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7월 30일 목요일

진정한 유익

(1) 산책을 자주하다 보면 자연의 풍경이 단일하지 않다는걸 느낀다. 평소에 이런 모습들을 얼마나 자주 놓치는지 모른다.

풍경을 감상할 때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순간을 흩날려 보내고 있는지를 돌아본다. 그 이유는 열심히 사느라 그렇다.
그렇다면 신자는 무엇을 위해서 열심히 사는가?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요 6:26)

어제 수요기도회 때 강단에서 울려 퍼진 말씀이다.

자연의 풍경은 놓칠 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눈앞의 유익에 눈이 멀기 쉬운 존재다. 정작 놓치지 않아야 할 것은 느슨하게 쥐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았다...... 손아귀에 힘이 없다.

(2) 수련회 철인지라 타임라인에 청소년 수련회 진행모습들을 많이 본다. 화려한 스포트라이트와 웅장한 세션들로 가득한 풍경을 봤다. 흡사 클럽을 연상케 했다. 비트에 맞춰 청소년들이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아래위로 으쌰으쌰한다.

이게 아이들에게 이게 무슨 유익일까 생각이 든다. 해당 교회에 출석하시는 집사님들 대부분이 표현하시진 않지만, 곱지 않은 시선을 보내신다.(아무래도 교역자를 존중하셔서 인 것 같다.)
나도 마커스나 YM집회를 참여한다는건 굳이 반대하지 않는다. 다만 개교회 수련회에서 이런 모습은 이제 너무 의아할 뿐이다.

이 가운데 하나님께서 풍성히 사랑하시는 청소년 지체가 없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단 이때만 열심히인 지체가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시험기간이나 기타상황이 닥쳤을 때 아이들은 주일을 뒤로 미룰 것이다.(부모도 거들것이다.) 당장 눈앞의 유익을 쫓을 것이 드러나있다. 음에 홀려 이것을 은혜로 착각함이 이와 같기 때문이다. 지루한 말씀 공부는 제껴두고 드럼비트위에서 은혜(?) 한몫하는 것이 풍성하게 느껴지고 편하다.
그러나 예수님의 이 지적은 피할 수 없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연구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언하는 것이니라"(요 6:39)

세션에서 '영생'을 얻지 않는다. '방언'한다고 구속의 은혜가 적용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시는 '표적'은 바로 자기자신과 그 입술에서 선포하신 말씀이다.
거기에 영생이 있다. 거저 주신 은혜의 수단을 외면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령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시는 존재이시다.

아이들이 말씀을 지루해 하더라도 안듣는 것이 아니며, 혹여 교육자가 전달방식에 고루한 면이 있을 수 있다. 아이들 눈높이에 맞춰서 성경과 교리교육의 방법론을 모색해야 한다.

해당 수련회 집회에 투자된 비용이 차라리 교육에 투자됐으면 어떨까 싶다. 진리에 목말라하는 청소년들이 있을지 모른다.
숫자적 부흥에 집착하는 세상의 '공리주의'적 사고 방식에서 시급히 탈피해야 한다. 시대가 이런데 표적이 아니라 유익을 구함은 이제 그쳐야 할 때지 않은가?


2015년 7월 21일 화요일

시편17편을 읽고 드리는 기도

하나님이여 당신은 의로우시고 흠이 없나니
당신께서 나를 감찰하시면 나의 죄가 낱낱히 드러나나이다.

그러나 주께서는 창세전에 이미 나를 택하시고 구원하사 당신의 아들로써 구속하시고 성령으로 그 구속을 적용시키셨나이다.

그러므로 하나님 당신께서 나를 시험하시고 권고하시며 감찰하는 것은 내 신앙을 연단시키고자 함이며

시편기자와 같이 나의 영혼까지도 발게 벗기시는 것은 단 한말의 죄도 용납치 아니하시고
나를 거듭나게 하시려는 줄을 내가 아나이다.

허나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당신께서 친히 내게 오셨으며 그리스도께서 죗값을 대신치르시고 나를 당신의 것으로 소유하셨나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내가 흠이 없으며
성령님으로 말미암아 내가 내 죄를 아오며, 그리스도께로 연합되게 되나이다.

하나님 당신은 나를 당신의 눈동자 같이 여기시며 교회를 위해 일어나시며 당신의 백성들을 뜻대로 지키시나이다.

주님 나의 연약함을 아시고 나를 돌아봐 주시옵소서. 의롭다 하여주시고 끝까지 우리를 붙드시는 줄을 믿사옵나이다.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내가 죽어서 깰때에 주의 형상을 보는 것 만으로 만족하리이다.

실로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것 되시며 당신 한분만으로 족하나이다. 우리의 인생의 걸음마저 당신의 뜻대로 가나이다.

그날에 우리가 주님을 보고 맞이하게 하소서.......

2015년 7월 20일 월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공부 후기 - 6(part1)

평생 솔로로 지내던 엘리자베스1세는 후사가 없기에 자신의 조카를 왕위계승자로 임명하기로 한다. 그녀는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를 지명하였다. 튜더왕조의 막이 내리고 스튜어트 왕조의 서막이 열리는 역사적인 순간이였다. 그러나 이제부터 열리는 스튜어트 왕가의 초반 역사는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산통을 겪어야 되는 시기였다.

제임스1세(1566 - 1625) 시기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흐름을 알아 둘 필요가 있다. 실상 스코틀랜드는 이미 종교개혁의 성공적으로 이루어져 나라에 제대로 정착이 되어 있었다.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선봉장은 존 낙스(John Knox)였으며, 제네바 망명시 칼빈과 조우하고 그의 제자 베자와 교제하며 제네바 아카데미에서 본격적은 개혁파 신학을 수학하였다. 칼빈의 신학을 전수받은 존 낙스는 자신의 조국 스코틀랜드로 귀환하여 종교개혁의 뿌리를 내리는 작업을 착수했다.

로마 카톨릭적 요소들을 모두 파괴하고 칼빈이 제네바에 시도하고 싶었던 성경적인 장로교회 정치를 스코틀랜드에 정착시켰다. 존 낙스 시기에는 안정화 단계까지는 아니었지만 그것은 곧 그의 제자 앤드류 멜빌에 의해 온전히 실행되게 된다.다만 제임스6세와 스코틀랜드 종교개혁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앙숙(?)적인 대치가 이뤄졌을 뿐이다.

스코틀랜드의 종교개혁은 주일학교 개념과 함께 어린시절 부터 신앙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추진되었다. 자연히 제임스6세도 어린시절 부터 교육을 받게 됐다. 그렇지만 그와 장로교회의 추억(?)은 좋지 않은 일들 투성이었다.

당시 제임스6세의 담당 교사가 엄한 사람인데다가 체벌도 심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과의 투쟁이 오랬동안 지속되었던 터라 아무래도 전투력이 다분한 분위기가 스코틀랜드에 만연했었나 보다.

