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8월 21일 일요일

교육을 생각하며

미래 교회세대에 희망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밖에 없다.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에 자라나는 후세대들이 올바른 분별적 사고와 경건성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

16-17C에 성경을 근간으로한 신앙고백서의 탄생은 그런 일환이였다. 그전에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 번역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자라나는 신앙세대에게 가장 기초적인 교육은 성경읽기이며 그다음은 '교리' 학습이다. 제자훈련, 큐티모임등 여러 일환의 프로그램이 있지만 어느것 하나 균형있는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을 내린다.

성경안에 경건생활의 기초법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본문탐독은 중요하며, 삶을 살아가는데 말씀을 적용하는 측면에서 분별력을 장착시켜주는 역할은 교리이다.

그 다음에 신앙을 근간삼아 시대의 기술과 역사 흐름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 시간, 노력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그분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 대로 신자의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라나는 후세대에 이 모범을 솔선해서 보이고 가르쳐야 할 의무를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았기 때문에 고민해야한다.

지금의 대다수 교회들은 교육의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실정이다.
의식이 있는 교회와 신자들이라면 당연 이 비참한 현실가운데서 진리의 깃발을 나부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실은 처참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2016년 8월 2일 화요일

코메니우스의 교육목적

[코메니우스의 교육목적]
"모든 사람이 모든 주제를 철저함(방법)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확실하게 하는 것."
1. 모든사람(every one)은 지금 전체적인 교육(universal education)
의 유익을 받아야만 한다.
2. 그들은 모든 내용(every respect)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3. 그 결과로 그들은 전적으로 문화인(Wholly civilised)이 되어야 한다.
- 판소피아 교육 中 -
코메니우스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모든 성도는 '자유로운 의무'하에 신학을 교육 받아야함이 당연해 보인다. 혹자는 교만을 이유로, 혹자는 무용을 이유로 성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침에 있어 여러 거부감을 나타낸다.
나는 건강한 목회자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 신학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어봤다. 하지만 고전속 선배들의 교육관을 탐구할수록 그들은 성도에게 신학해야함을 힘주어 요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교육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삼위일체였다.
그리고 교육관의 근거 구절은 로마서 11:36, 골로새서 1:28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하여 소급되는 사물의 지식들이 참된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바라보고 그분을 향하여 다시 소급되지 않고서는 온전한 지식을 살아낸 것이라 볼 수 없다. 거기에 전체지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권면한다.
코메니우스가 위의 목적을 오늘날에 비추어 보면 불신자라 할지라도 전체교육의 혜택을 누릴 자유는 있다.
보태서 16C 신학자 부카누스의 견해를 빌려서 설명하자면 불신자도 신학을 배울 수 있지만 적용할 수 있는 대상들은 오직
성도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즉, 코메니우스의 교육관 속에는 참된 지식을 전달해야하는 전도적 사명도 담겨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란 강조가 맘에 확 와닿는다.
가르치는 자는 참으로 더 깊이 배우고 겸손해야 함을 숙지한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 내의 장로파

[웨스트민스터 총회내의 장로파]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파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장로교가 신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무리와 단순히 유용하고 실질적인 수단으로 본 무리입니다. 전자의 대표는 스코틀랜드 총대들이였고 후자는 에드워드 레이놀즈였습니다.

같은 장로파인데도 서로 다른 이해의 차이에 한번 더 놀랍니다. 다만 장로회가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함으로 해서 그들이 장로회가 최고다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 근거를 토대로 이것이 지상에서 가장 성경적으로 교회를 운용할 수 있는 방법임을 제시한 것이라 봅니다. 물론 그들은 장로회체제를 당시 영국사회(?)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것도 있었습니다.

후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놀랐습니다. 어떤 이해로 그 주장을 했는지는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신학적 위기가 코앞이고 내부적으로도 이런 갈등이 있었다는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첨예한 상황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조지 길레스피 경 입니다.
결론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어서 나오기를 기다립니다.....아 궁금하다. 책에서도 싹이 나오나? 싹수(?)있는 책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