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8월 28일 금요일

총회의 태도에서 배우다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진행중에는 다양한 신학적 견해들이 오고갔다. 이 과정중에 말도 많고 탈도 많았겠지만 이 회의에서 우리가 배울것은 참 많다.

그중 하나는 "한 사람이 사역의 리트머스 시험이 되지 않도록 하자."는 정신이다.

소수자의 의견도 존중하면서 그들이 잘못된 발언을 했을지라도 정정하며 함께 나간 것으로 보이는 대목이다. 반대로 그들의 의견이 신학적으로 정당하다면 확고히 받아들였을 것이란 얘기도 되겠다.

가테이커와 바인즈란 인물이 처한 상황을 통해 그 태도를 볼 수 있다. 그들은 칭의에 대한 입장이 잘못됐기에 총회 참석자 과반수에 의해 해당논의가 부결되고 만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이 총회에서 배제되지는 않았으며, 계속해서 두드러지는 역할을 맡았다.

한 사람이 사역의 리트머스 시험지가 되지 않도록 해달라 요청한 것은 가테이커 자신이였다.
총회는 작은자의 요청을 받아들였고 전체 구성원들에게 적용했다. 개인적으로는 스코틀랜드 총대들의 모범이 한몫한 것도 없지 않아 보이기는 한다.

그러나 오늘날 현실은 왜 핏대를 세우는 사람들이 많은지 모르겠다. 물론 잘못된 견해에 대해서는 정정을 요구하는 것은 맞다. 다만 삼족(?)을 멸하려는 듯이 올바른 견해에 잘못을 어필하는 사람들이 무서울 뿐이다......

2015년 8월 24일 월요일

노인과 바다 그리고 교회와 세상

지인이 추억을 떠올리게 해준 덕분에 '노인과 바다'를 다시 읽게 됐다. 인간생애의 찬란함을 담은 이 작품이 가진 의미를 누구하나 감히 평론해 낼 수 있을까?

노인을 통해서 비춰진 우리네들의 삶은 결코 잔잔한 바다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준다.
설령 주위가 고요하더라도 삶의 사투에서는 언제나 수명을 깎아내리는 고통도 도사리고 있음을 암시한다.

"인간은 파괴될지언정 쓰러지지는 않는다."(시공사 역)

노인은 거대한 생명과의 사투에서 위와 같은 말을 내뱉는다. 그는 어느하나 제대로 된 교육을 받지 않은 시골어부지만 삶의 애환이 담긴 지혜를 터득했다. 톨스토이가 그려낸 노인의 모습은 '어부'라는 직업이 그의 확실한 소명이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결국 대자연과의 사투에서 기력을 잃지만 그의 유지는 소년에게로 이어진다. 타인이 보기에 보잘것 없는 '어부'일지 몰라도 소년은 알았을 것이다. 그는 바다위에 올랐을 때 생명력 넘치는 진짜 '인간'이 됐음을...

생명없는 인간은 죽은 인간이다.
살아있다 할지라도 반송장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오늘날 현대인들이다. 오늘날 교회는 노인처럼 세상이란 바다에 질식해 가고 있는 한 영혼을 낚으러 출항하고 있는가?
인생의 상어들은 지금도 성도들의 살점을 두둑히 한입 베어물어 가고 있다. 어두운 심해로 끌어당겨 피한방울까지 섭취하기를 탐욕한다.

생명의 호흡이 있는 영혼일수록 통증으로 인해 줄이 끊어질 정도로 요동치는 법이다. 살이 패이고 피로 손이 짓물러도 놓을 수 없음은 그 영혼을 그리스도께서 부르셨기 때문 아니던가?......
그런데 나 또한 아직도 손이 너무 부드럽다.

2015년 8월 23일 일요일

행함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

값없는 은혜(칭의)안에 행함의 삶이 녹아들어가 있다. 칭의안에 성화의 개념은 담겨있는 것이다. 한마디로 성령님은 늘 일하고 계신다. 우리가 받은 믿음을 사용하여 말씀에 순종하도록 늘 긴밀히 설득하신다. 아버지의 양자된 자녀들로써 때로는 따끔한 훈계늘 받지만 결국 우리는 그 품에 있게 되는 것이다.

이미 믿음을 받은 택자들에게는 하나님께서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끌어 내심이다. 이를 토마스 굿윈이 잘 설명하였다.

믿음의 본질(p.431)

참으로 값없는 은혜는 당신의 영혼에게 나를 그런 식으로 대우하지 말라고 말해 줄 것이다.

[반론] 노력, 즉 수단을 전혀 활용하지 않아도 되는가?

[답변] 전혀 그렇지 않다. 노아의 경우에, 노아는 여호와께 은혜를 입었지만 하나님은 노아에게
"너를 위하여 방주를 만들되......"라고 명령하셨다. 빌립보서 2장에서는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라고 우리에게 명령한다.
(11~12절). 그런데 우리 자신의 구원을 어떻게 이루는가? 우리는 구사할 수 있는 수단을 사용하되 그런 의지와 행위를 일으키는 하나님의 은혜에 종속해 사용해야 한다. 우리는 수단을 사용함에 있어서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뜻대로 맞춰 기다려야 하고 우리의 모든 행위를 부인해야 한다. 우리는 그런 의지와 행위를 만들어 내는 하나님께 종속해 이 수단을 사용해야 한다.

