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0월 28일 수요일

전장

[전장 - Battle Field]

노동은 은혜의 현장인 반면 영혼의 단말마가 퍼지기도 하는 전장이다. 전장과 '은혜의 현장'간 공통점이 있다면 시시각각 언제 변화가 일어날지 예측할 수 없슴이다.
전장에서는 아무리 치밀한 계획과 전술로 무장한 지략가라도 한순간에 일망타진 당할 수 있다.
그래서 "방심은 금물"이라는 말이 잘 어울리는 곳이다. 때론 수시로 목숨을 걸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다. 등뒤에 강을 두고 가장 중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는 '광포함'을 지녀야 하는 것이다.

인간이 노동을 하는 근본적 이유는 전장과 마찬가지로 생사에 초점을 두고 있다. 매슬로의 5단계 욕구중 최상위 영역도 기초적인 것이 채워지지 않으면 도달 할 수 없는 부분이다.
매슬로는 인간이 인간다움을 느끼게 되는 장소를 '자아실현'에 뒀다. 그러나 그 단계 사이사이가 치열한 전투의 현장이란 것을 고려했는지는 모르겠다.

반대로 기독인들은 노동의 현실이 전장이라는 것은 알고 있지만 그곳이 은혜의 현장이라는 것을 인지해야 한다. 말씀이 최적으로 적용되어질 수 있는 풍부한 은혜의 터다. "은혜는 한겨울에 자란다."고 말한 사무엘 러더포드의 명언은 이 노동현장에서 최선으로 발현된다 생각한다.

다만 청년들 대다수가 교회에서 배우는 가르침과 노동현장에서의 적용을 동떨어지게 느끼고 있다는 것이다. 대다수 한국교회들이 복음에서 빗나간 어리석은 행보도 두둑히 한 몫 했다.
그 결과 바른 작은교회가 교리교육과 그 실천에 힘쓰더라도 벅찰 수 밖에 없다.
이미 중병이상의 상태라 손이 많이 가는 것이다.

교회의 윤리적 역할이 미비해지자 의식있는 청년들은 교회의 사회참여를 부르짖는다.
심하게는 신학자 및 목회자들을 비판하기도 한다. 아쉬운 점은 이들도 신학적 역량은 미비함에도 불구하고 편협적인 사고 방식으로 주위를 판단한다는 것이다.

전투는 승리를 바라봐야지 광포함(BERSERK)을 뒤집어 써서는 안된다. 의의 전쟁이라 포장을 한 십자군 전쟁도 결국엔 탐욕을 위해 광포함을 뒤집어 쓴 모습이였다.

우리는 거룩한 전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왕은 그리스도시고 우리는 그분의 군사다.
이미 승기를 거머쥔 전세 가운데 있는 것이다.

수세에 몰린 호적은 그야말로 몰살의 위기에 있기에 발악을 하는 것이다. 아직은 적들의 저항으로 인한 전투로 인해 부상과 치명상을 당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의 승리가 확실하다는 것을 믿는다면 광포보단 용기를 가지고 부딫히자!

우리 구주께서 친히 앞장서서 싸워 이기셨다는 것을 잊지말도록 하자!

2015년 10월 22일 목요일

책임 강박증

핸드폰이 꺼져있는 바람에 오늘 늦잠을 잤다.
출근준비중에 죄인중의 괴수인 내 모습을 봤다.
아..나도 한 예민한다는게 받아들여지는 중이다.

2015년 10월 19일 월요일

알 수 없다.

야근은 누구나가 지쳐하는 일이다.
누군들 일을 일찍 끝내놓고 쉬고 싶지 않겠는가?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동료들과 분투끝에 금일의 넘치는 일을 정리했다.

노동은 은혜인것이 맞고 참 감사한 일이지만 육신이 고된건 피할길이 없다. 그래도 감사히 일할 수 있는게 기쁨인건 맞다.

그러나 알 수 없는 곳에서 하나님의 일하심을 발견하는건 앞에 있던 고단함을 날려버릴 정도다. 육신의 피로가 가신것은 아니지만 그것 이상의 은혜가 넘친다. 오늘 그것을 경험했다.

