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월 20일 수요일

의무의 기준

Q. 그렇다면 당신은 왜 우리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는가?••


A. 그렇게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기 때문이다....
복음 안에 그리스도가 제시될 때 그분을 영접하는 것이 당신의 의무다. 당신의 죄를 회개하고 모든 대화 가운데 거룩하라. 하나님은 이런 것들을 당신에게 명하신다. '당신의 의무의 기준은 당신의 능력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이다.'

- 토마스 보스턴

전도의 주체가 늘 누구인지를 상기해야 한다.
한 사람을 회심시키는 것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보스턴의 말대로 "우리는 모든 사람에게 그리스도를 전파하며 모험적으로 화살을 쏘지만, 하나님이 친히 그 화살을 인도하셔서 그분이 보시기에 알맞은 자에게 떨어지게 하신다."
그러나 우리는 그동안 은혜의 방편에 의지한게 아니라 '수단'에 치우친건 아닌지 모르겠다.
새생명 축제, 전도폭발 운동, 새친구 초청잔치등
이런 것들이 다 나쁘다고 부정하지는 않겠다.
다만 우리가 준비함에 있어 무엇이 결여됐는가를 살펴야 함이 없었던건 아닐까?
보스턴은 이어서 책에 이런말을 남겼다.

"당신이 집에 갔을 때, 그 어떤 신앙적인 대화도 들리지 않는 당신의 집에 갇히지 않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당신이 구별된 조용한 장소로 물러가서 들었던 것들을 묵상하고 적절한 질문들에 대해 당신의 양심을 연습하기를 바란다. 당신이 멍청한 마귀에게 사로잡혀 하나님께 기도하기 위해 입을 열 수 없게 되지 않기를 소망한다. 필자는 당신이 침대로부터 세상 일로 또 세상 일로부터 침대로 밀려나지 않고, 오히려 멸망 당하고 있는 영혼의 문제를 두고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기를 바란다."

우리는 그동안 그저 교회로 사람을 끌고 오기 위해 악기를 연습하고 댄스를 연마했다.
특히나 청년들이 그 노고에 박차를 가했다. 지쳐가면서......
근데 우리는 정작 중요한 훈련은 받지를 못했고 하지도 않았다. 일을 하나님께 맡기는 훈련 말이다. 이미 주어진 믿음과 허락된 은혜의 방편을 눈앞에 뒀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이런 방임은 진행중이다.
누가 이런 힘든 사역방향을 굳이 택하겠는가?
(그럼에도 계시니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재정 빵빵한 교회의 거창한 행사를 주체로 전도가 주관되는 것 보다, 작지만 거룩한 교회에서 훈련받은 한 성도가 평범한 일상에서 작은 섬김으로 복음을 전파함이 더 낫다고 본다.

효율은 따지지 않겠다. 보스턴의 해석에 100% 동의한다. 오늘 믿지 않은자가 내일 믿을 수도 있는 법이다. 복음은 우리 상식으로는 믿기지 않는 방식으로 전파되고는 한다.
그야말로 '비효율의 은혜'다. 오늘 믿지 않던 자가 내일 믿을 수도 있는 법이다.
"하나님은 선하고 자비가 많으시다. 주님은 그분의 은혜로 사람을 깜짝 놀라게 하여 종종 "그분을 찾지 아니하던 자에 의해 찾아냄이 되시기"(사 65:1)를 좋아하신다."


- 토마스 보스턴의 인간본성의 4중 상태 p.196~200까지 읽고 나서의 기록...

2016년 1월 19일 화요일

꺼지지 않는 불꽃 / 마이클 리브스 저

종교개혁사에 대해 친숙하게 다가갈 수 있는 저서로 알려진 책이다. 현대적인 문체와 감각으로 독자가 지루하지 않고 쉬이 넘어갈 수 있도록 한 배려가 담겨있다.
깔끔한 편집과 평이한 문체로 저자가 전달하고자 한 의도를 죽이지 않도록 노력한 편집의 흔적도 한몫 했다. 영어에 쥐약인 우리 범성도에게는 쌍수벌려 환영할 만 한 책이다.

광대한 종교개혁사를 핵심을 주로 콕콕 찝어내어 재밌게 소개한다. 마치 '영화는 수다다'를 보는 것 처럼 말이다.  그렇다고 가볍다는 얘기는 아니다. 종교개혁의 중요성과 오늘날에도 전달되어지는 메시지에 대해서는 날카롭고 학문적인 진단을 내린다. 정교한 학문적 논증은 아니더라도 모두가 생각해 볼 수 있는 방향으로 이야기 하듯이 던지기에 부담은 덜하다.
오히려 날카로운 통찰력과 견해를 부드럽게 전달했다는 것에 감탄했다.

책을 읽으면서 개인적으로 짚어낸 맥의 느낌은 다음과 같다.