지체안에 거하시는 하나님

오랜만에 깊은 시간까지 나눔을 가졌다.
지체들의 속내에서 나오는 진실한 고백을 들을 때마다 절로 숙연해 진다.

내안에 이죽거리는 마음과 형제들에게 배워나가는 마음이 충돌했다. 삶의 애환을 겪는 가운데서도 이미받은 '은혜'로 버텨나가는 지체들의 모습이 어찌나 아름답던지 질투(?)까지 날 정도다.

그만큼 신뢰하는 마음이 성장중이라는 생각이 든다. 정말이지 오늘날의 청년들은 고뇌가 크다.
스펙의 부족함, 직업의 불안정, 수입의 마지노선,
늦춰지는 결혼등...

시대는 크리스챤 청년들에게 가혹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가혹하지 않음을 보여주신다.
자비하시고 인자하시며 선함이 넘치시는 주님은 언제까지고 우리를 기다리시며 거듭난 '의지'를 사용하여 스스로 당신께 나아오게금 훈련시키신다.

오늘 지체들에게서 그런 모습을 보았다.
나의 부끄러움이 폭로되고 지체들의 영혼가운데 일하고 계시는 성령님의 은혜를 느낀다.....

나는 아직 갈길이 멀다!

2015년 8월 21일 금요일

마르다의 고백(요 11:25)

마르다의 고백은 실로 엄청난 사랑의 고백이다.
자신의 믿음을 완벽하게 증거하면서 그속에 진실함이 담긴 고백중의 고백이다.

그러나 이 고백에 담겨진 진가는 하나님께서 친히 마르다를 사랑 하셨기에 가능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질문의 수여자도 하나님이시요 답변의 부여자도 하나님이 되셨다는 뜻이다.
특별히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 고백이 성취된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토마스 굿윈은 예수님과 마르다의 질의응답을 다음과 같이 표현을 한다. " 학습 교인에게 교리문답서의 질문에 답하도록 하는 것처럼"
예수님께서 마르다의 신앙고백을 이끌어내셨다는 것이다.

이 연약하고 가냘픈 여성의 입술에서 실로 아름다운 중압감이 있는 진실된 고백이 튀어나옴은 그야말로 기적이다. 또한 예수께서는 이 특정사항들에 대해 엄격하게 대답할 것을 요구하신 것이기도 하다.

마르다는 충분하고도 완전한 내용의 답변을 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전적인 신뢰와 지식을 겸비하고 있었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 덕택에 이 모든 것을 믿었다.

즉, 그리스도 자신께서 우리 믿음의 본질이 되신다는 얘기다. 우리 믿음의 출처는 나에게서 오지 않는다. 바로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옴이다.

마르다는 이 원리를 잘 알고있었다.
오늘날 이런 고백이 가능케 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성령님께서 우리의 전인격에 그리스도의 구속을 적용시키셨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아버지와도 하나됐음을 말하며 새로 거듭나게 된 것이다.

그렇기에 우리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일하심에 의지하여 그분의 말씀에 순종하도록 해야한다.
포기말고 나아가야 한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거룩하시기를 원하시는 분이시다.

마르다에게 진실된 고백처럼 우리의 삶도 그리 이끌어 주실 것이라 굳게 믿으며 나아간다.

2015년 8월 18일 화요일

그리스 비극 <아가멤논>을 읽다.

고대 그리스의 3대 희극작가 중 하나인 아이스퀼로싀의 '아가멤논'을 읽었다.

고대때부터 인간의 비극은 중요한 화두였던듯 하다. 비극은 때론 교훈의 역할도 하지만 인간저변의 어두움이 만족하는 쾌락의 요소도 있는듯 하다.

오늘날 막장 드라마를 호소하는 한국 국민들의 정서만 보아도 그렇다. 속에 쌓인 분노가 클수록 자극적인 결말로 치닫는 '비극'을 선호하는 듯 하다. 비극 아가멤논의 스토리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트로이의 사령관으로 참전했던 그리스의 왕 아가멤논이 신들의 노여움을 잠재우기 위하여 자기의 딸을 제물로 바친다. 그의 아내 클레타임네스트라는 희생당한 딸의 복수를 위해      남편을 죽이기로 결심한다.

그녀는 결국 트로이 전쟁에서 10년간 분투하다 겨우 승리를 거머쥔 남편을 욕조에서 살해한다.
온 그리스가 왕을 '영웅'으로 여겼지만 왕비의 눈에는 혈육의 정이라고는 코빼기도 안보이는 냉혈한 짐승이였다.

그러나 결국 그녀도 깨끗하다고 볼 수 없는 존재였고 그의 간통남이 누군지 드러난다.
아니 정확히는 '정부'가 존재하는데 아가멤논과 결혼한 것이라고 봐야하려나?

