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선한 목자(牧者)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내어 주거니와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들도 자기 것이 아니므로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려두고 도망하나니, 이리가 양들을 물어가고 또 흩어 버리느니라.
삯꾼이 도망하는 것은 그가 삯꾼이기 때문에 양을 돌보지 아니함이라.
(요 10:11~13)
중생한 자는 하나님으로부터 매우 중요한 책임이 부여되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할 책임이다.
오늘날까지 교회 강단에서 '사랑'의 중요성을 강조함이 메마른 적은 없지만 현대에 와서는 외양만 갖춰진 사랑인 경우들이 많은 것 같다. 이는 지금 교회를 다니고 있는 우리 세대에게도 생각해 볼 만한 중대한 문제다.
토마스 보스턴은 신자가 자신이 중생했는지 아닌지 스스로 점검해 볼 수 있는 표지로 '형제 사랑'을 언급했다. 이보다 앞서 성령님의 감동하심으로 영감을 받은 사도 요한은 이것을 매우 중요한 증거로써 제시했다.
"우리는 형제를 사랑함으로 사망에서 옮겨 생명으로 들어간 줄을 아는도다"(요일 3:14)
여기서 형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받은 모든 지체들을 뜻한다. 오늘날엔 이웃사랑에 대해 지나친 각성을 요구하다 보니 첫째로 적용되어져야 할 대상을 지나쳐서 교회밖의 사람들을 우선적으로 지목하는 것 같다. 인간적인 사회보장과 인권을 강조하는 세상풍조에 교회가 성경을 통해 분별하여 맞춰나가지 못하는 것이다. 말씀이 제시한 명확한 사랑의 대상을 제껴두고 인간적인 사고관으로 그 대상을 임의로 변경함은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토마스 보스턴은 "허물과 죄로 죽은 세상 사람들 사이에서 그 사랑을 찾는 것은 어처구니 없는 짓"이라고 단호하게 선을 그었다. 그는 교회가 형제들을 반드시 사랑해야 하는 가장 주된 동기는 그들안에 있는 은혜 또는 하나님의 형상임을 알려주는 것이라 말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경건함 때문에 경건한 자들을 사랑하고 거룩함 때문에 성도들을 사랑하는 것은 그들 안에 있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으로서, 이는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난 자라는 것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요일 5:1)
보스턴의 해석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형제들을 사랑할 강력한 의무가 선물로써 주어진다.
하나님을 사랑하면 이웃을 사랑할 수 밖에 없다. 이것은 폐쇄적이고 우리들만의 리그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랑을 통하여 복음이 확장되는 중대한 결과를 낳는다. 세상이 오해하거나 질투하여 교회들끼리만 사랑한다 질타를 가하여도 사랑은 하나님으로 부터 출발하여 그 결과까지 하나님으로 부터 맺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지목한 사랑의 대상 외에 사랑을 행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라 말할 수 있는 것이다.
하지만 교회안이라고 해서 그 안에 모두가 온전한 사랑의 책임을 짊어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물론 참 된 신자도 하루에 일곱번씩 실족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 할 필요성은 있지만, 사랑의 책임에 차별성을 두는 것은 따끔히 질타하고 도려내야 할 문제이다. 이것은 '공의' 빠진 책임 없는 사랑일 경우일 수 있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계시하신 당신의 속성은 '공의'와 '사랑'이다. 사실 우리의 무지하고 미비한 이성으로 인해 그 분의 속성을 감히 두 가지로 나눠보게 되지만 실은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은 하나로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 없는 공의 없고 공의 없는 사랑은 없다. 공의로시기 때문에 사랑을 베푸실 수 있는 것이고 사랑하시기 때문에 정의를 완벽히 구연하실 수 있는 것이다. 그것에 어떤 차별성이나 불공정성도 적용될 수 없다. 그분이 사랑하시는 것이 정의이고 그것이 곧 사랑이다.
신자는 그리스도의 은혜에 근거하여 온전히 사랑할 수 있는 특권이 쥐어지게 된다. 하나님의 공의에 근거한 교회의 '권징'도 사랑 없이는 실행할 수 없다는 것이 그 증거가 되겠다.
