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코틀랜드의 제임스6세(1603 - 25)는 엘리자베스의 뒤를 이을 차기 영국왕으로써 잉글랜드 왕실의 초청을 받는다. 지긋지긋한 스코틀랜드에서 탈출의 기회를 얻은 왕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채 왕실마차에 몸을 실고 왕궁으로 향한다.
이 무렵 음지(?)에서 절개를 지키며 예배를 드리던 잉글랜드 내 장로교도들은 장로교회로 명성이 높은 스코틀랜드의 왕이 국내로 옴을 내심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헛된 기대였음을 그들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잉글랜드 궁전에 당도하자마자 제임스6세(이하 제임스1세)는 호화찬란한 그 위엄에 깊은 감명(?) 받는다. 저 벼랑끝에 우중충하게 걸려있는 스코틀랜드의 궁정과는 차원이 다른 뷰티풀이였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1세가 국력을 강화하면서 왕실의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종교적인 측면에서도 제임스1세는 국교회의 나름 깔금하고 정갈한 예배 양식이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도 국교회의 수장이 잉글랜드의 '왕'이라는 점이 상당한 메리트였다.
그가 왕위에 앉으면서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는 사실상 통합되게 되었다. 스코틀랜드의 왕이자 잉글랜드의 왕이였기 때문이다. 이때 스코틀랜드의 국기와 잉글랜드의 국기도 합쳐져서 새로운 디자인이 탄생했다.
제임스1세가 된 이후로 그는 더이상 스코틀랜드가 기억나지 않았다. 아니 기억하려 하지 않았다고 하는 표현이 정확하겠다. "3년간 한번돌아올테니 똑바로 하고 있어라" 경고는 까맣게 잊혀졌고 죽는날까지 자신의 고향에 발을 들이지 않았다. 지긋지긋한 장로교도들의 땅은 거들떠도 보기 싫은 그였다.
장로교에 상처가 있는 제임스1세는 영국내의 장로교도들과도 마찰이 일어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그는 단호하게 장로교에 맞섰다. 사실 그는 왕권신수설의 강력한 신봉자였기 때문에 종교적 문제는 별로 신경쓰고 싶지 않았다는 것이 정확한 견해다.
대표적인 두 사건이 다음을 변증해주는데
제임스가 잉글랜드의 국왕이 된 이후 영국내 장로교도들은 앞서 말했듯이 기대가 있었다. 그 저명한 스코틀랜드에서 장로교회의 교육을 받은 왕이니 올바른 종교개혁이 일어날 것이라는 기대가 마음속에 있었던 것이다.
1603년 잉글랜드의 장로교도들이 제임스1세를 자신들의 연회에 초대했다.
그들은 부푼 마음을 가진채 그들의 왕(?)을 단상에 모셨다. 하지만 왕의 입술에서 내 뱉어진 말은 그들에게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군주정과 장로교는 하나님과 악마만큼이나 잘 어울린다!"
장내는 찬물이 끼얹어진듯 조용해졌고 모임에 모였던 장로교도들은 이 왕의 싸늘한 대사에 온 몸이 얼어붙었다. 너무나도 싸늘해졌던지 왕은 뻘줌함을 무마하고자 그들에게 거대한(?) 사업 하나를 "옛다 이놈들아 이거나 먹고 떨어져라"하고 던져준다.
그것이 바로 '킹 제임스 성경편찬(현 KJV) '이였다.
물론 하나님의 은혜로 편찬된 성경번역이라는 것에는 의의가 없지만, 역사적 배경에서는 그저 이 사태를 무마하고자 하는 하나의 정치술이였다. 킹 제임스라는 수식어만 붙은걸 봐도 '왕'이 주도했음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였다. 하지만 영국 장로교도들은 이것을 인내로 참았다. 어떻게든 국민들이 자국어 성경을 읽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발휘한 감내의 투혼은 결국 하나님께서 후대에서 빛을 보도록 하셨다.
