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9월 30일 수요일

Data off/ 인식전환 On

본의 아니게 데이타를 다썼다. 이틀간 나의 폰은 침묵을 지키게 됐다. 없어도 불편하지도 심심하지도 않았다. 되려 한 문장을 곱씹는데도 더 긴 시간을 소요하게 되는 꿀맛을 누렸다.

사색을 할 때는 디스플레이 보단 하늘을 더 쳐다보게 된다. 그러나 앞으로 2시간 뒤면 데이터는 완충된다. 다시 반폰바라기가 되겠지만 스맛폰은 현대에 있어서 필수적인 아이템이면서도 아닌듯 하다.

데이터를 오프하면서 느끼는건

1. 레티나 스카이 보다는 육안 하늘이 더 낫다.
2. e-book보다는 양장본이 더 낫다.
3. 앱 바이블 보다는 종이 성경책이 더 낫다.
4. 카톡하다 문자하니 새롭다.

우린 죙일 모니터만 보는 인생들인데 뭐가 있다고 팝 모니터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가장 큰 복은 눈이 마땅히 봐야 할 것을 담게 되는 것이라는걸 놓쳤다. 끝도 없는 무한을 바라보는 것... 하늘조차 다 담지 못하는 눈이었는데 말씀이 육신되신 그 분이 담겨 주셨다는건 충격이 아니던가?

"너희가 보는 것을 보는 눈은 복이 있도다"
(누 10:23)

2015년 9월 29일 화요일

연휴 끝

길었던 연휴가 끝나고 내일은 본격적인 출근이다.
어떤 일들이 기다리는지 모르겠으나 하나님이 주신 이 노동에 감사할 뿐이다.

앞으로 또 공부하며 배워나가는데 귀한 밑거름이 되게 해주시리라 믿는다.
노동은 하나님께서 주신 축복의 선물이다.
이 곳에서도 하나님의 귀하신 섭리를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기를 소망한다.

2015년 9월 28일 월요일

시 썼다.

낙엽이 지기전에
                        지은이 : 배호성

서늘한 가을 바람에 나뭇잎이 마른다
다가온 계절을 입고 잎이 다 떨어지기 전에

내 한 걸음 그대에게 옮겨보리다
메마른 낙엽이 지기전에
메마른 낙엽이 지기전에

그때에 내가 다가 갔으면 더 좋았으련만
지금 떨어지는 낙엽만큼 내 걸음도 떨어지면 좋겠소

- 오랜만에 써봤다.

2015년 9월 25일 금요일

Potius sero quam numquam.

라틴 경구다.
"전혀 안하는 것 보다는 늦게라도 하는 것이 낫다."라는 뜻이다.

'전혀'(numquam=never)란 의미가 붙은걸로 보아 시간, 나이 개념의 상관없이 도전하라는 의미인 것 같아 보인다.

오늘날 현대는 고대와 달리 시간이나 나이를 굉장히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 같다. 상대적으로 여유가 많이 박탈 당해서인 듯 하다.

"모든것에는 때가 있다."라는 말도 틀린 것은 아니나 "전혀 안하는 것 보다는 늦게라도 하는 것이 낫다."라는 말이 더 와닿는다.
'시간을 아끼라'라는 의미도 담겨 있는듯도 하다.

그러나 지나갔더라도 지금이라도 하면 된다.
만학도면 어떤가? 지금부터라도 체력관리는 필수인듯 하다!

2015년 9월 22일 화요일

나사렛에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겠느냐?(요 1:46)

빌립이 전한 복음을 듣고 반응한 나다니엘의 냉소다.
이런 작은 촌구석에서 그런 위대한 존재가 어찌 나오겠느냐는 편견이 깔려있다.

당시 유대의 메시아관은 화려함과 웅장함이 덧칠해져 있었다. 그는 자연히 시대의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께서 찾아오셔서 믿음의 눈을 뜨게 해주시기 전까지는 말이다.

오늘날은 비판과 불만이 난무하는 시대다. 잘못된 것들 투성이지만 나다니엘과 같은 실수는 피해야 되지 않나 싶다. 자신의 교회가 작다고 위대한 직분자가 안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엄청난 신학적 위용과 해석을 자랑하는 신학교라고 해서 위대한 경건자를 잘 발굴해 내는 것도 아니다.
반대로 잘못된 대형교회라 할지라도 그안에 경건한 성도가 없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여기서 알 수 있는것은 예수님께서 그렇게 나타나셨듯이 오늘날 참된 경건자는 참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다. 탁월한 명성과 지위를 자랑하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묵묵히 자신의 자리에서 삶으로 그리스도만을 가리키는 그리스도인이 진짜일 수 있다.
그런자들은 특별히 주목받지 못한다.