같은 부서 대리님께서 야근후 식사중에 조심히 입을 떼셨다. "호성씨 교회가 어디에요? 저 사실 기독교신자인데 방황을 그치고 마음 둘 곳이 필요합니다..."

뜻밖의 전도기회가 찾아 왔다는 기분이다...
"내뜻인가 하나님의 뜻인가"를 분별함은 당연히 필요하지만, 한영혼을 하나님이 어떻게 이끄실지는 내가 판단할 일이 아니라 생각한다...

대리님께서 신자인지는 오늘 처음 알았다.
근무하다 내가 신자인걸 아시고는 묘하셨다고 한다.

기도와 묵상이 필요함과 동시에 복음을 전하는데 진실된 사랑을 동반시켜주시기를 소망한다.
오늘 업무와 야근으로 뭉친 침체? 당연 한방에 날아갔다!

"구원은 여호와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셀라)" (시 3:8)

2015년 10월 12일 월요일

침체

한 개인영혼의 침체는 그 사람의 신앙에도 큰 위협을 가하지만 공동체의 질병이기도 한 것 같다.
반대로 한 사람의 경건은 공동체에게 생명을 공급하는 윤활제와도 같다.

그러나 교회의 영원한 생명과 힘은 그리스도다.
개인이 침체여도 그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으며,
한 사람의 경건 또한 그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곧 종교개혁일 기념하는 날이 다가온다. 침체된 중세교회를 개혁한 선배들의 분투와 노고가 기억되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들이 무엇때문에 그랬는가에 의미를 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적인 의미에서도 무엇인지를 생각해봐야 할 것이다. 오늘날 교회는 침체에 더 가깝다. 종교개혁이 이뤄냈던 진보보다 더 퇴색된 신학과 신앙으로 얼룩져 있다.

보수와 진보진영으로 나뉘어 '신학'을 하나님의 주권적 사랑이 주는 즐거움과 삶의 원천으로 여기지 않는 것 같다. 되려 이데올로기화 시켜 잘못된 방향으로 곤두박질 치고 있는 것은 아닌가 돌아본다.

하지만 인간이 이것을 어떻게 변질시켰던지 간에 신학 그 자체가 지니는 본질은 건드릴 수 없다.
그것을 어떤 형태의 이론화를 시켰던 '그리스도' 그 자체의 신학은 영원, 무한, 불변이다.

삼위하나님의 속성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주 제1의 신학자가 예수님이라는 것을 가르키고 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삼위하나님에 대해 배울 수 있다.
어떤 대상과 본질에 대한 깊이있는 이해도 제 이위이신 그리스도를 통해 삼위하나님으로 소급되지 않는다면 외곡된 해석으로 이어진다.

하나님에 대한 잘못된 이해는 위기의 신앙이면서 침체로 이어지는 지름길이다.
현대는 각박하지만 우리는 종교개혁의 선배들이 어떻게 그 침체의 시기에서 저항할 수 있었는지 배워야 한다.

오직 성경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재조명하고
그리스도의 말씀인 성경을 통하여 모든것을 다시바라봐야 한다.

진리의 영이신 성령께서 음침한 침제의 그늘에 강력한 조명을 비춰주시기를 소망한다......

2015년 10월 8일 목요일

하나님의 가장 약하심이 인간의 가장 강력함보다 더 강하다.

인간의 유한성과 하나님의 무한성이 대조되는 표현이다. 이런 주옥 같았던 신앙선배들의 표현들이 오늘날에는 왠지 고리타분하게 받아들여 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그러나 작은 은혜의 방편이라도 하나님이 쓰시면 크게 사용되는 것은 성경이 늘 증명하고 있다.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도 그 증거중 하나다.

"그 성읍의 많은 사마리아인들이 내가 이제까지 행한 모든 것을 그분께서 내게 말씀해 주셨다, 한 그 여자의 증거로 인하여 주님을 믿으니"
(요 4:39 KJV)

진정 아무것도 아니었던 사마리아 촌의 창녀였던 여자가 복음을 전하는 통로로써 사용된다.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에 복음을 전하기 위해 우물가의 이 여인을 만나러 가셨다.