왕이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녀는 연인 아이기스토스와 뜨겁게 사랑을 나눴던 것이다.
왕이 살해 당한 이후 원로원은 두 남녀에게 매우 분개하지만 결국 칼을 뽑지 않는다.

이후 아가멤논의 아들이 그의 칼을 왕비의 피로 적시는 날이 오기는 하지만......

신화적 요소가 넘치는 허구 이야기이지만 이 속에 당대 사람의 인생과 철학이 담겨있음을 볼 수 있다. 시대와 환경은 다르지만 인류의 역사속에 저런 비슷한 일이 얼마나 많던가?

그리스신화는 아름다운 이야기도 있지만 결론이 모두 좋지가 않다. 어찌보면 그리스의 지식인들은 인간들 행동의 최종적인 결말은 비참하다는 것을 교훈하는 것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기에 인간의 죽음도 비참속에서도 아름답다는 '인간 전생애'를 찬양하는 것일지도......

하지만 인간이 인간다워 짐은 그리스도 안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우리는 알아야 한다.

2015년 8월 17일 월요일

마음의 고뇌

마음이 어지럽다. 나의 영적인 상태에 적신호가 켜졌다. 기도함에 있어서도 많이 멀어져 있음을 감지함이다.

유혹의 촉수가 마음에 둘러져있는 느낌이다.
무서운 것은 마음 깊이는 무감각한 듯한 감정이라는 것이다.

존 번연의 소설 '거룩한 전쟁'에서 성령님께서 자신의 성문을 굳게 걸어 잠구는 묘사표현이 있다.
마치 그런 느낌과도 같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가?
연약한 내 자신을 생각하며 그 자리에 머물러 있음을 확인한다. 내적갈등으로 인해 마음이 지쳐감을 인식한다......

그러나 선한 손길로 자신의 영광을 스스로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위대하시고 자비로우심은 변함없으시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

2015년 8월 16일 일요일

부끄럽다

주보에 올려져있는 선교사님들의 글과 주변의 경건한 어른들의 삶을 보며 내 자신이 무척 가식이란 생각이 든다.

하나님의 선하심은 굳게 신뢰하지만 이 굳음은 근거가 '나'인가? '하나님'이신가?
머리로만 안다 머리로만 안다 내 마음속에 되뇌인다 해서 그것이 과연 회개의 차원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인지 돌아본다.

우리 삶의 전반적인 모든 부분에 하나님께서 관여안하시는 것이 없다. 몸서리치게 메여있는 삶의 쾌락이 어찌나 달콤하던지 자주 거기에 빠지는 내 모습을 본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삶을 사용하신다.
진정한 '기도'가 멈춰있음을 확인한다.

죄라는 것이 무서운게 그 쾌락에 자주접하면 삶에서 하나님의 역사하심도 왜곡되게 해석하게 된다는 것이다.

성령님을 근심케하는 행동을 피하라는 바울의 권면은 뼈를 울리케 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삶을 살고 싶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이끌어주시길 소망한다.

죄의 유혹에 대해 뿌리치는 결단을 주시는 성령님을 신뢰함이 내게 부족하다는 것을 본다.
나 또한 경건에 취약한 오늘날의 청년임을 내 스스로가 드러내고 있다.

"하나님 당신의 도움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저는 죄인중의 괴수이나이다. 이 고백이 그저 입술의 고백이 아니라 진리의 조명이신 하나님의 은혜로 비롯됨이기를 소망하나이다.

내가 진정 죄인임을 날마다 당신께 고백하겠나이다. 알량한 생각들을 그치게 하시고 나의 삶을 당신께 순종하는 삶이 되게 해주소서.
제가가 순종보다 나음의 태도를 고수하는 못난 나를 돌아봐 주시옵소서...

당신의 자비하심과 선하심을 기대하나이다.
죄악에서 건져내시는 그 권능의 팔에 의지하나이다. 내가 심란하여 나의 죄에 사로잡혀 당신을 잊나이다. 외식된 모습에 놓여있나이다.
당신의 선하심을 맛보고 나의 양심의 민감함을 살아나게 하소서......

아멘."

2015년 8월 15일 토요일

시편 15편 - 참 신자의 태도

1. 여호와여 주의 장막에 머무를 자 누구오며 주의 성산에 사는 자 누구오니이까
2. 정직하게 행하며 공의를 실천하며 그의 마음에 진실을 말하며
3. 그의 혀로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고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에게
    악을 행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웃을 비방하지 아니하며
4. 그의 눈은 망령된 자를 멸시하며 여호와를 두려워하는 자들을 존대하며 그의 마음에 서원한 것은 해로울지라도 변하지 아니하며
5. 이자를 받으려고 돈을 꾸어 주지 아니하며 뇌물을 받고 무죄한 자를 해하지 아니하는 자이니 이런 일을 행하는 자는 영원히 흔들리지 아니하리이다