나는 과연 그런 그리스도인인가?...
과연 나다니엘의 속내를 꿰뚫어 보셨던 예수님을 의지하는 수 밖에 없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신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그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요 1:47)

빌립과 나다니엘(요 1:43 - 51)

메시야.. 즉, 예수 그리스도를 눈앞에서 직접만난 빌립은 이것을 전하지 않고는 못베기는 상태가 된듯 하다. 그가 나다니엘을 찾아갔는지 어쩌다 마주쳤는지는 알 수 없지만 메시야가 오셨다고 즉각 알린다. 텍스트라 상황의 디테일은 알 수 없지만, 나는 빌립이 상당히 기쁨에 들떠 호들갑을 떨었던 것으로 생각한다. 빌립은 말그대로 은혜의 충만한 상태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에비해 나다니엘의 태도는 빌립의 행동이 이해가 안된다는 듯 침착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다음 그의 발언이 그 상황을 보여준다.

"나사렛에 무슨 선한것이 나겠느냐?"

미전하고 작은 촌 동네에서 그런 위대한 인물이 나올리가 있냐는 냉소적인 태도로 빌립의 입을 막았다. 왠지 빌립은 이곳으로 그리스도께서 걸어오고 있는데 침착한 나다니엘이 속터지게 답답했을 듯 하다. 나다니엘이 그런 모습이였던 것은 당대 퍼져있던 메시아관에 젖어있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에 가깝게 표현하면 잘못된 교리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고 해도 되겠다.

오늘날에도 여전히 하나님의 임재가 웅장하고 화려하며 임팩트가 있어 보이듯이 여기고 있는 모습들이 있다.

빌립은 자신의 혀로 나다니엘의 옷깃을 낚아챘다.
"와 보라"
마지못해 끌려나간 나다니엘에게 먼저 찾아오신 것은 그리스도셨다. 마치 빌립이 나다니엘을 데리러 갈 줄 아시고 나타난 것처럼 표현되 있는듯 하다.

맞다. 그리스도는 나다니엘을 미리 먼저 아셨기에 찾아오셨다. 그것은 48절에서 확실히 드러난다.
예수님은 나다니엘을 바라보며 다음과 같은 칭찬을 건내신다.

"보라 이는 참 이스라엘 사람이라 속에 간사한 것이 없도다." 나다니엘이 잘못된 교리의 영향을 따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수님께선 나다니엘을 선하다 하신다. 그는 이 말씀 이후에야 비로소 바른 믿음이 생겨났다. 그전까지 그는 외형만 바른 신앙인이였던 것으로 보인다.

예수님께서는 나다니엘을 의롭다 칭해주심과 그 중심을 꿰뚫어 보심으로 당신이 구속주이심을 여지없이 드러내셨다.
하나님은 늘 우리의 중심을 보고 계심을 보여준다. 나다니엘은 어린이와 같은 순전한 마음을 가진 인물이였다. 그는 하나님께로 부터 난 자이기 때문이다.(요 1:13) 이와 동시에 주어지는 교훈은 하나님께 감춰질 수 있는 것은 없으므로 경외하는 마음으로 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2015년 9월 20일 일요일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

참 어려운 실천이다.
때론 타인의 압제, 채찍질, 험담까지도 견디면서 실천해야되는 덕목이다. 그것이 교회 내부일지라도 말이다.

실천의 본질중의 본질을 우리는 자주 잊는다.
그래서 건강한 비판에도 사랑이 없을 수 있다. 사실 그런 경우가 더 많다.

