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11월 30일 월요일
추억의 조각
신자로써 세월은 아무의미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죄인이기에 유한을 느낀다.
남은 한달 가만히 생각에 잠기며 머릿속의 추억을 되돌려보고는 한다.
그래서 퇴근 후 동네를 산책하면서 어린시절부터 걸었던 그 길들을 유난히 많이 걷게 되는 것 같다. 어찌보면 연약한 나의 미련 같다가도 아련함에 손을 대려는 모습들도 언뜻 보게 된다.
추억의 조각에 베일 수 있다는 것을 본다. 지나간 과거는 잊으라는 말들이 있으나 뜻대로 안되는 부분도 있는 것 같다. '가슴에 묻는다'라는 말이 어떤 의미인지 알 것 같다.
우스운건 왜 시간을 더 뒤로 돌아가서 보게 된 걸까? 지나간 시간들과 오늘날의 모습들을 맞춰보며 참 내가 본 눈이 다르지 않았구나 싶기도 했다. 하지만 그 간격이 메꾼건 '다름'과 '차이' 그리고 '변화'임에도 느껴지는 자성은 무엇인가 싶다.
미약한 끌림에도 흔들리는 마음을 본다. 어리석다 한탄하면서도 또다시 고등학생 시절처럼 미적지근한 노래들을 들으면서 감성에 빠져버린다. 그 조각 움켜질수록 패이고 아플텐데 바보같게도 놓지를 않는다.
기도한다. 이 미련한 죄인 그런 감정에서 벗어나게 해달라고...
반대로 고백하기도 한다. 이 죄인... 그곳이 좋다고... 어쩌면 좋냐고....
말씀과 떨어질 수 없다. 과거와는 결별해야 한다. 되새기고 또 되새기면서도 이 추억의 조각 아픔을 지닌채 꼭꼭 움켜쥐고 있는 내 모습이 참 한심했다.
"사람이 자기 가슴에 불을 품었는데 옷이 타지 않게 할 수 있겠느냐?"(잠 6:27)
2015년 11월 24일 화요일
돌아보다.
직장생활을 다시 시작하면서 느끼는 것이 많다.
성도에게 노동의 터란 '성화'의 장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각각의 가치관을 보게된다.
개성들이 다 묻어있지만 본질은 결국 하나를 추구한다. 그것은 바로 '자기자신'이다.
자신의 스타일과 생각을 중심으로 주변에 적응하고 대인관계를 형성한다. 타인에 대한 호감과 배려도 '자신'을 위하는 경우임이 많다.
심지어 크리스챤도 이 함정에서 자유하지는 못하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다고 생각하며 행한것이 실제로는 아닐 수 있다는 말이다.
'경건'에 힘써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그것은 성령님과 그의 말씀안에서만 가능하다.
최근의 내 삶을 보면서 그러한 태도가 심각히 결여됐음을 알았다.
주님이 주신 믿음을 단단히 붙잡고 가슴치며 회개해야 함이 절실하다...
2015년 11월 19일 목요일
[쑥과 마늘]
그걸 10단 넘게 씹더라도 사람되는거 아니더라...
'호랑이와 곰' 신화가 주는 교훈은 '사람'되기가 그렇게 힘들다는걸 후대에게 재밌게 전하려한 선조들의 지혜라 생각한다. 인간답게 산다는 것이 마치 쑥과 마늘을 깊은 동굴에서 생으로 오랫동안 씹는 고독함이 동반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함이라는 것을...
게다가 곰은 옆에 있는 호랑이의 불만과 투정까지 견디는 수고도 감수해야 했다. 문명에 개화되지 못한 사람의 삶이란 짐승과도 같았다는 것도 유추해 볼 수 있다. 그렇다고 문명에 개화된 자가 짐승을 능가한 것은 아니다.
세상의 이치에 밝아 교양과 문화의 창호지를 두텁게 발라 붙였을지라도, 인간은 근본적으로 인간답지 못하다는 것을 가리우는 요령을 터득했을 뿐이다.
성경은 인간이 인간다워 지는 것은 말씀이 자신안에 두어졌을 때라고 말한다.(시 119:11)
근본을 두지 않고 교양과 윤리를 주장하는 것은 집안의 문제를 그대로 방치한체 창호지로 가리우는 것 밖에 안된다.
그러나 오늘날 우린 교양도 없고 신앙도 없지 않던가?......
