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한국교회는 잘못된 신앙관으로 말미암아 여러모로 부패한 것 투성이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란 없지만 시대적 환경이 어둡다보니 각종 피해사례가 난무하다.
이런 과정속에서 신앙의 선배들 유산인 개혁신학이 다시금 부각을 나타냈지만 대다수의 선배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같다. 신학을 이데올로기화 하여 무기로 삼아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착취하는 형태가 어찌나 그리 많은지 모른다.
이런 상황속에서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여러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상처입는 경우가 빈번하게 됐다. 내가 회심할 시기에 개혁주의 신학도 적절하게 다시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행의 물꼬가 터지면서 여러교회에서 신앙고백서와 교리에 관심을 기웃거렸다.
처음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영미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를 접했을 때 한국이 불모지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이런 귀한 서적들이 있는데도 읽는 성도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듯 싶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이 한국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교리들이라는걸 지적하는 움직임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하나하나 깊어져갔다.
그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때가 2013년에서 14년 사이부터였다. 생각보다 개혁신학에 대한 회의가 너무나도 깊게 드리워져 있었고 이미 철저하게 지켜온 어느 지교회는 방벽을 세우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었다.
교단의 문제도 한몫했다. 내가 속해있는 합동교단의 부패가 너무나도 심각했던지 개혁을 울부짖는 젊은 신학자들을 자본과 권력으로 때려 짓밟고 있었다. 세상은 교회에 관심이 없어 큰 부패가 드러난 것 아니면 신경도 안쓰지만 내부적으로 부교역자들이 몸살을 앓기 일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성도들은 그저 잠재적 피해자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모종의 핍박(?) 과정에서 부교역자들이 종종 개종하거나 이단에 빠지는 사례들도 있었다. 아니면 신학적 분쟁이 이골이 난 나머지 성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제한하자는 견해를 가진 교역자들도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할수록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리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늘어나면서
이 신학에 거센 비판을 가하면서도 지지하는 기묘한 형태들도 보인다.
그런 상황들에 처한 자들이 진실된 자일수도 있지만 매우 피를 토하고 있는 상태인걸로 보인다. 그런 사람들과 대비했을 때 나는 은혜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아직도 뭘 모른다고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다만 그런 아픈지체들을 품어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관용을 주시기를 바랄뿐이다.
나 또한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기 전까지는 죄인이였다. 삶에서 무수히 방황했음에도 그렇게 여기지 않고 떳떳히 살아왔다. 천성이 소심하여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음을 되짚을 수 있다.
회의에 빠진 교역자와 성도들을 바라보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게된다.
교회의 잘못?...신자 스스로의 잘못?... 두 가지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얘기할 수 있는건 이렇게 시대와 상황이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진실된 교회는 빛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소경인 자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겠지만 연약하더라도 아버지께서 택한 신자라면 그 희미하고 미세한 빛을 감지할 수 있다.
근시는 먼곳에 있는 형체가 불분명 해도 분명 빛과 사물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다.
연약한 신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나와 주위의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쓰시리라는 의도이실지도 모른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자가 부족하니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요새 마음에 멤돈다.
하나님께서 나를 추수할 자로 쓰실수도 있거니와..내 자손을 통해서 쓰실 수도 있다.
우리가 언제나 깨어있어 아버지께서 필요로 하시는 곳에 쓰임받고 영광돌리는 삶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