반대로 사랑없이 행하는 일은 모두 무의미 함이다. 좋은 방향, 이상, 가치관, 교리, 신학을 제시하더라도 사랑이 없으면 무미건조 함이다.
그래서 인생의 풍부한 경험이 되려 해악이 될 때가 있다. 다양한 풍파를 겪으면서 터득한 요행수를 자칫 사랑으로 가장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바울은 믿음 소망 사랑중에 제일이 사랑이랬다.
믿음과 소망은 타락한 지상을 버텨나가도록 쥐어준 은혜의 수단이다. 그러나 사랑은 창세이전부터 존재하여, 만물이 창조되게 된 계기이자 이제로부터 영원토록 계속되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사랑은 시간과 공간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사랑이 무한인 것은 하나님 자신의 존재의 속성에 영향을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내가 사랑있다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성도가 어디 있을까? 아니면 타인 또는 교회를 향해 사랑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자격이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지성의 풍족함이 넘쳐나 회의로 빠져드는 이 시대에 가장 필요한건 '사랑'이다. 지성있는 곳에 비판이 시작된다. 사랑은 지성과 이성 모두에 영향을 미친다. 어느 한쪽만을 장악하는 불균형한 영향력이 아니다.

위대한 기적은 '방언'이나 '초자연적'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전인격적인 사랑으로 타락한 인간을 본래 창조된 목적대로 만들어 가시는 것이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사랑'이 넘쳐나는 사람으로 새창조 되는 과정이다.

다만 지상에서 성도에게 완벽한 사랑의 실천이란 없다. 우리는 여전히 배워나가는 중이고 성장해 가는 중이다. 타인이 사랑없다 비판해도 사랑해야만 한다. 모든 일에 사랑을 더해야 함은 사랑의 완벽한 표본이 그리스도시기 때문이다.

사랑없음

만인에게 사랑을 받을 수는 없다는건 알지만, 뒷얘기를 들었을 때 상처는 이루말할 수 없다.

내 자신에 대해서 반성을 많이하게 된다. 나 또한 턱힘이 강한 짐승중의 짐승이다. 원망의 아가리를 벌려 상대의 마음을 한입 베어무는 쾌감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마음의 살점을 한움쿰 뜯어야 만족을 한다.  상대가 의식하지 못하는 것일수록 그리고 떼로 덤빌수록 씹는 맛이 좋다.

여기까지 느끼게 됐다면 매우 위험한 상태다.

어제의 상처가 오늘의 고민으로 이어지며 내내 근심케 한다. 어찌보면 훌훌 털 수도 있지만 나의 행동으로 인해 타인이 상처를 입는것은 반성해야 한다.

나의 사랑없음을 봤다.
상대에 대한 호의도 내 욕심으로 비롯됐다는 것을 짚었다.

하나님의 사랑없이 진정한 사랑의 실천은 있을 수 없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한 바울의 권면이 생각을 스친다.

2015년 9월 18일 금요일

대가(大家)

오늘 정말 진정한 대가를 만났다. 지긋하게 나이가 드셨음에도 경건을 향한 열망만큼은 젊은이 못지 않아 보이셨다. 천재임이 분명함에도 영화나 다큐멘터리에서 봤던 천재들이 보여지는 남다른 특징들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었다.
난 사실 누군가를 만나기전에 내가 만나서 겪어보지 않으면 다른 사람이 내릴 평가를 반사적으로 뒤로 배제시키는 편이다.(책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이 분은 달랐다. 주변분들의 얘기대로 신학을 중심으로 다양한 학문을 통합적으로 사고하여 결론을 도출해 내는 그 힘의 원동력은 '경건'이라는 것을 삶으로 보여주시는 분이였다. 세상에 이런 대가(大家)가 한국에 있구나 싶으면서도 재야속에 계시다는게 참 알 수 없는 하나님의 오묘하신 섭리다.
...
그래서 이 분에게 수학하신 한분이 언급하셨던 것 처럼 오늘날 진정한 경건자는 주목받지 못한다는 말이 어떤 뜻인지 이해가 됐다.
어제와 오늘의 생각과 의견들을 글로 정리하면서 정말 깊은 고민을 하게 된다. 강의는 어려웠지만 참 따듯했다. 생각에 충격을 주는 사람들을 만나는 것은 정말 기쁜일이다.
하지만 이분이 주신 충격은 번개망치가 머리를 한대 후리는 것이 아닌 마음과 지성에 잔잔한 파문처럼 오래도록 퍼지며 다가왔음이다.

(김영규 교수님 강의를 듣고 난 후...)

테스

강바람이 테스의 머리칼을 빗겨준다...

이렇게 보니 애잔하다.
테스는 경직된 국교회의 규율과 사람들의 욕망이 대립됐던 시기에 쓰여졌다. 당시 그 사이에 서 있던 여성들은 늘 희생당하기 일수였다.

