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9월 26일 월요일

어찌 근심이 없을쏘냐?

사람이 구원받은 이후에 근본적인 근심과 걱정은 해소되지만
이 지상을 살아가면서 죄성들로 인해 괴로움은 남아있다.
지상교회의 치리는 완전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인하여 온전한 것은 사실이다.

성도는 이러한 사실을 말씀에서 부지런히 확인하고 적용하며
교회가 올바르게 운영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반드시 교회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누리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다만 개인의 욕심에서 자유하지 못할 시 교회에서 일어나는 파급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직분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은 교회전체에 균열을 가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을 맞이함으로 인해서 찾아오는 근심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기도와 인내로 상황을 지켜보지만 당장에 일어나는 사안에 대해 상처받는 영혼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상화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 뜻을 분별할 것인가?
머리로써는 알지만 적용에서 올바른 본보기의 선배들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너무나도 힘들다.

장로교회의 정치가 한 번도 시행되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다.
물론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보편성을 띄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장로회라는 치리를 채택한 이 가운데서 교단의 체계는 성경을 토대로 이뤄진 것이기에 이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 치리제도라 믿는다.

온전한 장로회 시행이 가능할까?...지금으로써는 아직 미흡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너무나도 갈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답답할 노릇이다.

2016년 9월 12일 월요일

듣는것

잠언1장을 다시 묵상했다. 꽤 오랜 공백을 두다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독대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참 달콤했다... 이렇게 좋은 시간임에도 하루가 고되서 퍼지기 일수였다.

그런 시간들도 필요하다고 하지만 개인의 참된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강하게 누리지 않던가?
대체 뭣이 중헌디?~ 란 말이 뇌리를 스친다.
하나님 말씀 듣는것보다 좋은것이 어디있겠는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잠언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나
그 지혜는 듣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듣는다는건 곧 순종과 직결된다.

지혜자 역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강조하거니와 적용하면
1000번의 회개보다 단 한 번의 순종이 더 가치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억지 눈물을 토하고 중언부언 기도하며 특정구절만 달달달 외우는 것보다.

단 한 구절이라도 영혼을 다해 읽고, 짧더라도 창자가 끊어질듯이 기도하며, 삶에서는 무게있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 생각한다.
이것이 힘들지만 인도하시는 이가 계시기에 믿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속도보단 방향"이란 격언이 여기에도 어울릴 것 같다.

사실 신앙의 성장에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속도보단 방향"

인생의 성공여부, 즐거운 인생관 이런것보다...
나의 신앙의 좌표가 제대로 인도받아 움직이는지 분별하고
점검 받아봄이 중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리석어서 말씀을 읽을 때 특히나 잠언에서
성공요소들을 찾으려고 한다. 무언가의 학습법에 적용한다던지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찾는다던지에 말이다.

종종 일부 각 교회 청년들에게 아침마다 잠언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아침에 출근할때와 일터에서 얼마나 힘이되는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사실이라면 참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단지 이 친구들의 삶에서 고백한 내용과 달리 굉장히 큰 결함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 과연 말씀을 어떻게 읽은걸까?란 생각이 물씬 밀려온다.

한편으로는 나도 함부로 적용을 내뱉고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하다. 듣는다의 의미에서 입술을 여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자. 들어보지도 않고 내 선상에서 자유롭게 해석하여 벌어진 결과에 대해서는 사실 유구무언이다.
물론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들떠도 안봐도 되는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입술을 여신다는 것 자체가 몸둘 바를 모르는 일이다.
그 말씀을 온전히 듣고 있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행복한 일이다.
안듣거나 떠들기 급급하다는것은 참으로 곤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