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6월 30일 목요일

과거의 글, 오늘의 글

SNS에 나름 수 많은 글을 남겼다. 어떻게 보면 이게 다이어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개인다이어리는 따로 쓰고있지만)

SNS를 첫 이용했을 때의 글들을 보면 낮빛이 창백해지고 화끈거리는 느낌을 감출수가 없다.
어찌보면 회심전과 회심후의 글로 나눠어 질 수 있겠다.

쓸떼없는 글들을 많이 남겨서 타임라인에 공해를 유발했을지 몰라도 반성되는 차원이 많다.
더불어 페친들과 주고 받은 글들을 보면 그들도 과정중에 있었음을 두고두고 확인한다.
(아 그땐 그랬지... 맨주먹 불끈쥐고 멋모르고 펀치라인(?)을 새겼네...)

역시 글은 일점일획이라도 신중하게 써야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타임라인에 페친이신 목사님이 페북글에 대한 단상을 남기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습이 다르다는거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셨다. 와닿는 얘기다. 여기다 글을 남기는 나의 모습도 분명히 내 부분이다. 글을 꾸며썼다면 그 꾸미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고 정직히 썼다면 정직한 그것이 나의 모습이다.

이번 주보 칼럼은 부분적으로 '글'에 관해 썼다.
글의 사전적 의미 첫번째는 "생각이나 일 따위의 내용을 글자로 남긴 기록"이다.

무언가를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경험한 내용을 기록으로써 남긴 것이다. 어찌보면 글도 나를 비춰보는 도구중 하나인 것 같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남겼다면 대중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은 신중하게 작성해야 한다.
먼저는 글이 나를 비추고 두번째는 타인이 글을 통해 나의 일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글, 오늘의 글
모두 내 모습의 일부이다.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믿음의 본질2 - by 토마스 굿윈

믿음의 본질 1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다룬다.
제 2권은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다루는데 각각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으로  나눴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굿윈이 이것을 둘로 나눠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논리적으로 구분하였음을 염두에 둬야겠다. 믿음의 본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이 바른 믿음이고 올바르지 않은 믿음인지를 전개해 나아가는데 있다.

2권은 실천적인 방향을 담았기에 믿음에 대한 의지, 확신, 기도를 설명하고 후반부인 3편에 이르러 믿음의 속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굿윈의 믿음의 본질이 탁월하다 여겨지는 것은 그의 실제적인 삶에서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이전에 아르미니우스 주의자였으나 리처드 십스의 권면으로 개혁파칭의로 돌아선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그가 칭의에 대한 담론가운데 체계적이고 실제적으로 변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체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본다.

그는 믿음의 적용 행위를 확신과 기댐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것이지만 확신은 인간의 의지로 키울 수 있다고 바라봤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유가 되어주셨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신만 있어서는 안돼고 그리스도께 기댐이 필요한 것이다. 회개함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신은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다. 신자가 죄성으로 인해 헤메고 바닥을 기어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아니하신다. 굿윈은 이런 상태의 신자가 처방받을 수 있는건 속히 회개하고 은혜의 방편들을 활용하여 확신을 굳건히 해야함을 권면한다.
이는 신자가 죽는날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예정에 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도록 일침을 가한다.

"믿고자 하는 자가 기댐의 행위를 발휘하기도 전에, 혹은 약속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전에, 혹은 다가올 칭의를 추구하기도 전에, 자신이 특별히 예정됐는지 아닌지 확신하는 것을 첫 번째 과업으로 만들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흔히 구원파의 이단적인 오류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예정을 칼빈만의 것으로 취급하고 부인하기에 아이러니컬 하지만 말이다. 구원파의 체계에서는 확신과 기댐은 찾아볼 수 없다. 한 번 구원받으면 그걸로 게임 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순종과 죄에 대한 비참이 없다.

굿윈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구원파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율법폐기론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때니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한 성경적 변증은 이 저서에 충분히 담겨있다.