성경적 전통교리에 입각하여 교육을 하는 과정에 시행착오가 어느정도 있었던 듯 하다.
아이에게 매를 들지 말라던 교육학의 제1원칙이 있지 않던가?(후대에 생긴 개념이긴 하지만)
자연히 제임스6세는 어린시절 부터 엄하디 엄한 장로교에 반감을 가지기 시작했고 태연스럽게 연기하며 장로교를 받아들이는 척 했다. 실상 그는 내심 장로교회에 대한 불만과 신앙에 대한 관심이 크지 않았다. 그는 성인이 되어 군주권을 강화하고 스코틀랜드 교회를 자신의 치하에 두고 싶어하는 마음이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성인이 되어 스코틀랜드 통치권이 손아귀에 쥐어지자 자연히 장로교회와 마찰이 빚기 일수였다. 1582년 앤드류 멜빌과 제임스 6세의 "두 왕국 이론"사건이 대표적인 사건 중 하나다.
국왕으 총회에 지나치게 간섭하자, 세속정치가 교회에 간섭하는 것은 명백한 불의라는 것을 멜빌이 제임스에게 따진 것이다. 당시 멜빌은 국왕의 소매를 낚아채며 "하나님의 어리석은 종이여!"라고 외쳤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전달했다.

"전하, 이 말은 꼭 해야겠습니다. 이 스코틀랜드에는 두 왕과 두 왕이 있습니다.
 하나는 제임스 왕과 국가이며, 다른 하나는 왕 그리스도 예수와 그의 교회입니다.
 제임스 6세는 이 왕국의 신민으로서, 왕도, 귀족도, 머리도 아니며, 단지 한 사람의 구성원 불과합니다."

제임스 6세의 입장에서는 정말 불쾌하기 그지없었을 것이다. 난 왕인데 한낯 일개 목사가 왕의 옷깃을 잡아채며 훈계하는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왕권의 강화만이 오로지 목적이었던 제임스에게는 이 사건은 치욕스러운 사건이었다. 설상가상으로 그는 급진적인 장로교인들에게 두번이나 납치 감금당하며 장로교인이 될 것을 강요를 받기도 했다.

어딜가나 극단적인 사람들은 있기 마련이지만 그들의 행동은 제임스의 마음속에 장로교에 대한 반감을 키우는 꼴 받게 안됐다. 여러모로 장로교회는 제임스6세에가 암같은 존재였을지도모르겠다. 그리고는 그에게 어둠속에 빛(?)같은 희소식이 들려오게 된다.

엘리자베스1세가 자신을 영국의 왕으로 임명한다는 소식이였다. 그가 그것을 마다할리 없었다. 물론 거절할 수도 없는 것이었겠지만 득달같이 계승권을 획득하고, 스코틀랜드 귀족과 교회에게 3년마다 한번씩 올테니 똑바로 하고 있으라는 뉘앙스를 풍겼다. 그러고는 획~ 하고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영국으로 떠나게 된다.

제임스6세의 마음에는 영국에 대한 설렘과 기대가 가득했을 것 같다. 그 지긋지긋한 스코틀랜드를 일단 벗어났으니 말이다.


- part2에서 계속

2015년 7월 17일 금요일

고난속에 주어지는 교훈(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인간의 인생은 불행과 불편함의 연속이다. 우리의 삶속에서 스스로 내린 선택은 파국의 결과를 치닫을 수 밖에 없으며, 설령 그것이 좋은 길로 가더라도 영원하지 못하며, 곧 돌변하여 사람의 마음을 심란케 하고 유혹하며 죄의 길로 빠뜨린다. 결국 죄의 늪에서 허우적 대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들어서는 비참함을 누리는 것이 사람의 인생이다.

허나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는다는 지혜자의 고백이 있듯이 신자던 불신자던 모든 인생은 하나님의 손아귀에 있음이다. 다만 죄의 근원이 되시지 않으며 불의를 선의 결과로 이끌어 내실 수도 있는 전능하신 분이란 것을 간과해선 안된다.

이런 하나님을 묵상하며 현재한 처한 고난속에서 하나님께서 교훈하시는 바가 있음을 잘 살펴보기를 소망한다. 고린도전서 10:13절 앞절인 12절에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는 바울의 권면이 있다.

이어서 13절 이어지게 되는데, 하나님께서는 성도가 교만에 빠지는걸 원치 않으사 교만에 빠질 무렵에 고난을 허락하시는 모습도 보이신다. 때론 그 고난이 감당치 못할 정도로 괴로움에 빠지게 하는 것은 사실이다. 심지어 자신의 태어났음을 저주하게 되는 경지까지 이르기도 한다.(욥 3:11)

그러나 되려 바울은 하나님께서 감당 못할 시험을 허락하지 아니하신다 권면한다.
우리로써는 이해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써는 피할길 까지 내주신다는 아이러니함이 느껴진다.

선택은 우리의 몫이지만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바가 있음을 바라보게 되는 구절이다.
다만 이 선택의 결정을 내리기까지가 쉽지가 않은 험난함이 가득하다. 우리가 고난속에 처했을 때 하나님의 의지를 생각하며 결정을 내리기는 쉽지가 않다.

이것이 현실도피인지 아님 정말 주님의 뜻인지 점검하고 두들겨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신자의 인생이 불행의 연속선상에 있다고 하지만 그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담겨있음을 기억한다면 그런 신중함이 담겨야 할 것 같다. 때론 그 길이 거북하고 힘들더라도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함을 말이다.

때론 시간에 쫓기는 압박감에 눌릴지도 모른다. 시간에 쫓기던 고통이 길던 간에 그속에 담겨있는 하나님의 교훈을 잘 살피면서 길을 나아가야 되겠다. 나의 인생길 험난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뜻을 반드시 이루시기 때문이다.

다만... 고전 10:12절에서 주는 교훈처럼 내 자신의 교만함과 완악함을 낯낯이 확인하게 됐다.

2015년 7월 14일 화요일

지금 내 인생을 보며

누구의 인생은 잘 풀리고
누구의 인생은 안 풀리고

그런것에 좌절할 것 없다. 고개숙일 것 없다.
떳떳해라!

그거 말은 참 쉬웠다......
없는 상황, 답답한 상황에 뭐가 쉽겠으랴......

현실이라 생각하니 씁쓸하다.
최근 내가 잘 가고 있는건가? 계속 생각하게 된다.

지금 상황만 봐서는 난 참 못하는데 말이다......
그냥 내가 나밖에 모르나 보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지금 나는 어떨까?...

인간의 주된 목적...
주된 목적의 상실이 암담한 괴리들에 휩싸이도록 좌절감만 안겨준다.....

그래서 오늘도 어느때처럼 그냥 꼭~ 껴안았다.
이런 상처 한두번 겪는것도 아니고
돌아보면 내 인생...경제적으로 부유하나 가난하나 늘 이런 상황 투성이였다.
그래서 지금은 아무 생각 하기도 싫다......

실컷 성질부렸더니 내 마음의 더럽고 이기적인 부분들만 확인했다.

내가 죄인인 탓, 못난 탓이다.
나의 무기력함을 탓하는 밤이다.

역시나 하소연을 풀어야 할 대상은 하나님 한분 밖에 없다.

2015년 7월 12일 일요일

우연적인 고난이 있을 수 있는가?

