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두 렙돈 넣은 과부(막 12:41 - 44)

21C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사회이다. 여전히 빈익부 부익빈의 격차가 크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극단적인 빈곤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이다. 특히나 한국은 현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혼돈한 상태이지만 적어도 최극단의 빈곤은 벗어난 국가중 하나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받은 은혜로인해 교회가 양적으로나 규모적으로나 성장했지만 이것을 모두 은혜로 간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초대교회나 현재나 우리는 여전히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의 만연한 시대속에 살고있고 풍족함은 우리의 신앙의 터전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소비문화는 신앙의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두렙돈을 바친 여인의 모범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자의 태도중 하나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여인의 신앙모습을 모험적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하고 미천한 신분이다. 당시 극빈층의 약자에게 두 렙돈이란 굉장히 큰 금액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기 재산 모두를 하나님께 바쳤다. 주기도문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옴을 알고 삶으로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족한 사람이였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신앙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소개하신다. 하지만 이 말씀은 강단아래에게 앉아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거북함을 교차시키는 말씀으로도 유명하다.
기성교회의 목사들의 잘못이 크다. 진정한 신앙의 모범으로써 우리에게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규모성장을 위한 구절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설교로 이 구절을 전한다 하더라도 뿌리 깊은 상처가 있는 성도들에게는 이 말씀에 대한 설교와 적용은 여전히 거북함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을 여전히 언급하고 계심은 우리가 그만큼 물질에 찌들어 있다는 얘기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란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도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확인하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늘 신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들에게 풍성한 사랑을 안겨주신다. 연약한 우리는 현재적 상황에 치우쳐서 이러한 신뢰에 힘을 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리고 주변의 상황들 가운데 무분별하게 요구되는 경우도 넘치기 때문에 교회는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길 때 신중해야 한다.
현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그러나 두렙돈이 굳이 '돈'을 뜻한다고 보지 않는다. 정녕 물질적인 재산이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면 자신의 '재능'을 바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재능' 또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당신께로 다시 소급됨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받은 모든 것들이 위에서 부터 나옴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소유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지 우리는 그저 빌려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내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것은 교만과 욕심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자 엄연한 죄이다.

두 렙돈을 바친 과부가 부러워진다. 이런 용기는 하나님께 극진한 사랑을 받을 때 비롯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두터움은 성령님과의 교제가 그만큼 깊고 풍성하다는 얘기겠다.
주먹에 꼭 쥐고 있는 그 물질을 기쁨으로 바쳐야 할 때인듯 싶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내면

다양성과 갈등 그리고 화합의 공존...
그러나 결국에는 어긋남의 결말들...

죄에 대해 생각할 때 나를 돌아보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비출때  그림자도 짙어진다.
뿌리를 뽑아내고 근절시키는 그 은혜가 드리울 때 나의 괴로움이 드러나는것은 괴로우나 기쁨이 그분이기에 위안을 얻는다.

아버지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회복시켜주소서....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청년의 때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지혜자는 가장 젊은 날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힘이 넘치고 생명력이 넘치는 때는 청년의 시기다. 인생의 가장 유력한 시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정말 복된 일이다. 나이가 먹어서는 자연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퇴행되 의욕이 저하되기 마련이다. 한시라도 그리스도를 먼저 뵌 자들은 청년의 때에 가장 많은 인도를 받는다. 어려서 부터 회심할수록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다만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유효하다.
청년의 때에 열심이였어도 돌아서는 영혼들이 교회안에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에 열심이였느냐가 중요하다. 교회안에서 다른 이익이나 여타의 봉사등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 국한해 버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은혜의 범위를 현저히 좁혀버린 처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될 수 있는한 신자에게 가장 많은 복을 내려주시며, 그것은 당신을 잘 섬기기 위한 방향으로 인도받는다.

하지만 가장 큰 선물은 젊은시기에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지성이 맹렬하게 타오를 때다.
인간의 젊은날에 주어지는 체력이라는 선물은 보편적인 은사다.  이 시기에 경건을 잘 훈련받아오면 늙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다.
18C의 목회자 J.C라일은 청년의 때에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늙어서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어서 방탕하게 놀다가 죽기전에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거짓된 고백이다. 성경에서 그런 경우는 십자가 우편에 메달려있던 강도 한명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씀의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악의 목끝에 메달려있을지라도 당신의 백성은 끝까지 구원하신다는 위로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전체게 임종전에 신앙을 고백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언급한 어느곳에도 없다.
성도의 인생에는 성화라는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열매 맺는 삶 없이 천국문에 발을 들이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구원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달린 것이나 이 지상에 우리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과정가운데 복음의 전파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과정이 반드시 동반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젊었을 때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은 복된 일이다.
될 수 있는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을 힘써야 한다.
지상에 완전한 순종은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죽어서 그 얼굴을 뵙기 전까지
신자의 경건을 책임지신다. 청년들이여 이제 깨어 굳게서서 남자답게 강건할 때다!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말씀, 성례, 권징

길가다가 타 교단 권사님이나 집사님들이 주시는 전도지를 예의상 받는다. 그 분들의 신앙을 크게 의심하지 않지만 전도지에 소개된 교회는 의구심을 많이 들게 한다.

종교개혁선배들의 작업중 가장 큰 수확은 말씀에서 올바른 교회를 분별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다는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적 해석을 반박하면서 얻어낸 성과인데, 그것은 말씀, 성례, 권징이다. 쉽게 설명하면

올바르게 복음을 선포하고 잘 가르치고 있는지
성례를 말씀에 근거하여 잘 시행하고 있는지
올바른 치리와 질서로 운영하고 있는지

3기준다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이 오랫동안 묻혀있던 한국교계는 위의 3기준에 모두 미달된 상태였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희망적이게도 소수의 교회들이 종교개혁의 표어를 다시 되새기고 진리의 깃발을 거머쥐는 좋은 움직임들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괴로운 것은 이 교회들중에서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잘못 오해하거나 의미없는 남발을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발생된 잘못된 서열적 문화가 깃들어 교회의 치리와 질서 형태를 뭉게는 경우가 근래들어 발생하고 있다.
개혁주의 지향이란 슬로건을 들고 바른 복음 선포를 지향함으로 방황하는 성도들에게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다. 다만 규모가 커짐으로 해서 오는 치리의 반향이 부작용이였다.

올바른 말씀선포와 성례까지는 어느정도 회복되는 듯 했지만
적용에 근거를 두는 치리적 부분에서 함정을 보였다.
개혁주의 슬로건을 내걸지라도 교회정치에 대한 부분까지 심도있게 몰입하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더 소수인듯 하다.

그렇게 되면 상식없는 치리를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앞으로도 많은 고민이 있겠으나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해야 할지 근심이 쌓인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