본 시편은 하나님께서 어떤 조건으로 유대인들을 자신의 백성으로 선택하시고 자신의 성전을 그들 가운데 두셨는가 하는 점을 가르쳐주고 있다. 이 조건이란 그들이 공정하고 정직한 삶을 살아감으로써 특수하고 거룩한 민족이라는 점을 마땅히 입증하는 것이었다.(칼빈주석 시편15편 주해 서문 中)


하나님의 교회안에 있는 신실한 백성과 그렇지 않는 자들이 구분되는 것을 명확히 보여주는 구절들이다. 1절에서 볼 수 있듯이 하나님의 장막에 거할수도 있고 그의 성산에 살 수 있는 존재들은 택학 백성들 외에는 없다.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하지 않는 거룩하지 못한자는 성막에 거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주의 성막에 거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교회내에도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는 존재들이 가면을 쓰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윗은 이후 하나님의 거룩함을 본받고 닮아가는 자들이 어떤 삶을 살게되는지를 언급한다.
신실한 백성의 공통적인 특징은 하나님 앞에서 '정직하게 행함', '공의를 실천함', '그 마음에 진실을 말함' 3가지로 나타난다.

물론 이 지상에서 우리가 완벽하게 그 삶을 살수는 없지만 하나님께서 점차적으로 이것들을 이뤄나가신다. 신자들은 그 입술에도 경건함이 묻어나온다.(3절)
그의 혀를 남을 허물하지 아니하는 태도를 갖춤은 신자됨의 기본적인 자질이다.
혀를 잘못 놀림으로 해서 벌어지는 악행들이 얼마나 많던가? 오늘날 교회에서도 '말'때문에 많은 일들이 일어난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상처받아 교회를 떠나는 지체들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에게 언행의 신중함을 늘 권면하신다. 우리의 입술 또한 하나님의 것이기 때문에 그 혀에 거룩함이 담겨야 한다. 그리고 그 입술로 그리스도의 사랑을 찬양하며 전해야 함이 마땅하다. 나 또한 지체를 향한 험담함이 있었음을 돌아보게 된다.
때론 경건을 위한 침묵 또한 사랑의 다른 표현법이라는 것을 생각해 본다.

신자의 눈은 망령된 자들에게 정을 두지 않는다. 되려 여호와를 경외하고 존대하는 자들에게 눈을 두려 한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신앙이 깊어질 때마다 경건치 못한 '불신자' 친구들에게
눈길이 가지 않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물론 관계에 있어서 그들도 전도의 대상이지만 경건치 못한 행동을 취하는 자들에게 오랫동안 눈길을 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나의 눈이 있는곳에 나의 마음이 있다고 하지 않던가?
신실한 신자의 눈은 하나님만을 바라보게 되며, 그 시야가 확장되어 아버지의 백성들과 그의 선하심이 베풀어지는 대상들을 향해 돌려지게 된다.
또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원한 것이 이 생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걸림돌로 작용할지 모르지만 하나님께 영광이 된다면 변치 않을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리 쓰시기로 작정하신 것은 변할 수가 없다.

고리대금을 예를 들어서 얘기하고 있는데 이 행위는 이웃의 피를 빨아마시는 행위라고 칼빈은 언급한다. 하나님은 신자의 인생선상에서 보내주시는 만남들은 하나같이 당신의 복음을 증거하고 전파하라는 의미이다. 그들의 영혼에 고통과 부당함을 안겨주라는 뜻이 아닌 것이다.
마땅히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그들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고 섬겨야 함이다.

부족한 묵상이지만 성령님께서 깊이 조명해주시길 소망한다.
시편15편의 말씀은 내게 전달하시는 바와 동시에 내 자신의 경건치 못함을 지적하시는 듯 하다. 달게 받으며 오늘의 묵상을 마친다.

장로의 직분과 사역과 그 범위

대한예수교 장로회 헌법 교회 정치 제5장 47조.

1. 목사와 협력하여 행정과 권징을 관리하는 일
2. 교회의 영적 관계를 살피는 일
3. 교인을 심방, 위로, 교훈하는 일
4. 교인을 권면하는 일
5. 교인들이 설교대로 신앙생활을 하는 여부를 살피는 일
6. 언약의 자녀들을 양육하는 일
7. 교인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는 일
8. 목회에 필요한 제반 사항을 목사에게 알리는 일

2015년 8월 14일 금요일

유감

(1)세상은 참 좁다.
친하지는 않지만 확인한 소식으로 동창중 하나가 이단에 빠진 것 같다. 교회들은 힘을 잃어가는데 우린 그저 먹고 살기 바빴던 것 같다.
생각해보면 내 주변에 이단에게 심각한 피해를 입은 친구들도 꽤 있었다. 그 결과 바른교회에도 반감을 품은 입장들이 됐다.

앞에 동창이 빠진 이단은 예장합신에서 이단으로 정죄한 교회다. 정죄근거는 성경적으로 타당하다.