1. 종교개혁 1세대(16C)들의 작업은 '거룩한 삶'이 주가 아니라 '신학'의 회복이였다.
종교개혁 1세대(루터, 츠빙글리, 칼빈등...)의 작업은 '성경'의 올바른 해석을 발견해내는 것에 있었다. 그리고 모두가 '성경'을 읽고 바른 말씀을 알아야 하는 것에 초점을 뒀다.
부패한 로마 카톨릭의 왜곡된 해석으로 인해 초래된 다양한 미신적 관습과 부패는 오직 '말씀'으로 밖에 회복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았다.
당시 성직자를 제외한 모두는 성경을 읽을수도 해석할 수도 없었다. 그리하여 저마다 와전된 해석으로 인해 말씀의 궁핍함이 팽배하여 영혼들의 믿음은 황폐했다.
마르틴 루터가 성령님의 조명하심에 의해 성경에서 '이신칭의'를 발견함은 그야말로 쾌거였다. 그는 선봉에서 진리의 깃발을 흔들어 그리스도가 계신곳을 가르켰다.
이후 거룩한 불씨가 촉발되어 후기 1세대들이 무너져 내린 신학을 견고히 함에 영혼을 불살랐고 종교개혁은 그렇게 시작됐다.

2. 종교개혁의 봉화는 그대로 이어져 17C에 정점을 찍는다. 그것이 영국 종교개혁의 꽃이라 할 수 있는 '웨스트민스터 총회'다. 그러나 영국도 시작부터 쾌거를 이룬 것은 아니다.
종교개혁 1세대에서 2세대까지 걸쳐 견고해진 신학의 유산을 그들이 고스란히 이어 받았기에 가능했다. 비록 바로 개화하지 못했지만 누적된 유산은 어마어마했기 때문에 이룩할 수 있었다. 저자가 표현한 영국 종교개혁의 슬로건은 압권이였다. "종교개혁을 개혁하라!"
17C개혁의 주역은 청교도들이 으뜸이였다. 그들은 방대한 신학적 유산을 바탕으로 삶을 개혁하기 위해 몸부림 쳤다. 물론 걔중에 극단으로 가버려 율법주의적 형식화에 빠진 신학자들도 있지만 그들로 인해 빚어진 현대성도들의 청교도에 대한 오해는 접어야 할 것이다. 그들 또한 수많은 목회자와 학자들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선배들이 일궈놓은 종교개혁 작업에 만족하지 않고 전진했다.

말 그대로 "개혁된 교회는 계속 개혁되어야" 한다는 것이였다.


결론 : 지금 종교개혁은 끝났는가?


책 제목에서 볼 수 있듯이 아직 꺼지지 않았다.
하나님의 일하심은 막을 수 없다. 그러나 앞선 선배들의 종교개혁 작업과정에서 유추할 수 있듯이 시대마다 개혁의 포커스가 다르다.

1세대가 '말씀의 회복'에 중점을 뒀다면
2세대는 '신학의 정립' 곧 교리의 견고함을 다졌다. 17C에 넘어와서는 성경과 정립된 교리를 바탕으로 '예배'와 '윤리'적 측면 개혁에 힘썼다. 물론 개개인의 삶들은 '경건'함을 잃지 않으려했다.

리브스가 지적한데로 종교개혁에서는 오늘날 교회가 직면한 문제와 위기 해결에 도움을 주는 힌트들이 다분하다.  무엇을 개혁해야 할 것인가 헤메고 있는 현대 교회들에게 여전히 강력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다는 얘기다.
다양한 가치관과 사상들이 세상과 공존하여 교회에 침투하고 있는 이 때에 종교개혁이 끝났냐?는 질문은 무의미하다 할 수 있겠다.

왜냐하면 지금도 개혁은 계속 진행되고 있고 실행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2016년 1월 5일 화요일

악에서 벗어나는 법(잠 2:10-12)

10 곧 지혜가 네 마음에 들어가며 지식이 네 영혼을 즐겁게 할 것이요

11 근신이 너를 지키며 명철이 너를 보호하여

12 악한 자의 길과 패역을 말하는 자에게서 건져 내리라


죄악은 상당히 끈덕지다. 특히나 오늘날의 대다수 성도들은 자신의 죄에 취약한 면모를 보인다. 교리교육의 부재와 교회의 윤리성 실추등으로 맥을 못추고 있다. 이런 부분들도 무시할 수 없는 요소지만, 이런 것들을 온전히 실행한다고 해서 우리가 근본적인 죄악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죄'로인해 인류의 정해진 운명인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는 대안은 오직 그리스도 밖에 없다.
그렇다면 먼저 죄란 무엇인가를 짚어봐야 할 것 같다. 크리스챤이라면 잘 알고있듯이 창세기에서 인류가 타락한 이유는 위대한 선조인 '아담'이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선악과를 먹은 시점에서 출발했다.
죄가 어디로부터 왔는가에 대한 기원에대해 신학자들의 의견은 분분하지만 확실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을 버리는 것이 '죄'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의 말씀을 내 안에 두지 않는다는 것이다.
불순종 하기는 그래서 참 쉽다. 하나님의 말씀을 그저 버리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타락학 인류는 그런 자유함에 너무나 잘 노출되어있다.