"우연적이면서 우연이 아닌
필연적이면서 필연이 아닌
자유로우면서 자유로운
그러나 죄의 원인이 되시지는 않는 하나님..."

신앙의 선배들이 성경을 통해 정리해 놓은 '하나님의 작정'이다. 유한이 무한을 다 담을 수 없다는 피조물의 한계를 고려해 놓은 겸손한 표현이 담겨있다.

이러한 하나님의 섭리가 우리를 향해져 있으며
당신께로 안내하기 위함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 오는 그 기쁨은 정말 크다.

하나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목적이 선행하지만
우리의 입장에서는 수단이 선행인 것 처럼 보여진다.

어려울듯 안어려울듯 하며 이해 안돼는 어려운 이  말...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알겠는가?

우리의 고난과 환난, 괴로움들은...
하나님이 이미 아시는 바다.
그곳에서 건져내는 것도 하나님이시요 내버려두는 것도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내버려 두신다 해도 이유없는 상황들은 없다. 모든것은 목적이 선행하기에 발생하는 수단적인 것들일 뿐이다.
우리 입장에서는 수단이 먼저 발생되 보이는 한계를 입고 있지만 말이다.

즉, 우리의 입장에서 성도들이 현재에 당하는 극한의 고통들은 이해할 수 없을 때가 많다.
다만 지나간 시간을 확인할 때 드러나는 하나님의 뜻을 보며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우가 많지 않던가?

그런데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 이 말이 고통중엔 왜이리 잘 안와닿던지...

엄밀히 말하면 지나간 모든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다고 한다. 하나님의 본성에는 우연한 것들이 없기 때문이다. 구석구석 보이지 않게 미쳐져 있는 하나님 섭리의 손길을 묵상하는 하루가 되기를 소망해 본다......

지식의 최고는 지혜다

사람의 지식이 얼마나 알량하던가?

자신의 이성에 의지하여 얻어낸 그 지식의 풍요가 바람에 휘날리는 겨와 같다는 것을 느끼지 못함이다.

두툼한 서적 1권을 독파하자 '유레카!'하며 달려가는 그 뒷모습이 어찌나 가볍던지...

하물며 진리를 안 순간에 내가 모든 것을 다 알았다 할 수 있겠는가?

"여호와를 아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거늘 미련한 자는 지혜와 훈계를 멸시하느니라"(잠 1:7)

내가 알았다고 해서 끝난것이 아니라
이제 시작이며... 여전히 가르침을 받고 있다는 것을 잃는다.

'머리로만 아는 것 같다.'해서 배움을 그쳐서는 안되고 알았다는 걸로도 끝나서는 안된다.

우리에겐 그것이 나 아닌 남을 위한 '삶'이 되어야 할 의무도 따른다...

그러나 우리는 고등교육 과정을 마친 후에는 다 알았다는 태도를 취한다.
입술로써 지식을 전달함이 더 급급해 보인다.
다만 그런 지식의 허리에는 묵직한 힘이 없다...

지혜자는 지식보다 지혜를 얻으라고 한다.(잠4:5)

진정한 지혜는 '우리가 알지 못했던 것을 부끄러워 한다'는 것을 넘어서 우리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하고 겸손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지혜의 근간... 지혜의 원천이 하나님께로 부터 나옴을 아는 훈련...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하심을 알고 맡기는 훈련...

오늘날 우리는 그것이 부족한지도 모르겠다.
성경의 한 이오타를 머릿속에 제대로 축적했다고 해서 자부심을 느끼는건 위험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말씀에 순종으로 이어지는 것은 내가 아무것도 아니요 하나님이 모든 것이라는 것을 고백하는 기쁨이 있다... 그리고 이 순종은 나 뿐만이 아니라 이웃이 더 기뻐하는 선한 따스함이 묻어 나온다.

그러므로 어떤 학문 분야던지 접근하여 활용하기 전에 참된 지혜가 밑바탕에 깔려 있어야 한다.

2015년 7월 11일 토요일

사랑하는 법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 상처를 더 잘 주는 법이다.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요구하시는 귀중한 의무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다.


정작 하나님은 사랑한다 하면서도 그 방향이 이웃을 향해 전해지지 않는 나의 모습을 보게 된다. 특히나 가장 가깝고 사랑하는 사람에게 간간히 비춰지는 나의 죄성은 상처를 가하기 마련이다. 오늘도 그런 실수를 범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하나님을 사랑한다 하면서도 왜 마음가운데 이런 못남이 있는가?...


성화의 과정을 운운하면서도 좀 처럼 쉽게 변하질 않는 나의 마음을 보며 더욱 더 하나님께 의지하게 된다.


내가 진실로 그리스도의 거룩하심을 본받기를 바란다. 그리스도를 본받음은 예수께서 내안에 내가 예수안에 있는 정말 구분되지 않을 정도의 긴말한 연합을 뜻한다.


그리스도께서 사랑 하시는 대상 또한 연합을 이루기는 마찬가지다. 나 뿐만이 아니라 그 대상도 그리스도께서 연합을 이뤄내시는  성도인 것이다.


같은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성장하는 만큼... 그 상대를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는 것처럼 사랑하고 싶다. 사랑의 근원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하심을 본받고 배우며 적용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소망한다......




실로 나의 몸도 마음도 영혼도 살아계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것이다....
나는 아무것도 하는게 없음이요.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사랑하시고자 하는 곳에서 사랑이 시작되며 사랑하게 되는 것이다.

2015년 7월 9일 목요일

아만두스 폴라누스

Amandus Polanus von Polansdorf (16 December 1561 – 17 July 1610)

스위스 개혁파 신학자. 본래는 루터파였으나 칼빈의 신학을 접하고는 개혁파로 전향했다고 한다. 어떤 이유에서였는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탁월한 신학자로 소개되 있다...;
그저 토마스 굿윈의 저서를 읽다가 폴라누스의 견해를인용한 것을 발견해서 관심을 가져봤다.
사실 밑에 부연 설명이 각주에 달려있어서 슬쩍 본 것 뿐이지만......

구글에다 검색해 봤더니 소개와 약력이 디테일 하지 않아서 너무 아쉽다.

p.s
이분 이름은 이쁜데 얼굴이 강력하게 학구적(?)으로 느껴진다.
칼빈 좀 닮은 것 같기도 하고... 수염때문에 그런가? 아님 외국인 거기서 거기지 효과 때문인가?...

신앙과 전쟁

가장 가까운 사람과 신앙이 불일치 된다는 것은 고통스러운 일이다. 먼 타인을 대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모방송국에서 '사랑과 전쟁'이란 심야프로가 방영했었다. 부부간의 갈등을 다룬 내용이었는데 참 다양한 상황과 환경들이 두 남녀의 사이를 갈랐다. 하지만 깊이 들여다 보면 결국 둘사이에 문제되는건 상황이 아니라 '서로의 관계'에서 비롯되는 문제들이였다.

그렇게 보니 되려 상황과 환경은 그저 마음의 불씨에 바람을 지피는 꼴로 비춰 보였음이다.