저자 하디는 사회속에서 고통받는 인간의 인생을 보며 작가적 책임감을 갖고 이 소설을 썼다.
하디는 기독교에 냉소적인 작가였다. 오늘날에도 테스를 통해 기독교에 던지는 메시지는 유효하다.

그는 정통을 잃어버리면서 형식화 되어버린 신앙은 무미건조 하다는걸 꼬집는다. 그리고 경건을 버리고 욕망을 탐한 인간이 얼마나 경망스러운지를 테스의 상처를 통해 고발한다. 이 시기의 영국이 오늘날 한국교회의 상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2015년 9월 17일 목요일

양화진을 산책했다.

날씨도 좋아서 사색과 독서를 즐기러 방문했다.
마침 오늘 양화진 선교사 묘 창립 10주년이라 음악회를 연다고 한다.

공연을 볼 수 없지만 리허설을 들을 수 있는 호사를 누리는 중이다. 강바람을 타고 귓가로 넘어오는 현울림이 참 곱다.

덩달아 책도 술술 넘어간다.

2015년 9월 16일 수요일

설교는 교회의 공유 재산이다.

어거스틴의 말이다. 2000년전부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하나님께서 교회안에 세웠던 설교자들의 설교는 시대를 초월하여 효력이 여전하단 의미기도 하겠다.

현대는 많은 이들이 과거의 설교를 구시대적 유물로 간주하여 버리는 시대다.

그러나 현재 이런 구시대적 가치들 속에 담겨있는 강한 생명력을 알기에 답습하고 공부하며, 현대적 방법론을 고민하는 목사님들은 소수시다.
그렇게 연마하며 강단에서 설교를 하는 설교자를 눈앞에서 보고 있다는 것은 복이다.

비록 구술력이 안돼거나 말씀의 표현이 풍부하지 않더라도 괜찮다. 영혼의 맥락을 읽어내며 진리로 이성과 가슴을 동시에 후려치시는 주체는 성령님이시기 때문이다.

물론 스피치에 대한 노력을 안해야 되는 것은 아니지만, 어거스틴의 맥락은 그 이면에 임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본 것이 틀림없다.

유구한 정통의 가치는 현대에서도 쇄함이 없다.
왜냐면 선배들도 같은 말씀을 붙들고 받은 은혜로 진리의 광석을 캤기 때문이다.
다만 이런 설교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은 우리의 영적 상태에 적신호가 켜져있다는 것일지 모르겠다. 시대의 분위기에 휩쓸려 옛것으로 치부해버리는 모습 말이다. 대부분 "아 그래! 뭔 말인지는 알겠어? 근데~" 이런 반응을 나타낸다.

모든것을 말하고 싶어하는 현대의 이지적인 세대들의 특징이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선배들을 통해 물려주신 공공자산을 유물정도로만 취급하고 있다. 역사신학과 조직신학이 하대 되는 것은 이런 분위기에서 비롯되는 것 같다.
현대의 청년들은 좀 더 마음에 닿으면서도 뭔가 현실생활에 답을 추구하려는 분위기다.

의식있는 교회에서 스스로 들을 생각과 공부하여 적용할 생각은 안하고 받아 먹으려고만 하는 분위기가 지속되고 있다. 아무래도 영적기아가 오랫동안 지속됐기 때문이란 생각도 있다.

교회의 공유재산은 이럴때를 위해 사용하라고 남긴 유산이다. 이런 위태로운 날을 위해 남겨져 있는 것이다. 아직 우리가 누릴 수 있다는 것은 은혜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의 말처럼 더이상 '그리스도에 대한 글'들을 읽을 수도 들을 수도 없는 날이 다가오고 있다.

매 기도회와 주일예배 때 설교를 답습하지 못한 내 모습이 부끄럽다.

지금이 공부할 때다......

고객님 축하드립니다.

진한 다크모카 한잔 하려고 계산을 기다리는데
앞에 손님이 문제가 생긴듯 했다.
시간이 걸리다 옆 계산대에서 결제하는데 이런...
컴퓨터가 버벅댄단다. 뭐 그럴 수 있지 하며 생각에 잠겨있는데 점원분이 갑자기 내게 "고객님 하이파이브!"외치신다.

동공이 안드로메다의 차원을 반쯤 바라보고 있던 나는  반사적이지만 맥없는 하이파이브를 했다.
음? 정신 차리고 보니 무료음료쿠폰에 당첨됐단다. 점원은 엄청 신나하시는데 나는 반응이 침착했다. 사실 받는건 기쁘지만 그에 비례한 표현하는게 어색하다. 이럴땐 나도 전형적인 한국남자구나 싶다.