지상을 살아가는 성도들도 이런 위험에서 완전히 자유한 것은 아니다. 우리 도처에 죄악의 유혹들이 널려있고 부패한 옛본성은 호시탐탐 우리의 다리를 걸고 넘어지기를 기대한다.
마귀는 이런 것들을 정말 잘 알고 있어서 사방에 올가미를 설치하고 손을 비비며 기다린다.

그런데 우리는 스스로가 믿음이 온전하다 생각하여 그런 것들로 부터 자유하다 착각하는 경향이 있다. 특히나 자신의 신앙생활이 철저할수록 말씀과 교리적 지식이 깊어갈수록 그럴 가능성이 농후하다. 진정한 경건에 도달하지 못하면 그런 결과를 초래하는 것이다.

악에서 벗어나는 답은 시편기자의 고백처럼 하나님께서 당신의 말씀을 우리안에 두셨을 때 가능하다. 전능하신 성령님께 온전히 맡겨졌을 때 비로소 우리는 죄와 싸울힘을 얻고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진정한 자유함을 얻을 수 있다.

우리가 누리고 먹고 마시는 모든 것들이 선하신 하나님 말씀에 순종하는 방향에서 이어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죄에 빠지는 지름길이라 정의될 수 있을 것 같다.

인간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 1문은 '인간의 주된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으로 시작한다.
그 답은 "하나님을 영화롭게하고 그를 영원토록 즐거워하는 것이라고 답한다."

성경의 창세기1장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영엄한 산물이다.
창조의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였으며 그것은 곧 "사랑"하기 때문이였다.

인간은 흙에서 빚어져 육신이라는 형태를 입었지만 그 원동력은 하나님을 닮은 형상인 "영"을 부여받았다. 그의 사랑과 거룩하심을 닮은 것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진 또다른 이유는 만물의 으뜸가는 피조물이였기 때문이다.

인간은 왕이신 하나님의 대리자로써 그분이 창조한 온 우주만물의 세계를 다스릴 존재였다.
그런 존귀하고 영엄한 존재가 하나님의 말씀을 어긴대가로 "사망"을 선고받고 비참하고 천한 신분으로 전락했다. 온 피조물의 대표가 타락하면서 우주질서도 인간에게서 역행하기 시작했다.

인간의 타락했음으로 만물은 복종 할 필요가 없었다. 오직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우선적으로 창조된 존재들이 그것을 포기한 존재들에게 도움을 줄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까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지배력이 약한 이유는 여기에 있다.

하지만 자비로운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통해 타락한 인간들의 일부를 구원하실 계획을 창세이전에 갖고계셨다. 아담의 타락과 동시에 여자의 후손을 통해 택자들을 구원하시겠다는 약속을 맺으셨다.

이위이신 성자께선 신약에 이르러 성령으로 동정녀 마리아의 몸에 잉태되어 육신을 입고 태어나신다. 인류 첫 대표자의 실패를 만회하고도 남을만한 제2대표가 지상에 강림한 것이었다.
그리스도께서는 성령님이 함께하사 날마다 지혜와 사랑이 더해져가며 자라나셨고 공생애 기간동안에 모든 말씀에 순종하셨다.

그리고는 인간의 죄를 완전히 사하시기 위해 단번에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제물로 드리사 우리를 속량하셨다. '그리스도의 의'는 우리에게 전가되고 죄는 예수께서 모두 전가받아 죽으셨다. 이후 죽음을 이겨내시고 부활하사 당신의 뜻이 완성됐음을 제자들에게 선포하시고 승천하셨다. 예수께서는 아버지의 우편에 앉아 온 우주의 통치자로 군림하셔서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신다. 보내신 성령을 통해서 말이다.

이 모든 계획들은 이미 창세전에 삼위께서 세우셨다. 언약의 성취는 이뤄졌고 그것은 그리스도안에서 온전히 실행됐다. 즉, 성도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약속 된 존재들이란 것이다.

이 약속은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시작됐다. 즉, 성부께서 그리스도를 계시하시고 보내셨으며 그분으로 부터 아버지를 배우도록 하셨다. 베드로의 신앙고백에서 그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이나이다."

진정한 인간은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된다. 참된 인간성은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계실 때 발휘된다.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구속과 그 말씀을 우리안에 적용시킴으로 우리는 점차 진정한 인간으로 거듭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사역으로 성도들은 진정한 인간이 되어가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