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식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것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살기가 힘들 것이다.
물론 인체는 신비하여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초월적으로 발달하는 특성을 가졌다.
인식의 장애를 겪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섭리의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상태로 창조됐다.
이 기능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도록 쥐어주신 특권이였다.
그러므로 인식은 대단한 축복이였다. 최최의 인류가 범죄하여 그 기능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죄가 발단이 되어 인식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입게 되었다. 마땅히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며, 맛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냐며 반론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여전히 인식기능이 잘 발휘 되고 있다며 말이다. 우리의 인식은 사실 육체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인 인식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인 안착지이다.
다만 인간 스스로는 그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비참한 현실이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그러한 것들을 깨기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동원한다. 가장 초월적인 인식에 다다르는 탁월한 수단으로 그들은 '고행'을 택한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 그것이 둔감해 질 때 오는 평온함을 초월적인 인식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식은 이러한 것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진정한 인식은 내부로 부터가 아니라 외부로 부터 쥐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부터 쥐어쥐며 전달하는 주체는 삼위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시작된다.
다른 종교들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유일무이한 방식이다. 세상의 인식은 내면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주체가 '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독교의 인식은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된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로 부터 말미암았으며, 그것들을 인식하도록 부여시키셨다. 피조물로부터 자신을 바라보도록 말이다. 그것은 간접적이면서도 직접적인 것이였다.
피조물을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도 우리를 만나주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적인 만남을 통해서 말이다.
타락이후 망가진 인식은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되었다. 인식기능이 망가진 인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됐다.
방향을 잃은 맹인에게 안내자가 찾아오듯 그리스도께서 다가 오셨다. 인식의 회복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여주시고 느끼게 해주시고 맛보게도 해주신다. 음성을 들려주셔서 우리가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를 인식시켜 주신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담겨있다.
예배, 성례, 교제 어느것 하나 인식과 결여되는 것이 없다. 진정한 인식의 회복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태도도 달리하게 만든다.
몸된 교회가 됐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케 되는 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음의 본질은 '내'가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식이다.
우리의 눈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만 모든것은 쇠하여 없어진다. 육신의 눈도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그 기능을 잃게 된다. 다른 감각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적인 인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가 새육신을 얻어 영원히 감각하게 될 그날을 고대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