(2) 예전 출석하던 교회의 성도분들 중 많은 분들이 인근의 '하나님의 교회'로 출석중이라는 한 지체의 제보를 들었다. 지체가 교회에서 소외당해 방황할 때 잠시 그곳을 방문하면서 확인했다고 한다. 교회의 잘못됨에 반감을 품고 있던 성도들의 마음에 교묘히 침투한 것 같다고 한다. 이단조차 잘못된 내부사정을 잘 알고있는 것 같다. 출석하며 상황을 파악하는 수법을 쓰는것으로 보이는데 참으로 교묘하다.
모교회가 교리적으로 취약함을 잘 드러내는 사건이다.

어거스틴이 교회 밖에도 이리가 있고 안에도 있다고 하는 말이 스친다.

언제까지 잘못됨을 방관하고 있을테인가?
입다물고 있음도 틀렸음을 입증하는 사건들이 이젠 성도 개인의 주변에 적극적으로 일어나고 있는 것 같다.

2015년 8월 13일 목요일

가을이다

아직 날씨는 더위가 계속 이어지고 있지만 아침, 저녁으로 선선하다. 특히나 이미 하늘은 가을을 입었다. 청공 너머로 보이는 깊은 푸른색이 낙엽이 지는 계절이 왔음을 증명하고 있다.

아직 가을의 깊이까지 무르익은 것은 아니나 곧 서늘한 바람이 불어올 것 같다.
매년 맞이하는 가을이지만 항상 같은 모습은 아님이 신기하다. 이상기후의 영향을 배제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해마다 계절의 옷을 갈아입히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주목한다.

정말 뭐라 표현할 길이 없다.....

2015년 8월 12일 수요일

가르침의 주체

모든 가르침은 하나님께로 부터 나옴이다.
특별히 그 가르침의 정수는 '성경'에 담겨있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하니" (딤후 3:16)

당시의 모든 성경은 '구약'과 '사도들의 가르침'을 포함해 보인다. 오늘날에는 구약과 신약을 가리키는 것으로 해석되어지고 있다.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창조된 인간이 어떤 목적으로 살아가야 함을 친절히 알려주고 계시다.
세간이 말하는 성공의 비결이라던지 하는 것은 담겨져 있지 않다. 성경을 그런 방향으로 엮어 버리는 것은 위험한 시도라고 볼 수 있다.

성경은 인간이 인간답게 살아가는 목적 자체가 하나님이시라는것을 궁극적으로 가리키고 있다.

물론, 성경이 죄인된 인간을 값없이 구원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을 중심적으로 다루고 있음은 더할나위 없이 중요하다. 허나 성경이 구원만을 다루는 것으로만 해석한다면 반쪽만을 본 것이다.

성경은 구원의 책이기도 하지만 구원받은 성도의 삶에 대해서도 나타내고 있다

"이는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 하며 모든 선한 일을 행할 능력을 갖추게 하려 함이라"
(딤후 3:17)

구원받은 것으로 끝이 아니라 성도는 이 지상에서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 가도록 훈련 받는다.(이것을 '성화'라고 한다.)
옛자아는 죽이고 받은 새본성으로 살아가게 되는 위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존 번연의 '천로역정'이 이를 잘 표현해 주고 있다.
이 위대한 여정의 인도자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우리는 여러 고난과 환난의 훈련을 거쳐 점차 하나님과 가까워지게 된다.

하나님의 전인격적인 가르침을 어느누가 거부할 수 있을까? 하나님께서는 늘 우리와 함께 하심이다. 우리와 긴밀히 교제하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다.

그러나 오늘날의 청년들은 성경을 너무나도 읽지 않는다. 또 다른 문제로는 신학생들 중에서 '신학'을 경시하는 지체들도 있다. 성경과 신학은 함께 가는 것이다. 신학 또한 하나님의 가르침이라 봐야한다.

말씀이 해석되는 풀이 모두가 신학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말씀을 알고 삶으로써 순종하는 모든 모습이 신학적 결과물들이다.

그 결과물들을 정리한 것이 '교리'이다.
역사적으로는 '신조'와 '신앙고백서'들로 나타났다.

딤후1:13절을 근거구절로 교리의 중요성을 해석하는 학자들이 있는데 나도 그들에게 동의한다.

"너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써 내게 들은 바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고"(딤후 1:13)

위 구절에 나타나 있는 '바른 말'은 KJV성경에서는 'form'으로 번역되어 있고 한국말로는 '표준'으로 직역되있다.

앞 문장인 '내게 들은 바'는 바울에게 들었다는 것 이다. 즉, 사도의 해석이라는 얘기다. 쉽게 말하자면 '사도가 해석한 바른 말'을 본받아 지키라는 것이다.

이것이 '교리'다. 원천인 성경의 핵심적인 가르침을 정리하여 성도들 삶의 표준이 되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성경'과 '교리'를 많이 알아도 성령님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아무 것도 아니다.(딤후 1:14)
제 아무리 성경해석과 교리에 능통해도 인간이 이것을 완전히 다 이해하고 살기란 불가능하다.

오직 하나님께서 원인이 되시기에 가능하다는 얘기다. 성도들을 가르치시기 위해 말씀을 주셨고 해석의 권위는 '교회'에 맡기셨다.