세상적인 시각으로는 정녕 이 여자는 힘 없는 약자였다. 남편이 하도 바뀌어 세간의 손가락질을 받기에 손색없는 무가치한 존재였다.

이런 여인과 예수님께서 말을 섞는다는 것은 약점을 만들어 내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제자들이 보기에도 그것이 이상하게 여겨졌으니 말이다.(요 4:27) - 당시 유대법상 사마리아인과 말섞는게 금지되어 있었다. -

하지만 기이하게도 제자들이 무슨 얘기를 나눴냐고 묻는바가 없었다.
그들 마음속에는 이미 깊이 있게 예수님을 공경하는 마음이 자리잡았기 때문에 함부로 물을수가 없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이라면야' 라는 생각이 시작된 것 같아 보인다.

하나님의 섭리대로 사마리아 여인은 자신의 마을에 복음을 전했고 성읍의 많은 백성들이 그리스도께로 모여들었다. 마치 지극히 작은 점에서 시작되어 면으로 확장되듯이 말이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과 관계됐다는건 어찌보면 당시 예수님의 적(?)들에게 꼬투리가 잡힐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런 연약하고 작은자를 쓰셔서 이뤄낸 결과들을 보라......

"하나님의 가장 약하심이 인간의 가장 강력한 것 보다 더 강하다"란 표현을 뱉을 수 밖에 없다.

2015년 10월 4일 일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를 향한 신학적 도전들

1. 로드파의 공동 기도서와 교회법(국교회)

2. 알미니우스의 영향을 받은 아미랄드 파의 가정적 보편구원론

3. 반율법주의(antinomianism)

고백서의 신학적 체계가 견고해 질 수 밖에 없는 원인으로 보여진다.

그 견고함의 중심에는 "성경 본문에 대한 장기적인 고찰에 의해서 발전되고 강화됐는데, 성경 석의(exegesis)가 그들의 사역의 중심에 있었기 때문이다." - 리처드 멀러 인용

그것은 또한 교부들 이래로 석의의 역사와의 광범위한 친밀성에 의해서 특징지어졌다.

예정론에 있어서 후택과 전택을 둘다 허용한것은 성경적으로도 큰 문제가 없을 뿐더러 칼빈주의적 일치를 고려한 결과로 보여진다.

덕분에 신학의 방어체계는 치밀해지게 된 것으로 보인다.

- 로버트. A. 레담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역사에서 발췌.

17C 당시 총회를 향한 신학적 도전들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가해지고 있는 것들이라 보여진다. 세기와 단체명만 바뀌었을뿐 그 근원은 같은 맥락이라 여겨진다. 우리는 선배들의 발자취를 통해 현대 교회에 닥쳐오는 위기들에 대한 대비와 예방을 동시에 갖출 수 있다.

총회가 치밀한 신학 방어체계가 갖춰지게된 필수요소는 이 두가지라 생각된다.

1. 성경본문에 대한 장기적인 고찰이 동반된 성경 석의(exgesis)

2. 교부들 이래로 석의의 역사에 관한 광범위한 친밀성

이 두가지다. 이것을 통해 알 수 있는건 총회는 결코 초대교회의 전통을 잃어버리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동시에 성경본문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말씀이라는 것은 가장 상위에 두었다. 선배들은 전통적으로 이어내려오는 이 두가지 원칙을 고수했다.

성경을 "norma normans(규범하는 규범)" , 교리는 "norman normata(규범된 규범)"으로 말이다.

오늘 주일예배 설교말씀(마 28:18 ~ 20)을 다시 생각해보며 위의 자료를 찾아 정리했다. 과거나 지금이나 교회가 처한 위기의 본질은 똑같았다.

우리 교회가 교육을 강화하는 이유도 17C의 상황과 현대가 다를 바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교역자분들과 성도분들이 인지하셨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교회가 성경과 신학을 가르키기를 잃었다는건 곧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외면하고 진리를 왜곡시키겠다는 말과 같다. 교회를 향한 신학적 도전들은 날이갈수록 예리해지고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세우신 교회들을 통해 세워놓은 견고한 신학적 방어체계인 '교리'가 있다.
이것들은 반드시 그리스도인이 되기 위해서는 없어선 안 될 필수적인 은혜의 수단들이다.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마 28 :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