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월 11일 수요일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경건한 삶을 꾸준히 단련해온 신자가 고백할 수 있는 기도이다. 에스라는 자신의 죄를 넘어 민족의 죄까지도 묵상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용서를 구한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으로 단단히 이성과 감성을 무장한 자만이 이런 기도가 내뿜어져 나온다. 공동체의 잘못까지 자신의 죄로 여기며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소속된 공동체가 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직분자나 죄를 범한 대상자들을 향하여 정죄와 비판을 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선 그것 또한 나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가져 보았는지 자문하게 된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조건만 갖춰지면 얼마든지 실컷 죄를 지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단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에 해당 죄에서는 잠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타인보다 자신이 나은 줄 안다. 
지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의인인 것 처럼 행동하며 쉽게 지적을 가한다. 정죄의 돌팔매는 쥐기 쉬우나 정작 자신이 돌을 맞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자신을 복속시키지 못하면 권면에 사랑은 담기지 않는다.
말씀에서 에스라는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고통이 조상의 죄에서 부터 자신을 포함한 이 세대의 죄 때문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고백하고 있다.
동시에 진노중에도 긍휼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지 않으며 건져주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다.

각 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까지 교회는 문제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란 없다는 말이 대변하듯 초기에 건강하게 세워졌던 교회도 말기로 가면 병적인 부패가 발생된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경건자는 늘 양육되며 하나님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완전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병든 교회안에서 발생한 죄를 나의 죄로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심리는 좋지 않은 결과를 자신이 자초한게 아니므로 이웃들을 탓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자라면 이 결과 또한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궁극에는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줄을 믿고 기도하며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래도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 쉽지 않아 보이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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