읽어 나갈수록 오늘날 신앙적 고민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언으로 적용될만한 것들이 풍성하다. 고전은 이래서 손에서 뗄 수 없나보다.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능하니라(잠 28:9)

섬칫하고 두려운 말씀이다. 지혜자의 쓰디쓴 권면이 마음을 쓰리게 한다.
진정한 경건자는 하나님 말씀에 먼저 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배운다.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뱉은 무거운 권면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나이다"(삼상 15:22)였다.
일천번의 제사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단 한마디라도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수없이 회개를 많이하더라도 죄에서 돌이키고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함을 부리는 것 밖에 안된다는 얘기겠다.

등골이 서늘하고 눈가에 물이 고인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자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보다 비참한것은 없으리라. 경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내에서 바른 말을 선포하며 친절하게 보이는 것은 이웃에 눈에 참된 신앙인으로 보일지 모른다.
다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망각함은 너무나 빈번하다. 마음속에 죄악을 품으면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시66:18)는 말은 우리는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아버지가 순종이 없으면 듣지 아니하신다 말한다. 이것에 대해 나는 감히 반박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는다. 헛된 봉헌을 더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심을 멀리하고 지속적으로 가져다 주는 미련함을 품을까 두렵다. 그것들을 괴로워 하심을 경고하셨음에도 반역죄는 너무나도 즐거움으로 포장되있어서 지속의 채찍을 가한다.

기도와 순종은 하나다. 기도가 곧 삶이라는 말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귀를 열었다는 얘기와도 같겠다. 마치 건강한 아이가 부모의 부름에 즉시 듣고 나아와 경청하듯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바로 반응하여 나아가는게 정상이다.

하지만 헛된것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아니하고 입술로만 가겠다고 뱉는 것은 스스로가 죽음을 자청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백성이 입술로만 공경하고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다고 말씀하신 경고는 오늘날 교회에 더 강력하게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기도의 시간이 짧다고 책망해서도 안되고 길다고 해서 자랑거리도 아니다. 
되려 두려운 것은 상황에 비판적인 시각과 경계를 지나치게 한 나머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을 부인하는 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의 입술에서도 쉽게 이런 시대에 제대로 된 기독교인으로 사는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을 너무나 잘 뱉는다. 차라리 솔직해서 좋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맞다 솔직하다. 그러나 행함은 참 믿음의 증거다. 지상에 완전한 순종은 없으나 그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끌어내시는 그분의 기적을 감상하라.
교회자체가 그 증거가 아니던가?  
 
오히려 나의 믿음이 여전히 작은것은 아닐련지 모르겠다.......

2016년 6월 14일 화요일

빼앗긴 가르침의 직분

"사실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가르침의 직분을 우상에게 떠넘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곧 자기들 자신이 가르칠 능력이 없는 벙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빈 기독교강요(상)/크리스찬 다이제스트 역판 p.126 )
오늘날 일부의 성도들은 과거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의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말 대부분이 적용되는게 힘들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은 칼 트루먼이 지적한 바 대로 진보된 기술문명으로 인해 옛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태도가 자리잡혔기 때문이다. 최신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생활패턴은 정통의 소중함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결론에 동의한다.
칼빈의 지금 저 발언이 어떤이들에게 고리타분한 것이라 치부해도 나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시대정황상 교황주의자들을 향하여 강한 비판을 행한 것이지만 오늘날 가르칠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있는 우리도 그 대상이라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칼빈의 저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교회안에 가르칠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면 우상으로 대체시킨다는 얘기로 들려진다.
하나님께서 교회내에 참된 교사들을 세우신다는 것은 매우 은혜라는것을 알수있다.
교사들은 양들이 헛된것에 진리르 빼앗기지 않도록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다. 이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을시에 교회안에 닥치는 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볼 수 있겠다.