사랑해서 결혼 했지만 끝은 전쟁으로 맺어졌다.
인간의 죄성으로 인한 결과렸다...
물론 잘 사는 부부들도 있지만 어찌 갈등의 문제가 없을 수 있으랴...
극복하는 노하우들이 인생에서 하나둘씩 생기는 것이거늘... 다만 그 효과는 항상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상으로 파국의 갈등을 빚는게 신앙 불일치 문제다. 정말 하루하루가 전쟁이다.
삶과 가치관이 전혀 다르다.

고백하는 내용과 해석하는 바가 다르니 탄식이 절로나오고 언성이 높아진다. 또한 부부 신앙의 불일치는 자식과의 전쟁으로도 이어진다...

주위에서 잘 들어주고 넘기라 하시지만 말은 참 쉽다. 딱 잘라 결론을 내려서 사는방식과 가치관이 무서울 정도로 다르다.
어렸을때부터 그 피해가 누적되어 있는데 한번에 해결될 수 있겠는가?... 더군다나 온전한 신앙을 갖게 된 이후 물밀듯이 몰려오는 갈등의 쓰나미는 침묵중에서도 차고 넘친다.

하나님의 존재 자체가 성도의 행복이라고 하는 사람과 하나님이 부족한걸 채워주시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의 세계는 전~혀 다르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천국의 개념도 달라지더라...
하나님께서 영원히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에 행복하다는 것과 거긴 하나님께서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시니 행복하다는 것은 다른 개념이지 않던가?...

구원받았으니 끝이다. 교회 나갈 필요없다는 사람과 지상교회를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로 여기며, 예배와 성도간의 교제에 참여해 주일성수를 지키는 사람이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도 전~혀 다르다.

불꽃튀는 설전이 오고가다 보니 나 또한 진리를 왜곡하는 면도 있었고 감정소모만 가득하다.
순간 아 내가 죄인이구나를 다시 확인하니 마음이 가라 앉아 이후에 차분히 대화를 나누긴 했다.
내가 굳이 열을 올려 일일이 변증하지 않아도 그분은 침묵하심만으로도 차고 넘치게  진리를 드러내실 수 있는 분이라는 것을 망각했음이 어찌나 어리석던지......
입술을 떼시면 천지를 흔드시는 하나님이신데...

진리의 대변자는 그리스도 당신이신데 마치 내가 진리의 대변자인 마냥 월권을 행사한 느낌이다.

가뜩이나 일반가정도 속이 시끄러운데 신앙이 다른 가정이다 보니 힘들다..... 그래도 이런 고난가운데 하나님의 보이지 않는 놀라운 손길이 있음이며, 귀한교훈들을 안겨주심에 감사하다.

"여호와여 나의 말에 귀를 기울이사 나의 심정을 헤아려 주소서"(시 5:1) 외친 시편기자의 기도와 그 심정이 와닿음이다.

아직 결혼하지 않은 형제 자매님들에게 당부드리고 싶은건...
중심에 그리스도께서 계신것도 중요하지만
인격적으로 대화수용여지를 갖춘 짝들을 만나시라...

그리고 왠만하면 같은 교회식구를 만나주시면 좋겠다. 굳이 주변에 없다면 억지로해서 외부의 불신자나 이상한 신앙을 가진 사람 만나려 하시지 마시라...

2015년 7월 8일 수요일

성도의 진실한 고백

한 사람이 그리스도께 인도받아 나아오게 된 것 만큼 귀한일은 없다.
더욱이 그 사람이 자신의 입술로 예수님을 만나게 된 것을 진실로 고백함은 정금보다 더 귀한 가치가 있다. 오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은혜의 배설을 통해 믿음에 이른 한 자매의 귀한 고백을 들었다. 낮에 도서관 뒷산에서 만난 잘못된 목사와의 고백과 필히 대조 됨을 느꼈다.


체험과 진심이 담긴 자매의 고백은 오묘한 감동을 전달했다. 자매가 전달하는 삶의 이야기 하나하나 속에 하나님의 은혜가 묻어나온다. 교제하는 자매와 그 귀한 간증을 경청하면서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확인했다.


특히나 자매의 고백에서 인상 깊었던 것은 회심 이후의 삶에 더 고난이 가득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삶은 자신이 원하는 것, 이루고 싶은 것들을 다 이루는 승승장구한 삶을 살았지만 이후에 그 모든것들이 무너졌다고 했다. 삶의 전반적인 가치관에 전환이 일어난 것이다.


그리스도께 삶의 중심을 두려 할수록 불합리하고 복잡한 상황들이 파도처럼 밀려옴을 자매는 경험했다. 처음에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자신의 신앙을 하나님께서 연단하고 계셨음을 서서히 느껴졌다고 자매는 고백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의 책 제목처럼 자매의 하나님은 '고난을 주시는 하나님'이셨다. 그러나 그 고난은 결코 자매에게 실이 되는 것이 아니였다. 지금의 자매가 경건을 추구하는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성장하고 있음은 주께서 허락하신 그 '고난' 덕분이었으리라....


그런 상황속에서도 자신의 청년부 지체들을 걱정하며, 그들을 위해서 기도하고 도울 수 있는 여력을 주시는 것도 하나님께서 연단하신 결과라 생각된다.

낮에 만난 잘못된 목사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만남으로 아무 근심걱정 없고 마음이 편하다고 고백했다. 그리스도께서 다 이루실텐데 무슨 걱정이냐는 태도였다. 얼핏 들으면 틀린말 같지 않지만 그의 고백 배후에는 함정이 깔려 있었다. 시대 속에서 성도가 겪는 고난과 아픔을 공감함과 자신이 체험함이 결여됐다. 그리고 그는 이상하리 만큼 자신이 천국에 갈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성령님께서 신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확신은 있지만 그것이 단 한번에 확신이 들만큼 강렬하게 주어지지는 않는다. 잘못된 목사의 신앙고백속에는 '성화'를 찾아볼 수 없었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해서 오는 뼈를 깎는 고통과 내적갈등들....
말씀에 순종하지 못함으로 해서 오는 일련의 회의감
택자들을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전적인 은혜는 알겠으나 나는 과연 구원받은 자인가 의심하고 점검하는 깊은 고민등...


결정적으로 그는 그리스도에 참된 복음을 깨달은 뒤로 마음에 불편함이 없다고 말했다.
전혀 자기 자신에게 깊이 절망해 봤음을 느껴볼 수 없었다. 전적주권을 얘기하기는 하는데 와닿지 않았다.


반면 자매의 고백은 깊이가 있고 무게가 무거웠다. 그녀가 예수님을 만났을 때의 첫 심정은 기쁨과 교차되는 일련의 깊은 좌절감을 맛봤다고 고백했다. 그러면서 자신의 힘으로는 절대로 구원받을 수 없음과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수 없음을 확인했다고 한다.


신자들 인생에 고통이 없을 수 없다. 예수를 믿었다고 해서 이 지상의 고난이 당장 멈춘것이 아니다. 예수님께서 재림하시기 전까지 우리는 계속해서 믿음의 시험을 받아 철저히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간다. 때로는 그 고통이 너무 큰 나머지 시편기자처럼 다음과 같이 기도하게 되는 경우도 있다.


