야 할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선하고 자비로우신 분이시다.(출 34:6)신자가 슬픔에 처할 때 득달같이 달려오시는 분이다. 그분은 신자에게 감당 못할 고난을 주시는 분이 아니시다.

그렇지만 당장에 그 고난을 거둬가시지는 않는다.
그분의 뜻에 따라 때가되었을 때 서서히 치우신다.

당신께 모든것을 맡기게 되기까지 그 고난을 지속적으로 허용하고 계신다.

그러므로 모든 상황과 내 자신을 온전히 그분께 맡기면서 우리의 행동을 결정하는게 가장 현명한 처사이겠다.

신자의 슬픔은 어찌보면 하나님의 열심으로 빚어지는것 아닌지 모르겠다. 당신은 어느곳도 아닌 자신께 토로하도록 슬픔을 허락하신다. 죄악의 비통한 슬픔에서 건져내실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주게 하기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께 가까이 할 수 없는 상태임을 슬퍼하는 것은 건강한 일이다. 우리가 간곡히 주께 메달릴수록 하나님의 진노가 먼저 떠오름은 정상이다. 그건 우리의 죄성 때문이다... 그러면서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벅찬감동도 따라온다. 성령님의 일하심은 놀랍다.

그렇기에 더 기도할 수 밖에 없게된다. 설령 좌절을 맛볼지라도 오직 하나님께만 그 슬픔을 토로함이 마땅하다.
왜냐하면 우리들의 유일한 안식처는 그리스도의 품 안이며, 유일한 위로자 되주시는 분은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이다.

야행

선선한 바람도 불고해서 집에 오는 길에 천천히 걸었다. 근처에 나무가 많으니 불어오는 바람도 더 시원하게 느껴진다. 가로등 조명을 받은 꽃봉오리가 어찌나 수줍음을 타던지 얼굴을 꼭꼭 가렸다. 아침에나야 그 얼굴을 보여줄건가 보다.

2015년 6월 15일 월요일

제9회 개혁신앙 세미나 참석

세움교회 개혁신앙 세미나에 참여했다.
신학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 도움을 받았기에 참 감사하다.

한국교계가 위기상황임에도 귀한신학자들을 양성해 내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놀랍다.
그리고 많은 신학생분들과 성도들이 참여하는 것을 보면서 개혁신앙이 단순 유행일까?라는 생각은 잠시 접어뒀다.

장로교회와 회중교회(이성호 교수님)의 비교 논문은 오늘날 교단의 현실을 돌아보는 중요한 계기가 됐다. 그동안 산발적으로 접해왔던 정보들과 내가 겪고 따로 공부한 직간접적인 경험들이 정리됐다. 그래도 최소한 교회정치라는 것이 나쁜것은 아니라는건 확신했다.

'정치'는 필요하지만 성경에 충실해야지 그 이하로 떨어지면 세상의 정치방식과 같아지는 것이다.
오늘날 성도들도 교회론적 인식도 바닥이었구나를 점검하게 된다. 물론 목회자의 잘못이 크다.
그러나 원망만 하고 있을 수 없다.
믿음으로 무장한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을 하나님께서 늘 요구하시는 것 같다.

맛있는 저녁을 대접받고 두번째 시간은 '예정인가 후정인가?'(이남규 교수)강의였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관심사였는데 도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나 소요리 스터디 모임에서 많은 나눔이 오갔던 '예정'의 문제들에서 어느정도 답변이 된것같다.

예정에 반발해 전도에 대해 던지는 질문중 개혁파 선배들이 남긴 주옥같은 답변이 기억에 남는다.
"오늘 안믿는자가 내일 믿을 수 있다."

선택의 주체는 늘 하나님이시다...

2015년 6월 13일 토요일

한국교회의 미래들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을 같이 공부하는 형제,자매들이다. 교리를 거부하는 오늘날에 배우고자 하는 열정들이 있다는게 귀하다.
부족한 인도자의 설명에도 서로의 의견과 삶 그리고 질문을 나눔에 참 감사하다.

스터디를 하면서 은혜도 참 많이 맛본다. 우리의 부족함에도 하나님께서는 정말 사랑이 많으신 분이다. 1문~12문까지를 정리하는 시간을 가졌다. 각자 공부한 내용을 정리하며 마인드맵을 척척 그려내 머리속에 그 골격들을 심는다.

'규범된 규범'으로 신앙의 튼튼한 지지기반을 형성하고 후에는 좋은교사이자 좋은부모로써 성장하고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를 위해 헌신하는 성도들로 거듭나게 해주시기를 소망한다.

함께 성장하는 믿음의 동역자들을 허락하신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와 찬양을 돌린다!