"오! 그래요?~"라고 해줄걸 그랬다. 타인의 당첨에 기뻐하기 쉽지 않은데 서비스 정신이 좋으시다. 당첨 자랑질 해봤다.ㅎㅎㅎ

2015년 9월 13일 일요일

마음이 상했을 때

여호와는 마음이 상한 자에게 가까이 하시고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구원하시는도다(시 34:18)

죄에 대한 깊은 슬픔이 느껴졌을 때 내 자신이 영원한 사망에 처해 있는 것을 깨달은 사람은 복이있다. 우리들 현실속에서 찾아오는 여러형태의 고난들이 그런상태로 만들 수 있고 말씀을 통해서 알게 될 수도 있다.

허나 머리로만 깨달았다면 온전하지 못한 상태다.
시편기자는 중심에 통회하는 자를 여호와께서 구원하신다고 한다.

'안다'는 것은 이성에 적용되어 결부시킬 때가 많다. 죄를 알았다는 것이 단순히 그 상황에서 이성적 판단으로 끝난다면 개인의 실리와 직결될 확률이 높다.

단순 '내게' 안좋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다.
남에게 피해를 안주는 것 또한 '내가'어떠한 불이익을 받지 않기 위함이다.
하지만 중심에 통회하는 자는 머리로만 깨달은 통회와는 다른 것 같다. 우선은 하나님께서 먼저 그와 가까이 하셨다.

그는 어떠한 계기로 자신의 마음이 상했다.
그 상함은 무거운 짐 같이 감당할 수가 없으며, 상처가 썪어 악취가 나고 통증이 심하며 심히 구부러지는 것 이상의 처절함이다.(시 38:4~6)

단순 육신의 고통을 넘어선 초월적인 고통의 차원이다. 하나님의 진노를 격감한 자들의 상태다. 율법의 정죄함에서 벗어날 수 없어 괴로운   외침이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자신을 드러내사 그 괴로움을 알게하시고 상한자들을 부르짖게 하신다.

하나님께서는 그런자들의 외침을 들으신덴다.
그리고 그들을 구원하신다고 한다.
이런 의인들은 고난이 많지만 하나님께서 그 모든 고난에서 건져내신다.(시 19:19)

시편기자는 험난한 상황가운데에서도 하나님께 위로를 얻었다. 원수가 목전에서 생명을 위협하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부르짖었다.

현실은 투쟁의 연속이라는 것을 잘 알았을 것이다.
그럼에도 결국 건져내실 뿐은 하나님이시라는 걸 알았다. 이스라엘의 국왕이란 직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다.

육신은 그들이 해할지 몰라도 영혼만큼은 털끝 하나 못데리라는 것을 알았다.
왜냐하면 구속하신분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

오늘날 현대에는 마음이 상할일이 허다한 것 같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 외에 어떤 다른 것들로 위안을 얻으려 하는 모습을 많이 보게된다.
현실의 고통속에서 하나님이 "직업을 주는것은 아니잖느냐?", "돈을 주는 것은 아니잖느냐?" 따지는 경우들이 많다.

직업을 갖고 노동을 하는 것은 우리의 몫이라는걸 모르고들 살아간다. 우리의 몫이긴 하지만 신자의 활동은 엄밀하게는 하나님의 작정속에 포함되어있다. 열심히 사는게 답이지만 늘 주위에서는 '인정'이라는 것이 없다.
믿음의 분량에 따라 삶의 일부를 포기하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으로 비춰지기도 하거니와 반대로 그것을 '하나님의 뜻'으로 착각한 무모한 선택일 수 있음을 배제할 수 없다.

다만 여기서 말할 수 있는건 현실속의 신자의 삶은 고독할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동행하여 세상속을 걸어간다는건 치열한 전장을 외로움과 동반하여 누비는 것과 같다. 전투에서 입은 상처는 뼈를 깎는 극심한 고통을 동반한다.
중앙 기수의 신호와 나팔소리를 들으며 전술대로 움직여야하는데 통증과 치열한 전장의 마찰음 때문에 청력이 둔해진다. 나부러져 가는 전우들의 시체는 패닉을 동반한다.