안타깝게도 한국 교회가 처한 위기의 상황은 공의와 사랑을 양분하는 함정에 근거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판단이 선다. 청년의 입장에서 이 시대를 관망하는 눈이 원숙한 장년들에 비해 짧고 미비할지 모르겠으나 몸에 닿는 체감은 그렇다. 되려 이런 분위기가 참된 목자를 양성함 보다 삯꾼을 양성하는데 양분되어 버린 것은 아닌지 심히 우려 된다. 그리고 삯꾼 밑에서 배운 성도들 또는 신학생들은 그들의 그림자를 그대로 밟게 되는 경우들이 많다.
불과 500년전의 종교개혁의 선배들의 기준만 하더라도 '중생'하지 않은 성도에게 목회의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 책임을 다하는 분위기가 존재했다. 성도에게 공통적으로 사랑의 책임이 부여되지만 목회자에게는 갑절 이상의 책임이 부여된다. 칼빈의 표현을 빌려 설명하자면 하나님께서는 자신께서 직접 교회를 다스리시지만 특별히 도구(사역자)를 통해서도 다스리시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거룩한 책임감을 짊어져야 하는 것이다.
단 그리스도라는 '문'을 통과하지 않는 자들에게 사랑의 책임은 부여되지 않는다. "즉, 모든 참된 목회자가 교회 속으로 들어가서 사역을 하기 위해서 반드시 통과하여야만 하는 문일 뿐만 아니라, 모든 심령이 구원을 받고 천국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하여야 하는 문이다."(매튜풀 주석 '요한복음' p.248)
이미 그리스도께서 참된 목자로 세워지셨기에 우리가 그 사랑의 책임 이행이 가능하다는 얘기이기도 하겠다. 그분은 양들을 결코 버리시지 아니하셨다.
최근 뉴스에 안타까운 소식이 올라왔다. 한 목회자가 자신의 자녀를 구타하여 사망하게 한 끔찍한 사건이다. 언론은 지금까지도 해당 사건에 대해 대서 특필하여 연일 보도하고 있다.
각종 뉴스 포탈 사이트에서는 그의 경력과 학벌 그리고 저술서에 대한 정보 까지 간접적으로 기사에 실어 놓았다. 온라인 기독교 서점에서는 해당 목사가 저술한 저서들을 일괄 내렸다.
이를 통해 우리가 직접 체감할 수 있는건 직분, 학벌, 신학적 지식이 참된 그리스도인의 표지가 아니라는 것을 명확히 보여준다. 그는 자기 자식을 '그리스도안의 한 형제'로써 인식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변질된 것인지 애초부터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지만 딸을 '인격적'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에 있어서는 변명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SNS 내에서도 기독교 교리적으로 그가 용서받을 사람인가 아닌가에 대한 문제도 심심치 않게 다뤄지는 것 같다. 우리가 그동안 얼마나 그 기준에 대해 명확함을 가지지 못했으면 이 끔찍한 사건에 대해 그런 논의를 하는지 모르겠다. 해당 목사가 왜 그렇게까지 갔을까?에 대한 이해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희생당한 자녀에 대한 이해와 안타까움이 선행되어야 할 것 같다.
요한복음 10장 12절은 삯꾼은 목자도 아니라는 것을 명백하게 언급하고 있다. 삯꾼에게는 사랑을 이행할 책임감이 없다. 그들은 이리가 자신의 양을 물어가도 모른체 할 것이고 자신까지 위협한다면 양들을 버리고 도망갈 것이다. 하지만 참된 목자라면 그리스도께서 사랑 하시는 양들을 모른체 할 수가 없다.
칼빈이 12절을 주석하면서 정리한 내용을 빌려왔다.
"그리스도에게 참으로 연합되어 있는 사람이라면 주님이 귀하게 여기셨던 양을 모른 척 할리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다음에 하신 말씀이다."
퇴근하고 돌아와 말씀을 묵상하는데 왠지 마음이 무거워지는 느낌이다.
당장 행복한 긴 연휴가 눈 앞에 있어 쉴 수 있음에 감사하지만 나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이 동시에 올라오는 그런 쓰디쓴 밤이다. 사랑의 책임이 교회에 부여된다는 것은 매우 기쁜 일이지만 내가 교회의 지체를 사랑하지 못할 때가 많던 것이 더 많았음이 마음 한켠을 먹먹하게 한다.
어제부터 보도되는 뉴스의 여파도 알게 모르게 한 몫 단단히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