2016년 6월 13일 월요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잠25:2)

하나님의 일은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일들로 구분되어 진다.(신29:29)
드러난 일들은 우리에 속하지만 감추어진 일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양자 모두 불가분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으나 인간에게 드러나게 하지 않은 것은 그분만의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사 그가 직접하시는 일은 가려져 있다는 얘기다."(박윤선 주석 참조)
대표적으로 예정의 지식이 그렇다. 오늘 개혁신앙 세미나에서도 이것에 대한 유익은 오히려 교회에 실천적 적용으로 이어진다 나눠주셨다.

개혁신앙이 비판받는 일면에 '예정론'을 근간으로 냉정하고 딱딱하단 평이 있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면 올바른 예정론이 신자의 발목을 낚아챈 경우는 없다.

오히려 상처를 준 방향은 예정을 오인한 자들이 이웃에게 냉철한 회초리를 휘둘러서 발생된 경우들이다.

잠언의 지혜자가 권면한 대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와같이 은닉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만하다." 주석했다.

이는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케 하고 사랑을 더 무르익게 한다. 우리는 누가 택자이고 유기자인지 모른다는 사실은 이웃을 향하여 섣부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음을 간과하지 않도록 이끈다. 또한 무질서한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인내를 선물받는다.

그래서 종교개혁 선배들이 예정을 묵상하며 뱉은 말은 다음과 같다.

"오늘 구원받지 못한자 내일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불손한 태도를 가진 성도들을 향해 은근한 잣대를 들이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2016년 6월 12일 일요일

균형

때로는 박식하고 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숱한 논쟁의 한가운데 휘말리면 비인격적인 태도가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늘 한 발자국 떨어져서 신중하게 주제를 관찰하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잘못된 의견을 펼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과격한 반응은 위험하며 되려 서로가 상처입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되는 범주지만 되려 신자들 사이에서 이런일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현재 한국의 음란한 문화 때문에 경계의식이 고조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교회 내부로 침투하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나 청소년과 청년층이 주된 타겟이다.

하지만 사전에 말씀을 중심으로 교육이 지속되어 왔다면 '균형'을 잃을리는 없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되려 너무 심각한 우려가 긴장된 상황들을 촉발 시키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죄들은 과감히 쳐내야 할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싫어하시고 내버리시기 때문이며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세상의 것들을 들어설 수 없다.

신자들끼리의 내분이 너무 격분하다. 조금만 진정하고 은혜로 식혀짐이 필요한 듯 싶다.
인격적으로 비춰졌던 지체들도 이런 문제로 인해서 실족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이런 사태에 있어서 교회안의 영혼들이 깊은 상처를 입지 않도록 지켜봐주고 다독여줌이 필요하다.  오히려 교회 외부의 문제로 민감하게 반응하다 내부의 영혼들을 못돌보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다.

2016년 6월 8일 수요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 24:16)

신자가 절망속에서도 영원히 낙심하지 않음은 아버지께서 건져주실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회심한 이후의 삶속에서도 옛 습관을 미처 다 떨어내지 못하여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지혜자는 경건한 자라도 일곱 번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18C의 보스턴 목사는 저서 '인간 본성의 4중 상태'에서 하루에 7번 넘어질 수 있다고도 가르킨다. 말씀에 견주어 보았을 때 벗어난 말은 아니다. 신자는 급격한 실족으로 인해 구원받기 전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인이었음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천로역정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좁은길은 쉽게 지나갈 수 있지 않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 어두운 유혹에 빠져 정도에서 이탈하여 굴러 떨어질지라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자의 손을 놓지 않다는 것에 있다.

신자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은 결국 하나님 덕분이다. 하지만 성도의 시선에서 누가 진실된 의인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교회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표지들이 있어 신자와 분별하는것이 그다지 어렵다고 볼 수만은 없다.

대신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함부로 지체를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번 실족했다고 하여 과격하게 상대를 폄하하고 판단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태도다. 지혜자의 가르침만 보아도 믿는 자도 일곱 번이나 실족할 수 있다.

