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7일 화요일

아픔을 교훈삼아

한병수 목사님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지교회 치리의 안타까움과 어려움에 대한 호소를 서로가 나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기도와 그 아픔을 교훈삼아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함을 배운다. 이 상황에서 경건한 어른으로써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의 키는 하나님께서 쥐고 계심을 보게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교회 선함은 하나님께서 키우시고 기준을 잡으신다.

이럴수록 선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기도하며 행동에 임해야 함을 반성하게 된다.


기적의 간과(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인간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 가능케 되는 상황을 보고 기적이라 이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엎을 때도 같은 표현을 쓴다.

특히나 종교성이 있는 자들은 기적을 '신'의 영역으로 여기는데 우리들 앞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한 두번씩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현대의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적'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우리는 많은 일들을 설명할 수 없다. 특히나 가까이에 기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사실 내가 예수님께 구원을 받고 신앙이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기적처럼 느껴지지만, 신앙생활이 익숙해질 수록 그런 기쁨과 역동성은 차츰 반감되기 마련이다.
교회의 다양한 내부적 상황와 세상의 외압적인 요인은 때때로 신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이런 시기가 경건이 흔들리는 시기인데 사실 신자 모두가 답을 아는 사안이지만 버텨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는 반복되는 일상과 신앙생활의 회의로 인해 기적 같은 상황들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신자된 자의 삶은 날마다 기적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도 기적이거니와 그리스도 공동체와 교제한다는 것도 기적이다.
자연 만물의 운행속에 숨겨져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고 무엇보다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우리는 인생가운데 요행을 한 방 쯤은 바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인생의 극단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에도 침묵을 답변으로 받는 일이 얼마나 수두룩 하던가?......

이런 것을 느낄 때 쯤이면 인상이 반쯤 찌푸려지고 한 숨이 푹푹 쉬어지면서 원망의 촉수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이런 것들이 하나, 둘 누적되면 절망밖에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만나게 한 과부가 이런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부의 삶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역경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가득한 인생이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 여인을 만나게 해 모자가 먹고 살도록 해주는 기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전부인 자녀를 빼았겼을 때에 그녀는 처한 상황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여인은 여기서 회개한다.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죄에 있고 그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구했다. 원망과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결코 기적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것을 엘리야에게 고했다는 것은 그녀가 아버지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베푸실 때에 인간을 통해서 베푸신다. 어쩌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을 눈앞에서 체험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구원자체도 기적이지만 눈앞의 성도들의 교제와 교회가 치리되는 것과 그밖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랍다. 한시도 인간과 떨어지실 줄 모르는 분이다. 무뎌진 우리는 어쩌면 이런 기적들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아픔의 결여

탁상신학의 결과는 현실과 동떨어진 삶의 적용이라는 것에 있으나 그것은 곧 아픔의 결여로 볼 수 있겠다. 양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제자리에서 제아무리 많은 이론과 간접경험들을 숙지한다 할지라도 아픔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죄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당해보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당해봤어도 너도 당해봐라는 식이 많다.

단단한 자존심과 고집이 철옹성 같은 자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반대로 설득하려 한다. 스스로가 생채기를 가하고 있음에도 감지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동안 무뎌져 온 감성은 타인의 마음을 쉽게 짓 밟는다.

이것이 신앙적 훈련으로 번지면 슬픔을 잊은 사람이 되고 만다.
양들을 바라볼 때의 애통함과 슬픔이 없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흐려진 것과도 같다.
목자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더욱이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신앙적 싸이코패스와도 같다. 데이비드 웰스가 지적한 '양심의 실종'은 불신자들을 향한 말이 아니다. 교회 내에 양심이 실종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양심의 회복이 시급한 것은 성도중에서도 대다수의 목회자 직분에 속하는 것 같다. 자신들만의 아픔에 갖혀서 성도들의 아픔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결과다.
이 세상에 안힘든 사람은 없다. 양들을 위해서 섬기는 직분을 걷는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이 더 많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부당한 것 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자신들이 인내하고 있다고 선언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더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이해를 요구하지만 사실 서로가 정 반대인게 정상이다.