"여호와여 어느 때까지니이까 나를 영영히 잊으시나이까 주의 얼굴을 나에게서 언제까지 숨기시겠나이까?"(시 13:1)


이 고백이 하나님의 언약의 진실성에 대한 확신이 그의 마음속에서 사라졌다거나,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지 않고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그러나 벌어지는 상황에서 오는 고난이 긴박할 때 그것이 연약한 마음속을 파고들어 하나님이 나를 잊으셨다는 생각을 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어둠속에 처했을 때 하나님께서는 더욱 밝히 빛을 비춰주신다. 그 어둠속을 언제까지 헤메게 하실지는 모르지만 신자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거룩한 빛으로 인도하신다. 선하신 하나님을 온전히 의지하도록 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시험(Test)인 것이다.
그러므로 "결전장의 한 가운데서라도 우리를 절망시키는 재난은 정복될 것이 틀림없다는 사실을 믿음으로 확신할 정도로 시험과 씨름해야 할 것이다."(칼빈주석 시편Ⅰ349p 인용)
결국 자매의 신앙고백은 말씀을 붙들고 삶에서 씨름함 속에서 짜여져  배설해낸 복음의 증거였다.


그 시간만큼은 이 자매가 우리에게 자신의 고백을 통하여 예수님의 가르침을 전달한 교사의 역할을 감당 했었음이 분명했다! 귀하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2015년 7월 6일 월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공부 후기 - 5

메리가 병들어 죽은 후 그녀의 이복동생 엘리자베스 튜더(1533 - 1603)가 재위에 오른다.(가족관계가 막장인지라 이복들이 재위에 앉는다.)메리 생전에 탑에 갖히는 수모까지 겪던 그녀가 인생은 역전을 맞이한 것이다.
당시 영국의 상황은 대륙 열강들의 위협과 급격한 인플레이션, 종교갈등으로 최악으로 치닺고 있었다. 엘리자베스 1세는 뛰어난 지도력과 정치력으로 당시 영국의 위상을 끌어올린 업적을 남긴 여왕이다.

메리로 인해 바닥을 친 종교개혁도 상당히 회복됐다. 엘리자베스는 아버지 헨리8세의 신앙을 따랐기 때문이었다.  성공회 예전이 부활했고 교회는 '공동 기도서'를 다시금 사용하게 됐다. 지위를 박탈당했던 성직자들도 모두 복직되었다. 그러나 군주는 교회의 최고 수장이라기보다는 최고의 통치자라는 주장이제기되었다. 아마도 헨리8세 부터 메리의 치하까지를 겪으면서 종교가 왕권을 신장시키는데 방해요소라고 판단한 것 같다.

개신교의 회복과 함께 당시 메리의 박해를 피해 망명갔던 자들이 조국으로 속속히 귀환했다. 불행하게도 그 유명한 낙스(Johin Knox)는 귀국하지 못하여 프랑크프루트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제네바로 가서 칼빈 및 베자와 교류하였다. 여기서 낙스는 『괴물 같은 여성 통치자에 대한 첫 번째 나팔』을 저술하였는데, 잉글랜드의 '메리'를 비판한 작품이었다. 또한 그 이면에 스코틀랜드 여왕인 기즈의 메리(메리 스튜어트)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도 담겨있었다. 불같은 기질을 가졌던 그는 하나님의 법을 위반하는 통치자에 대한 저항권을 주장하였다.

이는 여왕의 분노를 샀다. 영국 왕실의 존엄을 폄하하는 내용으로 비춰졌기 때문이었다. 메리가 그녀를 핍박하긴 했어도 엄연히 잉글랜드의 여왕이었다. 여기에 더하여서 언성이 거칠었던 낙스는 여성을 비하하는 말도 서슴치 않고 휘갈겨 서술한듯 하다.
낙스는 전투적 아우라가 충만한 남자중의 상남자였나 보다.(영화 브레이브 하트가 스친다-_-;;....아 스코틀랜드여.....)

"하늘에는 사랑이 변해 생긴 증오처럼 맹렬한 것은 없으며
경멸 당한 여성의 분노처럼 격렬한 것은 없다."
        
                 -  윌리엄 콘그레브(1670 - 1729)

칼빈은 낙스의 여성에 대한 성급한 기질을 두고 불편을 느껴 지적했다.(역시 온화한 칼빈 선배...) 이런 조치에도 불구하고 엘리자베스는 제네바 망명자들과 관계가 좋지 못하였다. 이들 중 소수만이 고위직의 관료로써 올랐을 뿐이다. 더이상 종교개혁의 발전여지가 있을리 없었다.

1559년 "왕위계승법"은 에드워드 6세의 "1522년 공동 기도서"를 잉글랜드 국교회에 정착했지만 문제가 됐다. 결국 수장령이 교회에 대한 왕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을 받아들이게 되고, "통일령"이 선포됨으로 엘리자베스가 하나님의 영광과 참된 종교에 필요한 교회 의식과 예식을 관여할 수 있는 권리를 승인 받았다.
이때 망명자들 대부분이 교회의 감독직을 회복한다. 그들은 제네바 출신 망명자들과 교류는 했지만 신앙적으로 타협을 하지는 않는 존재들이였다.

엘리자베스는 개신교도였음에도 불구하고 왕의 권위를 침해하지 않는 한 중세교회의 구조에 머물러 있으려 했다. 아무래도 왕권신장을 중요시했기 때문인것 같다. 굳이 종교로 골치아픈 일을 만들기 싫은 의도도 있는 듯 하다.
(오늘날 성공회가 로마 카톨릭 예전 형태의 부분적인 모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이때문인듯 싶다.) 시편가, 제네바 성경 인쇄 및 보급, 망명자들이 망명지에서 사용하였던 예배 모범과 기도문, 고백서가 설교단에서만 사용할 수 있었다.

제네바 망명자들의 아우성이 심했는지, 여왕은 국교회만의 독특한 예전형태를 고수하기 위해 공동기도서를 사용하지 않는 사람들에게 심각한 벌칙이 부과되도록 규정하였다. 실제로 시행되지는 않아 규정을 꺼려하는 사람들에게 어느정도 자유가 허용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국교회 예전형태 고수 정책이 강화되자 공예배가 아닌 곳에서 개별적인 설교가 행해지면서, 초기 장로교 운동이 1570-80년대에 일어났다. 운동의 우두머리는 토마스 카트라이트였다. 이 개혁가들은 체제에 대한 불복종으로 간주되어 투옥되었고 수장 카트라이트는 망명을 가게 되었다.

이것은 정치적으로도 굉장히 민감한 문제였는데, 교회와 국가의 통일과 결속을 위험하게 하는 일로 보였기 때문이다. 국교회의 입장에서는 교회 내의 또 다른 대안적인 교회가 나타나는 것이 자신들의 존속을 위협하는 것으로 보았다. 장로교는 그들에게 있어 견제 세력이었던 것이다. 해당일로 영국 성직자의 1/3 정도가 정직되었고, 해당 교회의 회중들도 설교와 수찬정지를 당했다.