긴밀히 얘기하면 성도에게는 어느 것 하나 하나님의 가르침이 안담긴 곳이 없다는 얘기다.
현대 사회는 메마르고 잔인하다. 끊임 없는 취업불안과 경제난 그리고 교회의 무관심으로 청년들은 방치되다 싶이 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가르치시기를 포기하신 적은 없다. 우리가 보지 않고 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는 바울의 말이 심금을 울린다.

물론 우리의 경건은 늘 점검 받아야 되는 것이지만 오늘날 경건한 지체들은 오히려 사회적 소외자가 아닐지 생각해 본다.

그들은 진정한 인생의 길잡이가 누구신지 알기에 부르실 때까지 기다리느라 '바보'처럼 보일지도 모른다. 심지어 가정의 부모들 조차 그들에게 핍박을 가할지 모른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인도하셔서 이뤄내시는 결과는 선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숨죽이며 살고 있더라도 언제든 하나님께서 그 삶을 사용하실지 어떻게 알겠는가?......

오늘도 하나님의 가르침을 담대히 받고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를 기다리는 훈련을 받기를 소망한다.

2015년 8월 11일 화요일

무엇이 두려운가

인생의 진로를 두고 고민이 많다.
무엇보다 하나님 앞에서의 나를 돌아봄이 말로만인 것을 자주 확인하니 무기력해짐이다.

경건을 지식으로만 체득했다는 말이 내 머릿속을 멤돈다. 내 스스로에게 되뇌이는 중이다.

디모데전서를 펼쳤다. 바울이 디모데에게 보내는 목회서신서란 주제를 가지고 있지만, 그보다는 하나님께서 성도들에게 직분이란 무엇인가 손수 가르치시는 말씀이라는 점에 더 위로가 된다.

인생은 늘 고난이다 그러나 바울은 디모데에게 믿음의 선한 싸움을 지속하라는 권면을 전한다.
이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부르셨기 때문이다.
(딤전 6:12)

하나님의 사람이 세상에서 띄는 전투양상은
세상에서 진리를 왜곡하며 요구되는 주된 이치들을 피하고(6:3 ~ 9) 경건과 믿음과 사랑과 인내와 온유를 따르는 것이다.(딤전 6:11)

이런것들을 분별하는데 원천이 되는 것은 당연히 말씀과 기도이다. 성경과 멀어지면 눈이 멀어지고 기도가 그치면 귀가 닫힌다.

하나님은 볼수도 들을수도 없으며 다가올 시련에도 견딜힘이 없어진다. 예배의 부재는 하나님을 맛봄을 포함해 앞에 두 효과들이 제대로 멎어버렸다는 증거다.

이런 상태에서 우리가 인생의 선택을 제대로 할 수 없다. 디모데전서에서 요구되는 가르침을 따르는 것은 어찌보면 세상에서 바보취급을 받는 것과 같다. 오늘날에는 교회내에서 조차 이런 마음가짐을 가진 청년들을 무너뜨리는 것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오, 연약하도다 오늘날의 교회여... 심지어 나도 무기력함을 때때로 느끼니 말이다. 하나님을 향한 경외의 태도를 갖춰야 할 때이다.

'경건한 고독'을 바탕으로 내공을 축적할 때인듯 싶다. 하나님께서 해주시지 않으면 어떻게 그 길을 헤쳐나갈 것인가?...

범사에 늘 일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며 그분이 가르치시고 이끄시는 바를 기다리는 성도가 되고싶다. 그런 성도로 성장하길 소망한다.

'죄인중의 괴수'라고 고백하는 바울처럼
나도 그 괴수중의 괴수다. 이런 괴수를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선량하시고 풍성하신 은혜를 보라!...

자비하시지만 죄에 대해 진노하시는 그 분의 정의감을 보라! 가차없이 악을 멸하시는 전능하신 아버지의 그늘을 묵상해 본다.

그래 무엇이 두려운가? 가장 두려운 것은 하나님 한분이시지 않던가?......

내 인생의 진로도 그분 손아귀에 있음이여,
나의 뜻으로 가기를 주저하고 그분의 이끄심에 이끌리어 가기를 간곡히 간구해 보련다.....

2015년 8월 7일 금요일

신앙의 후대를 생각하며

현재 한국의 교회들 신앙교육의 현주소는 매우 좋지 않다. 가장 정통을 고수한다고 지칭하는 장로교회들 조차 온전하게 실행하지 못해왔었다.

1970~80년대 부흥운동의 여파로 인해 기하급수적으로 몸집이 커진 한국 교회들은 점차 초기의 순수함을 상실하고 병폐의 참상을 드러냈다. 18C에서 지적됐던 '부흥'의 역현상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다.

한국사회에 영향을 줄 정도로 기독교는 교세가 엄청나게 확장됐으나 그에 걸맞는 내실은 갖추지 못했다. 목회자들은 물론이거니와 성도들도 믿음의 연약함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다행인 것은 최근 '교리교육'이 유행의 급물살을 타며 내강을 다지는 교회들이 있다는 것이다.
소수이긴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라고 여겨지는 감사한 부분이다.