결국 남는건 절규에 가까운 도와달라는 외침밖에 없다. 이건 머리로 알은 외침이 아니다. 죄의 비참함을 아는 영혼의 단말마다. 정녕 이렇게 외쳐보았는지나 모르겠다. 그러나 인생을 먼저 살았던 시편기자는 그럴수록 하나님을 부르짗으라 권면한다.

"의인이 외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저희의 모든 환난에서 건지셨도다." (시 34:17)

2015년 9월 11일 금요일

오랜만의 회동

교회의 친한 동기들과 오랜만에 모임을 가졌다.
각자가 가지고 있는 고민과 아픔을 나누는 좋은 시간이였다.

그러나 대화에 있어서 신중함이 결여되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상대의 아픔을 공유하면서도 제3~4자의 얘기가 엮었을 때 그사람들의 입장도 이해를 해야한다.

오늘 그런모습이 결여된건 아닌지 점검해본다.
두세사람이 모인곳에 그리스도께서 계신다 했는데 그것을 의식했는지도 점검해 본다.

모임의 대화에서도 경건의 태도를 잃지 않아야 함을 다시 상기해본다.

2015년 9월 9일 수요일

사유의 창

사유는 늘 열려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 안에 진리가 있느냐 없느냐는 중요한 문제겠다.
창 너머에 보이는 진리의 형상은 같으나(진리가 있다는 전제하에), 어떤 풍경안에 있느냐에 따라 다양하게 보여진다.
서로의 사유속에서 배워가는 것들이란 그런것들일 것이다. 창안 풍경속에 담겨있는 진리의 형상이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를 말이다.

그렇듯 사유가 깊은 사람들일수록 창 너머에 배울것들이 참 많다. 하지만 사유가 발생하는 사람들에게서도 배울것이 많다는 걸 우리는 종종 잊는다.

우리는 이제 그 창을 활짝 열고 진리의 형상이 어떻게 빛나고 있는지를 바라볼 때다.
다만 그 창문은 안에서 여는것이 아닌 밖에서 부터 열어지는 것이다. 진리가 우리의 창을 열때 비로소 나와 상대가 보이게 된다.

2015년 9월 8일 화요일

대가들의 글

대가들일 수록 한문장에 많은 의미를 함축한다.
그 문장 만으로도 많은 것들이 가슴에 와닿는다.
그에비해 나는 문장들이 매우길다. 아직도 배울것이 많다는 기쁨과 겸손하지 못하구나라는 부끄러움이 교차한다.

인식에 대하여

인식이란 매우 중요한 것이다. 인간이 삶을 영위하는데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만일 보고 듣고 느끼고 맛보는 것 가운데 하나라도 결여되어 있다면 우리는 살기가 힘들 것이다.

물론 인체는 신비하여 하나의 감각을 잃으면 다른 감각이 초월적으로 발달하는 특성을 가졌다.
인식의 장애를 겪고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섭리의 특권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인간은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낄 수 있는 상태로 창조됐다.
이 기능들은 기본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을 온전히 인식할 수 있도록 쥐어주신 특권이였다.
그러므로 인식은 대단한 축복이였다. 최최의 인류가 범죄하여 그 기능을 잃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는 죄가 발단이 되어 인식 기능에 심각한 장애를 입게 되었다. 마땅히 보고 들어야 할 것을 누리지 못하며, 맛보지도 느끼지도 못하게 된 것이다.

무슨 말도 안돼는 소리냐며 반론을 할 수도 있겠다. 나는 여전히 인식기능이 잘 발휘 되고 있다며 말이다. 우리의 인식은 사실 육체적인 것에만 머무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을 뛰어넘는 영적인 인식에 이르는 것이 궁극적인 안착지이다.

다만 인간 스스로는 그러한 인식에 도달할 수 없다는 비참한 현실이다. 대부분의 종교들은 그러한 것들을 깨기위해 다양한 수단들을 동원한다. 가장 초월적인 인식에 다다르는 탁월한 수단으로 그들은 '고행'을 택한다.

극심한 고통을 견디다 그것이 둔감해 질 때 오는 평온함을 초월적인 인식으로 착각하는 오류를 범한다.

그러나 기독교의 인식은 이러한 것들과는 차원을 달리한다. 진정한 인식은 내부로 부터가 아니라 외부로 부터 쥐어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믿음'으로 부터 쥐어쥐며 전달하는 주체는 삼위하나님 자신으로 부터 시작된다.