1592년에 국교회가 장로교를 탄압했지만 장로교는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고 지하교회를 세워 교세를 연명해 나갔다. 사라진 줄 알았던 장로교가 고개를 빼꼼히 내놓는건 1640년대 초에서야 가능하게 된다.

엘리자베스 1세 시기의 종교개혁은 4부에서 미리 언급했듯이 에드워드6세 수준의 개혁만큼 이뤄졌다. 여왕은 철저히 르네상스인*이었기 때문에 더이상의 개혁은 이뤄지지 않았다. 다만 유럽국가 중 꼴찌를 내달리던 영국의 국력은 상당히 향상됐다. 많은 역사가들이 대변하듯이 이당시 여왕이 이뤄낸 업적은 왕권의 강화와 경제의 안정이었다. 영국의 국가적 위상의 확립에 쐐기를 밖은 것은 당시 최강국인 스페인과의 대결에서 승리를 거머쥔 것이였다. 펠리페 2세가 자랑하는 스페인 무적함대(이하 아르마다)가 바다의 용이라 불리우는 대해적 프랜시스 드레이크에게 무참히 침몰 당해버린 것 이다. 또한 드레이크의 탁월한 항해술과 무역술로 대규모 자산을 확보한 영국왕실은 흑자를 이뤘고 경제 안정기에 돌입하게 됐다. 모직물 공업을 육성하여 양들을 키우는 목초지를 확보하는 운동인 통칭 '인클로저'를 벌이도록 하지만 후에 농지를 잃은 농노들이 치안을 위협하게 되는 원인이 됐다. 또한 튜더 구빈법이라는 사회복지정책을 내세워 민심을 안정시킨다.

엘리자베스는 "짐은 국가와 결혼했다"는 말을 선포하고 평생을 솔로로 살았다.
그 결과 후세가 없는 관계로 그녀는 친척인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에게 왕위를 물려주게 된다. 이로써 튜더왕조는 종말하고 스튜어드 왕조가 시작되는 것 이였다.
스코틀랜드는 장로교가 국교였기에 숨죽이며 살던 영국 장로교는 모종의 희망을 갖는다. 그곳에서 나고 자란 왕이라면 그들과 같은 신앙을 가졌을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임스6세는 그들의 예상과는 전혀 다른 왕이었다......

- 6부에 계속

(*황희상 작가님의 느낌적인 느낌의 강의를 뼈대로 살을 많이 붙여보았습니다.
  작가님이 마지막에 선물로 주신 참고문헌 목록에 있는 로버트 레담의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를 참조하여 작성했습니다.)

*당대를 같이 살았던 문학가와 인문학자로는 윌리엄 셰익스피어(1564 - 1616)와 프랜시스 베이컨(1561 - 1626)이 있다. 영국 르네상스 시대를 초래한 대표적인 인물들이다.

2015년 7월 4일 토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공부 후기 - 4

에드워드 6세의 사후 그의 이복누이였던 메리 튜더(1516 - 1558)가 영국의 왕좌에 오른다. 그녀는 헨리8세의 이혼당했던 본처 캐서린의 딸이다. 메리의 치위기간 동안 성장세를 보이던 영국 종교개혁이 다시 바닥을 치게 됐다. 당시 개신교도들의 상황에 짙은 먹구름이 가득했던 시기로 기록되어 있다. 그 이유는 메리가 골수까지 카톨릭 신자임에 있었지만 개인적, 정치적 원한도 서려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헨리8세의 치위기간에 어머니 캐서린이 버려지는 걸 본 메리는 아버지의 비상식적인 행동을 이해할 수 없었다. 신앙까지 개종해가며 본처를 버린 행위는 메리에게 씻을 수 없는 트라우마로 작용한 것 같다.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던 메리는 아버지의 행위는 경건하지 못한 처사로 비춰졌을지도 모르겠다. 아버지의 결혼에 극구 반대했던 메리는 헨리8세의 분노를 사 정치적으로 내쳐지게 되었고 공주(Princess of Wales) 작위를 박탈 당한다. 아버지와의 사이가 틀어지면서 혼삿길도 모두 막히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앤 불린이 심히 견제하는 바람에 그녀의 딸 엘리자베스의 시녀로 섬기게 되는 수모를 겪는다. 엘리자베스의 침대 가에서서 조용히 이를 악물고 있는 메리를 상상해 보라.....

에드워드 6세가 병사로 죽자마자 왕위계승권을 선점하고 있던 메리는 그간의 고통들을 기억하면서 왕위에 앉았을지 모르겠다. 그녀는 왕좌에 오르자마자 로마 카톨릭적 개혁을 실행시킨다. 그간 차분히 진행되어져 왔던 종교개혁이 수포로 돌아가게 생긴 것이다. 당시 개신교를 지지한 귀족들과 국민들은 적잖이 당황하였고 메리의 의도를 지지하지 않는 분위기였다. 교회재산을 몰수하려 한 것도 실패하자 그녀는 다음과 같은 강압 정책을 선택한다.

1. 개신교 세력의 약화를 도모하기 위해 수장격이었던 토마스 크랜머, 휴 레티머, 니콜라스 리들리를 화형시켰다. 토마스 크랜머는 극심한 육체적, 심리적 고문을 견디지 못해 지금의 믿음을 포기하고 로마 카톨릭으로 돌아가겠다는 문서에 서명을 했지만 이후 다시 정정하여, 화형으로 확정되어 순교하였다.

2. 개신교로 개종되면서 결혼하게 됐던 성직자들을 강제로 이혼시켰다. 개신교가 되면서 성직자들이 저마다 결혼을 하게됐지만, 로마 카톨릭 교리상 성직자의 결혼은 금기시 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또한 1300명에 달하는 성직자의 직위를 박탈시켰다.

3. 카톨릭 교리에 반(反)하는 종교개혁 서적들의 유입을 금기시 시키고 유입되 있는 서적들은 찾아내는 즉시 모두 소각시켰다. 그리고 소장하고 있는자는 엄벌에 처했다. 영국내에 들어와있던 개혁파 신학자들도 이시기에 모두 대륙으로 돌아가고 자국 개신교도들도 제네바등으로 박해를 피해 떠난다.

4. 개신교도 300명을 처형하면서 '블러디 메리'란 타이틀을 확보했다. 역사적으로 여러 이견들이 있지만 300명 이상의 피해자가 속출했을 것은 맞는것 같다. 당시 타워힐에 시체 타는 연기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여담이지만 개신교인 국민들이 이당시 개이름을 메리로 지어 학대하는 일이 있었다는 기록도 있다.
자신의 애완견을 '메리'란 이름을 짓는건 피하도록 하자....

5. 토마스 크랜머가 작성하였던 성공회 기도서를 폐지시켰다.