하지만 교리적인 지식이 늘어날 수록 상대를 평가하게 되는 태도는 너무 자연스럽게 잡힌다.
그만큼 죄성이 지독하기 때문에 사랑과 경건이 가득한 교리를  평가의 리트머스 종이로 전락시키는 것은 매우 쉬운일인 것이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성격과 성향들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기적이지만 때론 다툼과 갈등이 비일비재하다. 지체의 과격한 성격과 성향을 참지 못해 공동체 내에 균열이 가는 상황은 어느 교회나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형제를 늘 용서하라 가르치신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질문은 참으로 깊다. 그는 의인도 일곱 번 실족할 수 있다는 말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님, 내형제가 내게 대적하여 죄를 범하거든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라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사실 사람이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 불교에서조차 부처의 웃는 얼굴도 세번까지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대선배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할 의사를 가지고 질문을 던진 듯 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에 한도를 그었다. 딱 일곱 번 까지 말이다.
예수님은 이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시고 일곱 번 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답변하셨다. 산수적 의미의 70의 7승 개념이 아니라 그치지 않는 사랑으로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뜻이렸다.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은 접히지 아니한다. 나는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어려운 지체들이 미숙함을 자주 보이면 손을 접는 경우가 다반사다. 말씀을 알아가고 묵상함을 즐겁고 쉽다.
늘 적용에서 문제다.......

2016년 6월 7일 화요일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23:13)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의적 혹은 악의적인 감정으로 불순종하는 성도에게 징계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채찍으로 그를 때리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훈계하는 것을 멈추지 말 것을 지혜자는 권면한다. 물론 여기서 채찍이 나타내는 의미는 폭력성은 띈 '체벌'의 방식이 아니라
'징계'를 행할 것을 말한다.

하니님은 이를 통해 그 영혼을 지옥에서부터 건저내신다.(잠 23:14) 그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내면에 남아있는 죄성의 심각한 부추김으로 인해 죽음(교회로부터의 이탈)의 길로 나아갔더라도 아버지께서는 돌이키실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징계를 행함에 있어서 오늘 우리가 이런 가르침에 취약해져 있기에 실행력에 있어 미흡하다. 그전에 권면과 권징이 시행되기에 앞서 신앙의 교육을 어린시절부터 공급받아 왔더라면 이를 시행함에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신자가 성장함에 있어서 과격함과 미숙함이 드러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은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 일수도 있다.
(혹은 그 성도가 가짜이거나)

물론 이런 성도들에게 권징을 행함에 있어서 '비판'과 '권면'은 올바르게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전에 나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보지 못함은 매우 치명적이다.
이는 내가 사랑이 없다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다. 이런 손에 채찍이 쥐어지면 사랑의 징계가 아닌 가학적인 폭력으로 번진다. 교회내에서 자신이 옳고 타인이 옳지 않다는 태도는 위험하다.

이런 모습에 묘한 방어적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되는데 그럴때 내 뱉는 말은 늘 이렇다.
"나도 잘 못하지만...그건 아니지 않나?"는 식의 태도 말이다. 자신을 경계하며 신중히 뱉는 자세라면 다행이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돌아본다.

이런 태도로 인해 상대의 영혼이 가격받는다면 그것만큼 슬픈일은 없을 것이다.
더 안타까움의 한숨이 나오는것은 치명상은 내가 입는다는 것에 있다.
"주님의 눈은 지식을 보존하시며 범죄자의 말을 무너뜨리는데 있다"(잠22:12)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은 결국 자신의 백성에게 제대로 된 훈계로 들어갈테지만 범죄한 자의 말은 무너뜨리신다. 묘하지 않은가?... 내가 사랑으로 훈계함을 잊고 상대를 정죄로 내뱉었어도 주님의 말씀은 보존될 것이지만 나의 말은 무너질 것이다. 치명상도 이런 치명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죄조로 내뱉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보존하시니 마음껏 내뱉으라는 말은 미련한 처사다. 상대에게 올바른 권면을 전하기 전에 먼저 매 맞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2016년 6월 3일 금요일

관계의 어려움

결혼을 했음에도 내가 아직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경 못쓰는 것을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도 성장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늘 아내와 함께 본가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머니와 아내의 심정을 못헤아린 것 같다.
괜한 눈치일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새삼 말씀의 제 1차적인 적용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도 틀린말은 아니라는 것을 돌아본다. 이런 상태로 무슨 '신학'을 하겠는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져있음을 확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오면 자연히 이웃에게로 방출될 수 밖에 없다.