다른 종교들의 인식과는 전혀 다른 유일무이한 방식이다. 세상의 인식은 내면을 중시하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주체가 '나'이기 때문이다.

반대로 기독교의 인식은 '그리스도'로 부터 시작된다. 창조된 모든 것들은 그로 부터 말미암았으며, 그것들을 인식하도록 부여시키셨다. 피조물로부터 자신을 바라보도록 말이다. 그것은 간접적이면서도 직접적인 것이였다.

피조물을 통해서도 자신을 드러내시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도 우리를 만나주시기도 했기 때문이다. 영적인 만남을 통해서 말이다.

타락이후 망가진 인식은 그리스도로 인해 회복되었다. 인식기능이 망가진 인간은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게 됐다.

방향을 잃은 맹인에게 안내자가 찾아오듯 그리스도께서 다가 오셨다. 인식의 회복은 그때부터 시작됐다.

예수께서는 자신을 보여주시고 느끼게 해주시고 맛보게도 해주신다. 음성을 들려주셔서 우리가 어디로 방향을 틀어야 할지를 인식시켜 주신다.
이 모든 것들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담겨있다.

예배, 성례, 교제 어느것 하나 인식과 결여되는 것이 없다. 진정한 인식의 회복은 사물과 현상에 대한 태도도 달리하게 만든다.
몸된 교회가 됐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통하여 보고 듣고 맛보고 느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머리가 되셨다는 것을 성령을 통해 인식됐기 때문이다.

그것이 가능케 되는 것은 '믿음' 때문이다. 믿음의 본질은 '내'가 아니며 하나님 자신이 되신다.
그렇기 때문에 온전한 인식이 가능한 것이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라 했다.
보이지는 않지만 우리는 보고 있는 것이며 그것은 실제적인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인식이다.

우리의 눈이 현실을 바라보고 있지만 모든것은 쇠하여 없어진다. 육신의 눈도 세월이 지나면서 점점 그 기능을 잃게 된다. 다른 감각기관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영적인 인식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스스로 우리 인식의 출발점이 되어주시기 때문이다. 훗날 우리가 새육신을 얻어 영원히 감각하게 될 그날을 고대하게 되는 이유는 바로 거기에 있다.

2015년 9월 3일 목요일

확신 없는 믿음도 적절한 믿음일 수 있다.

왜냐면 '하나님의 선택 은혜, 그리고 계획의 불변성'이 믿음의 대상이기 때문이다. 토마스 굿윈이 자신의 저서 믿음의 본질에 정리해 놓은 내용이다. 어렵고 딱딱해 보일 수 있는 책인데 이런 따듯한 말들으 마구 튀어나온다. 연약해 지려다가도 자꾸 호되게 파이팅을 복돋게 만든다.

하지만 오늘날 믿음에 관한 견해에서 지나친 확신으로 방종에 이르는 이단적 성향과 믿음이 없다고 정죄하는 정 반대의 경우들이 팽배한 것 같다.(사실 두부류가 절묘하게 한쌍을 이루지 않나 싶다.) 오히려 개혁주의라 부르짗는 곳에서도 확신없는 성도들을 향해 채찍질 비슷하게 가하는 것을 보게된다.

하지만 17C 정통신학의 대가라 불리우는 이 선배는 그렇게 표현하지를 않았다. 두가지로 나타날 수 있지만 확신이 없다고 해서 이 사람이 구원받지 못한 성도라 볼 수 없다.
오히려 그 흔들리는 마음가운데 하나님께서 인도하시는 바에 대한 반응들이 자신도 모르게 나타날 수 있다고 제시한다. 하나님이 하시면 못하실 일이 없다. 이것을 지극히 작은 것에서 무한히 더 큰 것으로의 추론이라 굿윈은 표현했다. 참...멋있다.

연약한 믿음을 가진자가 보이는 "혹시 하나님이 원하신다면"이라는 작은 소망이 타인이 보기에 경멸스럽고 허약해 보일지라도, 그 보이는 소망에 의해 하나님께서 영혼에게 역사하실 때 "하나님의 약한 것이 사람의 가장 강력한 것보다 강하다."란 표현에는 반박할 수 없을 것이다. 하나님의 속성과 작정을 생각한다면 말이다.