메리의 박해가 점점 극심해져 갔던 것은 국교회의 수장이었던 '토마스 크랜머'의 숨통을 끊은 것이 원인이었다. 왜냐하면 그녀는 우두머리를 본보기로 잔인하게 처형하면 공포로 인해 입을 닫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개신교도들의 활동에 윤활유를 퍼부운 겪이었기 때문이다. 아마 그녀로써는 적잖이 당황했을 것이다. 그 결과 개신교의 교세가 확장될 것을 우려해 철저히 짓밟았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오히려 잡초근성보다 더 질긴 개신교도들의 신앙에 불을 지폈고 밟힐 수록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이 옳다는 것을 숨죽인체로 입증해 나가고 있었다. 종교개혁이 회복된건 메라 사후 엘리자베스1세가 즉위하면서이다. 다만 에드워드6세 시기때 보여졌던 개혁 수준정도로만 머물렀다......

(*작가님과 함께 느낌적인 느낌의 스터디 내용에 살과 개인적인 견해를 좀 더 추가해서 붙였습니다. 느낌적인 느낌에 단백한 양념을 좀 더 첨가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 토마스 크랜머 관련 여행 에피소드도 첨부합니다 -  https://www.facebook.com/robin.h.bae/posts/775547259190838?pnref=story
Tower Hill의 추억.

2015년 7월 3일 금요일

교육자의 태도

하늘에 구름이 참 많다... 나루토란 만화에서 시키마루란 캐릭터가 있다. 재능은 하늘을 찌르나 의욕이 없어 의외로 겸손(?)한 캐릭터인데, 평상에 드리누워 구름을 보고 뱉는 대사가 있다. "구름은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떠돌기만 하니까." 설정상 IQ 200이 넘는 초일류 두뇌인지라 생각을 안하려해도 생각이 많은 그런 캐릭터이다. 다만 부모와 스승을 잘 만났기에 천재라는 기대의 압박없이 그는 훌륭히 성장한다.

일본의 학습문화 환경은 잘 모르겠지만 이 캐릭터의 성장과정은 오늘날 한국의 학부모들을 꼬집는 것 같다. 정작 가르쳐야 할 것은 안가르치고 기대치 이상의 결과들을 요구하는 부분 말이다. 특히나 자식이 재능이 넘치면 넘칠수록 기대에 비례한 압박이 큰 현실이다.

만화에서 시키마루는 천재이지만 아버지는 그에게 인생을 가르친다.(예를들면 아내한테 잘 하는 법이라던지) 스승은 재능을 진작부터 알아보지만 의욕없는 성향임을 감안해 스스로 과제를 풀어나가도록 놀이형태로 접근한다.(주로 장기를 자주뒀다.) 결국 시키마루의 재능이 가장 잘 발현할 수 있는 방향으로 길을 인도해냈다. 시키마루는 표현은 안하지만 가슴속에서 자신의 스승을 늘 동경했고 그 길을 따라갔다.

좋은 부모, 좋은 스승이 되기는 참 힘든것 같다.물론 나는 그저그런 청년일 뿐이지만 언젠가는 부모가 되고 언젠가는 교회의 (진짜)교사가 될 것이다.

최고의 스승은 진리이신 그리스도임에도 불구하고 배운것을 좀처럼 적용하기 힘든 현실이 난관이다. 소통의 부재로 중구난방식인 대부분의 교회교육 과정은 아이들이 청년이 됐을 때 제 힘을 못내게 만들었다.(그럼에도 일부 신실한 청년들을 이끌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참으로 놀랍다!)그렇게 보면 차라리 문제있는 한국부모들이 교회보다 나아 보인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는 없음으로 끊임없이 고민하고 쥐어짜며 교리교육의 시스템을 정착시켜야 한다는 정설 대표님의 '가.교.현'(가슴 뛰는 교리교육 현장 보고서) 책 Intro가 참 인상적이다. 

현실의 공교육과 교회교육의 갭이 크다. 우리는 1주일의 대부분을 공교육과 보낸 반면, 교회에서의 교육은 단 하루 받는다.

이런 풍토에서 자라다보니 뒤늦게 깨닫고 배워도 부딪히는 문제들이 있다. 고정관념과 현실장벽의 싸움속에서 말이다... 개인이 스스로 말씀과 교리를 공부하는 능력도 양성되지 못한 현실도 드러나고 있다. 바쁜현실속에서 그런 시간을 내기가 버거운 것이다.

그러나 알았다면 늦은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알게된것도 은혜고 과정도 은혜다. 다만 지금 이자리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우린 시작하고 기다려주며 나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최고의 스승이신 그리스도께서는 제자들을 가르치시면서도 때론 기다리시기도 하셨다. 하나님께서 정해놓으신 시기가 있는것이다.

그 기다림의 밑바탕에 깔린것은 '사랑'이다. 사랑으로 인내하고 기다리는 것은 교육자의 기본중의 기본이라 생각한다. 

만화지만 시키마루의 의욕없음을 이해하고 기다려주던 부모와 스승같이 말이다. 그리스도의 사랑과 기다리심에 비하면 비할바도 못되지만 이런 만화속에도 교훈은 숨어있었다...

지혜자는 사람의 걸음은 여호와로 말미암는다고 했다. 이끄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교육자는 이것을 잊어서는 안 돼겠다.

2015년 7월 2일 목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공부 후기 - 3

헨리8세가 병사한 이후 그의 아들인 에드워드6세가 9세의 나이에 왕위에 오른다.
역사가 증명하듯이 어린나이에 왕위에 앉는다는 것은 왕권이 약해졌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과 다름 없었다.

'수장령'을 공표하며 왕권의 강인함을 표호했던 헨리8세와는 달리 어린 에드워드6세의 통치는 섭정들의 간섭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영국역사가들은 에드워드6세부터 메리1세까지의 10년 통치기를 가장 황폐한 취급을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런것만은 아니라 생각한다. 왜냐하면 종교개혁사적으로 어느정도 수훈이 있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에드워드 6세 또한 개신교도였기에 비교적 간섭받는 일 없이 개혁 진행이 수월했다.

당시 에드워드6세를 보좌했던 서머셋 공작(에드워드 세이무어, 1500 -1552)은 철저한 칼빈주의 신자였다. 토마스 크랜머 주교와 합이 맞던 터라 그들은  종교개혁을 단행할 수 있었다. 헨리8세로 인해 로마 카톨릭에서 벗어났지만 왕권에 좀 처럼 활개를 칠 수 없었던 영국의 종교개혁은, 이제 서머셋 공작과 노섬벌랜드 공작 존 더들리(1504?-1553)의 정치적 원조와 함께 과감(?)하게 진행됐다.

그 결과 칼빈의 스승격이기도 한 대륙의 종교개혁자 마르틴 부써를 케임브리지로,
이탈리아 종교개혁자 피에트로 베르밀리는 옥스퍼드로 와서 개혁을 돕도록 했다.
이들은 영국의 종교개혁을 혼쾌히 반기며 찾아왔을 것으로 추정된다. 두 거장의 지원사격으로 옥스퍼드와 케임브리지의 신학자들과 설교자들이 칼빈신학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또한 헨리8세 때부터 성경의 영문번역과 교구보급에 신경을 써오던 토마스 크랜머는 본격적으로 성공회의 신앙고백서격이라 할 수 있는 42개 신조(39개 신조의 기초)를 작성하였다.1549년과 1552년의 그의 기도서는 교회 예식서로, 표현 양식에서도 최고의 형식이었다고 한다. 토마스 크랜머는 국교회가 대륙의 개혁파 교회와 같은 모습을 지니기를 원했다. 이에 힘을 보태기 위해 추밀원은 폴란드 출신 개혁자 존 아 라스코를 잉글랜드의 외국인 교회 감독으로 임명하여, 이 교회가 개혁파 교회의 모델이 되게 하였다.