2015년 11월 18일 수요일
[Heinrich Bullinger]
지인분이 선물해주신 귀한 책이 도착했다.
불링불링(?)하다...
제 2세대 종교개혁자들에 대한 연구가 미흡한 가운데 이런 책은 참 반갑다. 두께가 얇아서 더욱 만족스럽다. 휴대하기가 편할 것 같다.
불링거는 칼빈과의 애증(?)이 깊은 인물이다.
둘은 그 어려웠전 시대에 진리를 위해 긴밀히 협력관계를 유지했지만, '예정'에 대한 신학적 견해가 달라 마찰도 심했다고 한다.
그래도 꽤나 끈끈한 사이를 유지한 것 같다. 이런 태도는 깊이 배워야 할듯 싶다.
책 커버에 있는 초상화를 보자마자 그 이야기부터 생각난다. 선물해 주신 분께 무척이나 감사를 표하고 싶다~~~~
2015년 11월 8일 일요일
2015년 11월 5일 목요일
감기몸살을 앓으며...
일을 꽤 쉬다 다시 시작해서일까?
오랜만에 감기가 심하게 걸렸다.
상사의 배려로 어제와 오늘 일찍 퇴근했지만 동료들이 마음에 걸린다. 그래도 사회생활을 몇번 거치면서 몸건강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한다.
신앙도 몸살이 온다. 은닉된 죄에 자신도 모르게 깊이 빠져들 딱 찾아온다. 양심의 불편함은 잠시고 서서히 마비된다. 깊이 골병이 들었을 때는 말씀도 잊게 되면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법을 상실한다.
다만 이것으로 인한 고통이 발생했을 때는 감사해야 할 것 같다. 통증없이 영영 죄의 결박에 꽁꽁 묶여버렸다면 이미 죽어버린 것이다.
하나님과 멀어짐으로 부터 오는 열과 통증은 '회개'의 촉구 신호를 성령께서 주신 것이다.
그것이 내면의 괴로움으로 오든 상황의 고난으로 오던지 말이다. 앓아봐야 말씀이 귀한 줄을 알고
다가간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백성이 이탈하는 것을 눈뜨고 보지 않으신다. 그러나 가장 극심한 처방은 침묵을 고수하시는 때다. 말씀을 읽어도 기도를 해봐도 예배를 드려도 도무지 반응이 없다.
속히 회개하고 자신을 진단하며 돌이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이미 받았던 은사들 또한 망가지고 잃어버린다. 다시 회복시키기도 힘들어질 정도로 말이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 받았던 것들이 자신을 위함으로 전락함이 원인이다.
속히 죄에서 돌이켜야 한다. 우리는 이미 믿음을 받았다. 영원하신 통치자인 예수님을 우리의 주권자로 두게끔 선물받지 않았던가?
무너지고 싶지 않다.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고 싶고 그분의 말씀이 내 삶이되고 이웃들을 향한 사랑이 충만하여지기를 소망한다.
나는 죽고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그 역사가 내게도 일어나게 해 주시기를...
2015년 11월 2일 월요일
레리눔의 수도사 빈켄티우스의 말
신성한 고대의 거룩한 교부들이 그리스도 안에서 의견의 일치를 보이는 것 말고는, 그 어떠한 것도 [우리] 후손들은 절대 믿어서는 안 된다.
Nothing ought to be believe by posterity save what the scared antiquity of the holy Fathers consentient in Christ has held.
종교개혁의 오직 성경이란 의미에는 올바른 정통해석도 같이 받아들이겠다는 뜻도 포함되어있다. 그래서 16-17C 신학자들은 위대한 교부들의 해석을 버리지 않고 존중하며 연구했다.
앞선 5C의 경건한 수도사도 그것의 중요성을 알고 이런 말을 남겼는데, 오늘날엔 이런 얘기하면 가타부타 사설들이 달린다.
믿어야 할 것들과 절대 믿지 말아야 할 것들은 확실히 정해져있다.
그만큼 무엇이 정통인지 분간하지 못하는 시대가 됐다는 의미인듯 싶다. 하지만 성경과 정통을 동등한 권위시 해버리는 '전통주의'의 오류는 기피하되, 신앙의 선배들로부터 이어져내려오는 일치된 바른 해석의 결과물들을 받아들여야 하는 태도를 갖춰야 함이 절실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