그러나 여전히 복음의 부재로 인한 삶의 약화는 여전히 성도들을 무기력하게 하고 있다. 일례로 아직까지도 교회의 역사와 소속 교단의 정치형태에 대한 인지 부족을 손에 꼽을 수 있겠다.

심지어 정통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하는 방향성을 둔 교회까지도 시행착오에 애를 먹고있다.
정보와 공부가 부족한 탓이다. 특히나 가장 뼈 아픈건 말씀을 가까이게 두고 기도와 묵상함이 약화됐다는 것이다.

다음 세대를 이어가야 할 청년들에게서 이런 모습들이 많이 관찰된다. 한국의 좋지않은 경제환경도 지적될 수 있겠지만 개개인의 경건상태의 미흡도 크다. 그리고 교역자, 장년, 청년의 교제의 층이 너무나도 얇다.
소통의 부재도 한몫 두둑히 하고 있는 실태다.

위와같은 상황을 보게되면서 민수기 13장의 모습이 눈앞을 스쳤다.
'가나안'을 눈앞에 둔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과 오늘날 정통주의를 지향하는 교회들의 모습이 참 유사하다는 생각이다.

12인의 정탐꾼을 파견하지만 이 중 하나님의 약속을 굳건히 신뢰한 것은 무리중 가장 젊은
여호수아와 갈렙이였다.

신앙교육을 참 잘 받은 이 두청년은 가나안 땅을 바라보면서 눈앞의 고난과 위협보다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확인하고 확신했다.(민 13:27)

이어 갈렙은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성취하시는 선한 분이므로 그분의 영광을 위하여 싸우려는 투지를 불사른다.(민 13:30)
하나님께서 함께하고 계심을 갈렙은 확신하고 또 확신했다. 그 믿음의 근거는 하나님께서 자신들의 조상에게 맺으셨던 약속과 애굽에서부터 자신들을 이끌어 내신것을 보고 들으며 자랐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두 청년을 깊이도 사랑하셨다.
다만 어른들이 문제였다. 이 두 청년의 진실한 신앙고백에도 불구하고 응징을 가하려 했다.
(민 14:10)

결국 하나님이 나서셔서 이 두 청년을 보호하시고 노하신다. 모세는 회중을 위하여 하나님 앞에 중보에 서게된다. 그러나 그 중보까지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 이였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자신의 영광을 성취하시는 것을 보여줌이기도 했다.

"여호와는 노하기를 더디하시고 인자가 많인 죄악과 허물을 사하지 아니하시고 아버지의 죄악을 자식에게 갚아 삼사대까지 이르게 하리라 하셨나이다

구하옵나니 주의 인자의 광대하심을 따라 이 백성의 죄악을 사하시되 애굽에서부터 지금까지 이 백성을 사하신 것 같이 사하시옵소서"
(민 14:18~19)

오늘날 부모세대들은 광야1세대의 모습과 같지 않던가? 교역자들도 이 지적에서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나도 마찬가지다.

물론 인간이기에 우리가 실수할 수 있지만 젊은 청년들 사이에 '여호수아와 갈렙'같은 존재들이 숨어있을지 모른다.

현대에서 그런 지체들이 주목을 못받는 상황이기에 보지 못하는 걸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는 자신의 출석교회 성도들을 경건함으로 다시 돌아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이들은 가정에서도 갈등을 겪고 있을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교회를 보존하고 성장시키기 위하셔서 이런 지체들을 쓰실 것 이다.

인내를 가지고 하나님의 쓰심을 기다리는 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그러나 말씀에서도 증거하셨듯이 늘 선한결과로 반드시 이뤄내시는 분이시기에 의지하며 버티는 수 밖에 없다.
성령께서 우리를 반드시 끌어가실 것이기 때문이다.

광야1세대가 벌였던 실수를 범하는 일이 없도록 기도와 간구에 힘쓰며 선하신 하나님께서 이루시는 것을 바라보며 따르기를 소망한다!

2015년 8월 4일 화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 공부 후기 - 6(part2)