이 시기를 표현하자면 드디어 종교개혁을 진행하기 위한 발판들을 마련하는 시기라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것은 꽤나 진전적이었다. 바닥이었던 영국의 영성을 그나마 끌어 올린 것 이나 마찬가지였다. 마치 자갈밭을 옥토로 갈아 엎는 과정처럼 말이다.
순조롭게 옥토로 갈아 엎고 있을 때쯤 병약했던 에드워드가 급작스런 죽음을 맞이한다. 이후 영국의 종교개혁 상황에 짙은 먹구름이 덮히기 시작했다. 그때는 종교개혁의 경건한 씨앗이 뿌리를 단단히 내리려고 할 찰나였다......

- 4부에 계속

선배의 패기

이 터프한 언사...
이것이 20대 칼빈의 패기란 말인가?
그러면서도 침착하게 진리가 아님을 열거해 나가는 견고한 문체... 비록 번역투지만 힘주어 깃펜을 휘갈겼던 젊은 칼빈의 심정이 와닿았다!

오늘날 저런식으로 SNS에 올린다면 댓글에 비난이 폭주 할 것이다. 시대와 문화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진리를 수호하기 위해 사력을 쏟아붓는 태도를 본받아야겠다.

이와함께 루터가 토마스 모어의 심장에 쐐기를 밖았던 답신의 내용도 생각난다.

"돼지, 말미잘, 멍청이..."

전투력은 아무래도 루터가 더 뛰어남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겠다. 근데 아무래도 그건 좀 심했다는 생각이다. 그에비하면 칼빈은 매우 점잖은 편이다.
특리 사돌레토 경에게 보내는 편지를 보면 알 수 있는데, 그를 존중함이 글 곳곳에 스며들어 있다. 다만 진리에 타협을 가하지 않은 채 말이다.

일부 거친 언사를 사용한 부분들 때문에 칼빈이 매서운 사람으로 오해받는다. 허나 그것은 강할 필요성이 있을때에만 그랬고, 그는 사랑이 넘치면서도 온화함과 소심함이 버무러진 목회자였다.

거친 글투는 당대 로마 카톨릭의 성경훼손과 왜곡 그리고 부정부패들이 상당히 심했기에 그런것으로 여겨진다. 사제제도의 부패는 곧 교회와 성도들의 영적피폐로 이어졌기에 칼빈은 참을 수가 없었던 것 같기도 하다.

2015년 7월 1일 수요일

'통섭적인 사고'란 글을 읽고...

통섭적인 사고의 필요성을 언급하는 글이다. 통섭적 사고의 근간은 결국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며, 세상 모든 학문이 갈피를 잃고 이탈하는 원인은 진리의 부재에 있다.

인간의 타락은 지.정.의가 제기능을 못하게 되는것에 봉착했고 이는 모든 현상을 올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무지의 상태가 야기됐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간이고 여호와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는 잠언 말씀은 허투가 아니다.

정치, 경제, 사회, 과학등 모든 학문분야에서 정확한 답을 던지지 못하는 것은 무지로 인해 지식이 파편화 됐기 때문이다.

인간은 결코 지식들을 아무리 취합해 보아도 진리에 닿지 못한다. 단 하나의 진리에서 모든 것이 출발하여 다시 원인으로 돌아간다.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시고 스스로를 진리라고 명명하신 분이다. 
모든 지식과 현상에서 드러나는 실질적 진리가 단 하나의 절대진리에 붙들려져 있다. 그러므로 학문을 접근함에 있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결여는 정확한 답을 향해 나아갈 수 없는 상태로 만든다.

스스로 진리이시며 모든 만물을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분을 알지 못함은 자신이 무지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또한 진리는 우리가 스스로 알 수 없기에 수여자 되시는 하나님의 은혜 없이는 불가능 하다.

하나님을 안다는것과 알아가고 있다는 과정중에 있는게 감사하다. 오늘도 경건한 선배의 글을 통해 귀한것을 배운다.

아래의 글을 읽고 느낀점을 정리한 것이다.
-----------------------------------

통섭적인 사고 - 한병수(아신대 조직신학 교수)

1. 진리는 하나이다. 여럿으로 보이는 진리의 모든 조각들은 서로 연결되어 있고 절묘한 조화와 통일성을 이루고 있다. 그 통일성의 중심에 진리 자체시며 스스로를 진리라고 명명하신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다. 진리는 인격이다. 나누어질 수 없고 분리될 수도 없고 진리끼리 서로 대립될 수도 없다. 언어적 명제는 진리의 무늬일 뿐이다. 언어라는 차원에서 벌어지는 모순과 대립은 진리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한계이다.

2. 진리의 이러한 단일성과 통일성과 외관상의 다채로움 때문에 진리의 한 조각만 뒤틀어도 다른 모든 조각들이 어긋난다. 하나의 거짓은 다른 거짓을 낳고 그것은 또 다른 거짓 낳기를 반복한다. 하나의 거짓을 수습하기 위해 20가지의 다른 거짓들을 생산하고 동원해야 한다는 세간의 상식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하나의 성경 텍스트에 잘못된 해석이 가해지면 다른 여러 텍스트의 오석을 수반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3. 진리의 변질은 결국 진리의 본질이고 총화이고 중심이고 진리 자체이신 하나님의 속성을 겨냥한다. 이것은 기독교 교리사의 한 토막만 탐구해도 쉽게 입증된다. 일례로서, 진리의 왜곡이 축적되면 "하나님이 없다"는 우매자의 전철을 히한하게 답습한다. 하나님의 속성과 무관해 보이는 지극히 지엽적인 교리의 오류도 그 저변으로 파고들고 근원으로 소급하면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부재나 결핍이나 왜곡과 마주친다.

4. 오늘날 많은 사회적 종교적 학문적 문제들도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빈곤과 결부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동성결혼, 환경파괴, 유전자 조작, 전쟁, 살인, 도둑질, 간음 등은 문제의 근원을 소급하고 또 소급하면 결국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비롯된 사회적인 문제이다. 각종 종교들도 그러하고 물리학과 사회학과 경제학과 정치학과 윤리학과 심리학과 법학과 수학과 과학의 혼동과 무질서도 그러하다.

5. 호세아는 지식이 없으면 망한다고 기록한다. 여기서 선지자가 의미하는 바는 하나님의 율법에 대한 지식의 부재이다. 율법에 대한 무지로 인한 멸망은 하나님도 모르고 하나님의 뜻도 모르고 하나님의 섭리도 모르기 때문에 망한다는 의미로도 해석된다. 그래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아니 그 지식은 생명이다. 하나님을 아는 바른 지식을 모든 영역에 수혈해야 생명이 회복된다. 우리의 사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