사랑은 개인만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
사랑의 시초석이자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은 사방을 감동감화 시키고도 남는다.

그래서 사랑이 넘치다 보면 자연히 상대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우리안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에 사랑을 온전히 누리려고 할 때 방해받을 수 있다.
부지런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먹지 못하면 사랑을 키우지 못한다.

관계의 서운함과 갈등은 사랑이 부족함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2016년 6월 1일 수요일

청년들의 영광, 노인들의 아름다움

청년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요, 노인들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 20:29)

청년시기에 주어진 젊음이란 특권은 많은 도전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지긋이 들게되면 생각에 담아둔 것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기 마련이다.

육체적, 정신적, 상황적 배경등에 자연스레 제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언급한 "모든것에 시기가 있다"는 격언은 매우 일리가 있다.

지혜자는 청년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라 말한다. 아무래도 젊을 때 하나님께서 던져주시는 은혜와 소명등에 열정적으로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때 허락되는 체력이 고된사역을 감당케하고 말씀을 배움에도 도전적으로 몰입하게 한다.

청년의 시기에 쥐어지는 한시적 은사는 체력과 젊음일 것이다. 그래서 한창이라도 어릴 때 회심한다는 것은 굉장한 호사를 누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만큼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하나님께 더 집중하여 사역에 임하니 말이다.
체력까지 겸비되니 말씀이 지시하는 삶에 전투적으로 돌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들이 취하는 아름다움은 백발이다. 청년들이 남아도는 힘으로 돌격적인 삶을 보여준다면 노인들은 현명하고 사려깊은 지혜의 삶을 살아낸다.

육체적 제약이 크지만 노인의 머리가 '백발'인 것은 그간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들에게도 청년의 시기가 있었고 다른면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영접하고 섬겨왔을 것이다. 노인들은 이제 자연스레 '삶' 자체가 자연히 복음을 드러내는 상태로 여겨진다.

이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도 신앙의 상태가 변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뼈아픈 권면일 것이다.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 질수록 추악한 형태를 띄기 마련이다. 죽음직전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평안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신자의 노년은 아름답다 칭한다.
신자에게 죽음은 죄짓는 것을 그치고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히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J.C라일은 힘이 남아도는 청년시기에 신앙의 열심을 갖고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서는 섬길 힘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청년때 부지런히 훈련받은 경건은 나이가 들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후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를 통해 교회직분에도 나이가 중요함을 본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 사고에 자유하지 못한 것을 지난 공동의회를 통해 확인했다. 연륜이 되야 장로로 섬길 수 있다는 사고는 일부는 맞지만 정확히는 아니다.

장로교회 헌법이 장로의 임직나이를 30으로 정한것은 성경적이라 볼 수 있다. 가장 신체적으로 왕성한 시기임과 동시에 활동적으로 섬김사역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교회의 재량에 따라 나이제한을 조절할 수 있지만 직분에 대한 부름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단, 교회를 통해서 부름받을 뿐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운규정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어느정도의 지교회 재량이 가용되는 것이라 본다.

만일 이것이 경험과 연륜이 중요시 되는 결론으로 회의가 흐른다면 나이있는 장로와 젊은 장로를 함께 세우는 것도 대안이다.

적극적 활동은 젊은 장로가 맡는 반면 계획과 방향제시에 있어서는 나이든 장로가 적합할 것이다.

다만 한국교회에 이런 것들이 성립하기 위해어는  많은 시간과 세대들의 순교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