두번째 사건은 앤드류 멜빌의 투옥이였다. 역사적으로는 제임스1세가 장로교도들을 탄압했다고 위키피디아에 기록되어 있다. 정확히는 앤드류 멜빌만 투옥당하였고 나머지 인원들에게는 성공회로 개종할 것만을 강요했다.
그는 우두머리인 멜빌만 본보기로 처리하여 "너네 조용히해."라는 경고만 전했을 뿐이였다. 사실 멜빌에게 가한 처사는 본보기라기 보단 사적인 원한에 더 가까웠다고 보이기도 한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 자신의 옷깃을 잡아채 무안함을 가져다 준 그 순간을 잊지 않았을 것이다. 왕에게 멜빌은 눈엣가시 같은 존재이기도 했다. 하늘같은 왕을 내리깔아 뭉겠으니 말이다.(정작 멜빌은 그런 의도가 아니였지만......)
그는 의회를 청산하고 청교도들에게 성공회로 개종할 것을 지속적으로 강압하자 이를 못버틴 일부는 1620년 메이플라워 호를 타고 새로운 식민지인 미국으로 향했다.
그러나 이 당시 배를 탄 청교도들은 장로교인뿐 아니라 다양한 신학성향을 띈 자들도 섞여 있었기 때문에 순수한 개혁파 청교도들이라고 보기는 힘들 것 같다.
제임스 1세는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왕이였다. 정리하자면 영국의 경제부흥과 종교개혁의 과도기 사이에 끼여있는 존재였다. 그래서 그는 정말 별다르게 업적이 없는 불쌍한 왕이기도 하다. 그나마 남긴것은 KJV성경편찬 사업이였다.(자신에게 도움은 안됐지만) 엘리자베스1세가 남겨놓은 막대한 경제유산들을 그저 하염없이 내버려 둔것 밖에는 없다. 더군다나 의회를 없앴다는게 사실상 재정관리를 제대로 안하겠다는 것과도 마찬가지였다는 생각이 든다. 머리는 나름 비상했을지 몰라도 선대였던 엘리자베스1세와는 달리 경제적 수완은 강하지 않았다.
그래서 후대의 평가가 다소 야박한 편이다. 더군다나 제임스1세 시기에 미수에 그친 테러사건도 발생했었다. 일명 "Gun power(화약사건)"인데 주범자는 '가이 포크스'라는 로마 카톨릭 혁명단체의 회원이였다. 그는 국왕을 암살하고 잉글랜드를 다시 로마 카톨릭화 시키려는 야심(?)가진 인물이였다. 다만 다소 인간관계 스킬이 부족(?)했던 탓에 동료의 밀고로 허무하게 잡히고 말았다. 그는 웨스트민스터 의사당 지하에 다량의 폭약을 설치하고 불을 붙여 폭파시킬 계획이였다. 제임스1세게 정말 종교란 골치아픈 주제였을 것이라는 생각도 든다.
제임스1세의 통치시기에 제자리에 머물러버린 영국 종교개혁은 그의 말년이 되면서 또 다른 파국을 맞이하게 된다. 그의 아들 찰스1세의 군림은 영국 역사상으로나 종교개혁상으로나 최악의 국면이기도 하면서도 장족의 발전을 도모하는 시기다.
복잡했던 영국 종교개혁사의 Cross wise 지점이 바로 이 시기다.
드디어 영국뿐만 아니라 종교개혁의 정점을 찍었다고 볼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총회'가 찰스1세의 통치시기에 열리게 된다.
- 7부에 계속
사진(1) 제임스 1세(스코틀랜드 제임스 6세)
사진(2) 체포되는 가이포크스
사진(3) 메이플라워호
*가이 포크스는 워쇼스키 형제의 영화 '브이 포 벤데타'의 소재이기도 하다.
주인공 브이가 쓰는 가면이 가이 포크스의 얼굴이기 때문이다.
영화에서는 무정부 주의의 상징으로 그려지지만 역사적으로 그의 행보는 종교적 색채로 봐야한다. 또한 영어 '녀석'의 Guy 유래는 이 가이 포크스의 이름 'Guy'라고 한다.
<제임스 1세>
<가이 포크스 체포화>
<메이 플라워 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