2015년 6월 12일 금요일

신자의 환난(롬5:3~4)

로마서5장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성도들의 삶에 대한 내용이다. 우리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에서 시작해서 예수 그리스도로 끝난다.
그러므로 구원의 주체자도 하나님이시요 근거도 하나님이시요 그에 대한 확신도 하나님이시다.

바울은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택하심으로 말미암아 믿음으로 은혜에 들어감을 받음으로 하나님의 영광에 들어감이 얼마나 즐거운지를 선포한다.(롬 5:2)

그러나 이 지상에서는 아직 우리가 육신을 입고 있기에 믿음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고통과 죄로말미암아 받은 저주로 인한 세상의 고통들이 신자를 환난에 빠지게 한다.

바울은 우리가 이제 믿음이 있으므로 환난중에도 즐거워 할 수 있으며 이것은 인내를 낳고 인내는 연단을 낳고, 연단은 소망을 이루게 된다고 말한다.(롬3:4~8)

은혜는 한겨울에 자란다는 사무엘 루터포드의 고백과 같이 신자는 환난뒤에 급격한 믿음의 성장을 보인다. 또한 다가올 영원한 그리스도의 영광과 비교하면 신자의 고난은 한숨같이 짧은 것에 불과하다.

여기서 짚고 넘어갈 것은 환난이 반드시 믿음의 성장만을 이뤄내는 것은 아니다. 환난이 정 반대의 결과도 이뤄내는 경우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신자가 겪는 환난은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다. 그 주체자가 하나님이시며 신자를 단련시키기 위한 그분의 도구로써 사용되기 때문이다. 그러한 환난은 결국 소망을 낳는다.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은 닿지 않은 곳이 없다.
환난또한 그러하다 생각하면 신자의 마음은 참으로 평안하다 생각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현실은 그렇지가 않다.
대다수의 많은 성도들이 은혜라고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서는 은밀히 굳은 신뢰를 보이지 않는다. 그만큼 삶이 각박하고 발전된 문명이 우리의 마음을 약하게 하는 요소로써 작용됨이 분명하다.

바울의 믿음은 바울만이 닿은 경지라고 생각하는 성도들도 사실상 수두룩하다. 물론 하나님께서 교회를 위해 세우는 직분들이 있지만 바울을 통해 말씀하시는 이 부분은 누구나 차등없이 베푸는 하나님의 은혜다.

그리스도의 구원은 택함받은 모든 백성에베 해당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요즘 청년들에게 진실한 위로가 되는지 모르겠다.
나도 마찬가지지만 우린 삶을 쫓기가 바쁘다.
더욱이 그런 상황에서 재난등이 더 겹치면 삶의 불만으로 뻗치기가 쉽다.

환난이 소망으로 자라나기 보단 낙망과 분노로 번진다고 무의식적으로 생각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로마서5장에 드러난 하나님의 말씀을 잘 보라... 환난의 주체자가 누구시며 그 결과로써 쥐어지는 보상이 무엇인지...
신자의 최고 보상은 예수 그리스도 즉, 하나님 자신이시다. 그것이 가장 큰 위안이다.

현실의 고통이 참으로 가혹하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부분이다. 특히나 연속적인 큰 불행의 암초에 걸려 인생이 난파되는 신자들도 주위에 많다.

우리의 알량한 말이 위로로 작용하기도 힘들고 현실적인 도움도 한계가 있다. 이런 아픔과 시련들을 서로 나누고 공유하며 기도로써 간구함이 가장 절실하다.

우리의 하나님은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위대한 분이시다. 고통과 고난을 가장 잘 아시며 우리의 마음의 밑바닥까지도 샅샅히 감찰하신다.
어느것 하나 하나님의 손아귀 밖에 있는 것은 없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작정속에서 이루어 지는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분은 죄의 근원은 아니시며 무한히 선하신 분이시다. 어떠한 역경이 닥치더라도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담대한 믿음이 우리안에 성령님께서 뿌리내리게 해주실것을 믿는다.

<하나님 우리의 고통을 아시고 우리에게 은혜를 주시옵소서, 어떠한 역경과 고난에도 우리가 담대할 수 있음은 시작과 끝이 당신이시기 때문입니다. 당신께서는 우리를 이땅억 창조하시기도 전인 머나먼 과거에 구원하셨으며,
지금도 구원하시는 것을 알며, 그렇기 때문에 미래에도 구원하실 것을 믿나이다.
사도 바울을 통해 알게하신 하나님의 이 무한한 사랑을 나뿐만이 아니라 내 주변의 이웃들을 돌아보며 함께 기도하고 서로의 고통을 주님 안에서 나누고 당신께 영광돌리게 하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