『"하나님은 실 한가닥으로도 강력한 고래를 해변으로 끌어다 놓으실 수 있고 가장 맹렬한 폭풍 가운데 있는 배를 실한가닥으로 이끄실 수 있다."』 - 토마스 굿윈

연약한 믿음을 가졌어도 충분히 하나님과 그리스도께 나올 수는 있다. 이미 하나님께서 약속한 성도들에게는 문을 열어두셨기 때문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 7:37)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에게 안식을 주리라....."(마 11:28~29)
목마른자, 짐진자 모두 처음에는 확신없는 믿음들이라고 볼 수 있을것 같다. 확신이 없기 때문에 목마른 것이다.

영혼이 믿음을 갖는 유일한 목적은 구원받기 위해서다. 믿음을 요구하는 하나님의 의지 및 의도는 믿는 자가 구원받도록 하기 위함이다.(요6장)
다만 굿윈은 많은 성도들이 연약한 믿음에서 부터 시작했다고 증언한다. 이미 삶에서 보이는 것들이다. 다만 이것들이 모두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는 점이다. 또한 하나님께로 부터 믿음을 받은 택자라면 반드시 "믿음에 대한 요구"가 뒤따른 다는 것이다. 이 믿음에 대한 요구가 바로 "의지의 행위"인 '순종'이다.

그리하여 순종은 순전히 우리의 것이 되지만 공로는 오직 그리스도의 것이다. 그러므로 신앙이 생긴 20대 중반무렵 제자훈련 때 배운 하나님의 열심 100 + 나의 열심100 합쳐서 100이라는 말은 이제 더는 동의하기가 힘들게 됐다......

삶에대한 고민과 사색

삶은 늘 투쟁이란 말이있다.
인간이 성공을 갈망하는 것, 친구를 사귀는 것, 학업능력일 향상시키는 것 모두 어찌보면 궁극적으로 생존을 위한 길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탐욕들이 있으며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향으로 흐를때가 많다.
즐거움 자체가 나에대한 인식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이 얼마나 무서운 얘기인가?
우리는 우리도 모르게 죄에 빠져드는 나약한 존재라는 것이다.

안락한 집과 부유한 자산 그리고 주위에 영향력 있는 사람들을 모았을 때 사람들은 그제서야 안락함을 느낀다.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다시 불안감을 느끼고 더욱 확장을 시도한다.
이런것들을 한순간 모두 잃었을 때 자아의 파멸이 찾아 온다는 것을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시대마다 태어난 고전문학들도 이를 대변한다.

항상 평균으로의 회귀를 위해 인간은 투쟁한다. '삶'의 투쟁이란 표현이 얼마나 멋져보이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인간의 죄로인해 발생한 결과들이라면 멋져보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은 늘 자신이 죄인이라는 것을 부정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를 죄인이라 가리키고 있다. 우리가 죄인이라 인식함도 하나님이 주신 복이다. 조명하시지 않았다면 결코 알 수 없었으리라....
그러나 나의 마음 한가운데는 석연치 않은 양심의 고통이 있다.
어쩌면 아직 회심하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혹은 회심의 기간이라 생각한다.
여전히 죄악가운데 고통을 받고 힘들어 하는 모습들이 있다.

지옥이라는 두려움과 죄의 책임으로만 가득차 연기를 하고 있는건지도 모른다.
하나님이 나에게 찾아왔다난 것은 큰 기쁨이다. '믿음'이 얼마나 큰 행복을 가져다주는지, 그것이 죄와 싸울 수 있도록 얼마나 많은 힘을 우리에게 선사하는지 인식하지 못하는 것은 불행이다. 성령님께서 믿음을 사용하시는데 능히 못하실 일이 무엇이 있으랴?

오늘도 마음이 무겁다. 죄인중에 괴수라는 그 말이 내가 감히 입에 담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것은 진실로 성령님께서 추악한 죄인의 모습을 들춰냈을 때만 고백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신앙의 대선배인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보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었지만 한편으로 나는 왜 그런모습이 나타나지 않을까 고민할 때가 있다. 어찌보면 나는 아직도 하나님께서 주신 '믿음'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있다거나... 거짓으로 회심했을 가능성이 내안에 잠재하고 있다는 것을 덮어두었는지 모른다.

그저 신학적 지식으로만 포만감을 느끼는 것은 아닌가?
순종으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아무것도 아닌 지식임을 알면서도 멈춰있는 내 모습을 본다.

주님..나를 돌이키소서... 은혜의 기쁨을 내가 누리게 하소서.
죄와 싸울 힘을 내게 허락 하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