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1603 - 25)는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을 차기 영국왕으로써 잉글랜드 왕실의 초청을 받는다. 지긋지긋한 스코틀랜드에서 탈출의 기회를 얻은 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왕실마차에 몸을 실고 왕궁으로 향한다.
이 무렵 음지(?)에서 절개를 지키며 예배를 드리던 잉글랜드 내 장로교도들은 장로교회로 명성이 높은 스코틀랜드의 왕이 국내로 옴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기대였음을 그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잉글랜드 궁전에 당도하자마자 제임스6세(이하 제임스1세)는 호화찬란한 그 위엄에 깊은 감명(?) 받는다. 저 벼랑끝에 우중충하게 걸려있는 스코틀랜드의 궁정과는 차원이 다른 뷰티풀이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1세가 국력을 강화하면서 왕실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제임스1세는 국교회의 나름 깔금하고 정갈한 예배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국교회의 수장이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점이 상당한 메리트였다.
그가 왕위에 앉으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사실상 통합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자 잉글랜드의 왕이였기 때문이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국기와 잉글랜드의 국기도 합쳐져서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했다.
제임스1세가 된 이후로 그는 더이상 스코틀랜드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3년간 한번돌아올테니 똑바로 하고 있어라" 경고는 까맣게 잊혀졌고 죽는날까지 자신의 고향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장로교도들의 땅은 거들떠도 보기 싫은 그였다.
장로교에 상처가 있는 제임스1세는 영국내의 장로교도들과도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는 단호하게 장로교에 맞섰다. 사실 그는 왕권신수설의 강력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견해다.
대표적인 두 사건이 다음을 변증해주는데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영국내 장로교도들은 앞서 말했듯이 기대가 있었다. 그 저명한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의 교육을 받은 왕이니 올바른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1603년 잉글랜드의 장로교도들이 제임스1세를 자신들의 연회에 초대했다.
그들은 부푼 마음을 가진채 그들의 왕(?)을 단상에 모셨다. 하지만 왕의 입술에서 내 뱉어진 말은 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군주정과 장로교는 하나님과 악마만큼이나 잘 어울린다!"
장내는 찬물이 끼얹어진듯 조용해졌고 모임에 모였던 장로교도들은 이 왕의 싸늘한 대사에 온 몸이 얼어붙었다. 너무나도 싸늘해졌던지 왕은 뻘줌함을 무마하고자 그들에게 거대한(?) 사업 하나를 "옛다 이놈들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하고 던져준다.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성경편찬(현 KJV) '이였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편찬된 성경번역이라는 것에는 의의가 없지만, 역사적 배경에서는 그저 이 사태를 무마하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술이였다. 킹 제임스라는 수식어만 붙은걸 봐도 '왕'이 주도했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영국 장로교도들은 이것을 인내로 참았다. 어떻게든 국민들이 자국어 성경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휘한 감내의 투혼은 결국 하나님께서 후대에서 빛을 보도록 하셨다.
두번째 사건은 앤드류 멜빌의 투옥이였다. 역사적으로는 제임스1세가 장로교도들을 탄압했다고 위키피디아에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는 앤드류 멜빌만 투옥당하였고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성공회로 개종할 것만을 강요했다.
그는 우두머리인 멜빌만 본보기로 처리하여 "너네 조용히해."라는 경고만 전했을 뿐이였다. 사실 멜빌에게 가한 처사는 본보기라기 보단 사적인 원한에 더 가까웠다고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자신의 옷깃을 잡아채 무안함을 가져다 준 그 순간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왕에게 멜빌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하늘같은 왕을 내리깔아 뭉겠으니 말이다.(정작 멜빌은 그런 의도가 아니였지만......)
그는 의회를 청산하고 청교도들에게 성공회로 개종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압하자 이를 못버틴 일부는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새로운 식민지인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당시 배를 탄 청교도들은 장로교인뿐 아니라 다양한 신학성향을 띈 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개혁파 청교도들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제임스 1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왕이였다. 정리하자면 영국의 경제부흥과 종교개혁의 과도기 사이에 끼여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정말 별다르게 업적이 없는 불쌍한 왕이기도 하다. 그나마 남긴것은 KJV성경편찬 사업이였다.(자신에게 도움은 안됐지만) 엘리자베스1세가 남겨놓은 막대한 경제유산들을 그저 하염없이 내버려 둔것 밖에는 없다. 더군다나 의회를 없앴다는게 사실상 재정관리를 제대로 안하겠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는 나름 비상했을지 몰라도 선대였던 엘리자베스1세와는 달리 경제적 수완은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평가가 다소 야박한 편이다. 더군다나 제임스1세 시기에 미수에 그친 테러사건도 발생했었다. 일명 "Gun power(화약사건)"인데 주범자는 '가이 포크스'라는 로마 카톨릭 혁명단체의 회원이였다. 그는 국왕을 암살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카톨릭화 시키려는 야심(?)가진 인물이였다. 다만 다소 인간관계 스킬이 부족(?)했던 탓에 동료의 밀고로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지하에 다량의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붙여 폭파시킬 계획이였다. 제임스1세게 정말 종교란 골치아픈 주제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임스1세의 통치시기에 제자리에 머물러버린 영국 종교개혁은 그의 말년이 되면서 또 다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아들 찰스1세의 군림은 영국 역사상으로나 종교개혁상으로나 최악의 국면이기도 하면서도 장족의 발전을 도모하는 시기다.
복잡했던 영국 종교개혁사의 Cross wise 지점이 바로 이 시기다.
드디어 영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찰스1세의 통치시기에 열리게 된다.
- 7부에 계속

사진(1)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사진(2) 체포되는 가이포크스
사진(3) 메이플라워호
*가이 포크스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소재이기도 하다.
주인공 브이가 쓰는 가면이 가이 포크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무정부 주의의 상징으로 그려지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행보는 종교적 색채로 봐야한다. 또한 영어 '녀석'의 Guy 유래는 이 가이 포크스의 이름 'Guy'라고 한다.



 
<제임스 1세>

 
<가이 포크스 체포화>
 
 
<메이 플라워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