이런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 터무니 없어 보인다는 '복음'이다.
서로가 일치되지 않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이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의 결여로 나타나는 것은 '슬픔'에 대한 무감각과 '아픔'에 대한 무지다. 언행의 표현에서 그것이 잘 묻어난다.

자신도 아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통증에 무감각 할 수 있다. 게다가 통증에 무감각한 자들이 발휘하는 힘은 무시무시하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에 괴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괴력에 휘둘리는 것은 결국에 자신 주변의 이웃일 뿐이다....

가급적 나는 괴롭더라도 아픔을 더 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아픔에서 회피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가려 하기에 슬프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나 살자고 뛰어내린 경험이 있기에...더욱 그렇다.

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전갈채찍(왕상 12:11)

열왕기상 12장 11절에서 르호보암의 젊은 가신들은 그가 솔로몬의 권력보다 한층 더 크니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라고 청한다. 사람이 커다란 권력을 쥐었을 때 대체적으로 그 힘을 휘드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여진다.

앞서 아버지인 솔로몬이 육신 생활로 인해 고역을 짊어졌던 기성세대는 백성들의 불평이 높아졌기 때문에 선으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기를 바랬다. 불평이 많은 백성들을 대할 때에는 신중해야 하나 르호보암은 경솔한 목양자였다.

그는 결국에 그들에게 아버지대보다 더한 노역을 짊어지게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양상은 쉽게 발견되고 있다. 성도들의 불만은 이전 섬김에서 격는 고충과 상처들로 얼룩져서 나타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매우 신중해야하며 영혼(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한다.

르호보암의 모습은 드러난 전갈채찍이지만 오늘날에는 그 채찍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목회자가 이 길이 옳다고 한 결정이 전갈채찍인 경우도 많다. 경우에 따라 그런 모습은 대부분 개인의 욕심일수도 있다.

전갈채찍은 어찌보면 명예욕이 생겼을 때 가장 잘 쥐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르호보암의 이런 패악함은 아버지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다.(왕상 12:15) 솔로몬의 죄로 인해 나라를 분열시키려는 뜻이였다.

특히나 목자의 죄는 교회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경고로도 보인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은 특히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고역을 삼키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더 머물러야 한다. 이런 상황일수록 피폐해지는 영혼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힘이 들지만 아버지께서 일하시기에 우리는 버틸 수 있다........

2016년 12월 18일 일요일

[특종 P.144의 글]

특강종교개혁사 페이지 144로 가면 "킹 제임스의 암흑기에 준비된 자들"이란 제목의 글이 있다.
교회사를 훑어 보면서 생각하게 되는건 사실 이 지상에서 교회의 황금기는 사실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이다. 그나마..당대의 소수교회 및 소수 대학자들의 눈부신 의식이 기록으로 남아 선명히 후대에 전해져서 귀감이 되는 것이다. 종교개혁기의 의식이 지금 현실에서는 굉장히 부럽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당대를 살아갔던 이들에게는 착잡하고, 매우 불만이고, 억지스러운 정책과 압박에 성질머리가 뻗쳤을 것이다.
그러나 그 작은 귀감이 결코 스쳐지나갈게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남기신 흔적이라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이 코너의 마지막 메시지는 '희망없는 시대에 절망할 필요 없는 이유'로 마무리 되는데 그것이 바로 '다음 세대'를 위한 준비이기 때문이다.
지금 한국교회의 20후반에서 40까지의 청년세대는 샌드위치라는 수식어를 붙이고는 한다. 꽉막힌 기득권과 교육의식은 높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세대 사이에 끼어있다. 그래서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로 암흑기에 놓여있을지도 모른다.
한국에 개혁주의가 이렇게 널리 알려진 것은 정말 얼마 안된다.
아니...6년전에 개혁주의가 알려지기 전에 교리(신앙고백서)가 먼저 알려졌다. 지금은 조금씩 장로교회 정치가 과연 한국실정에 맞는 것인가란 질문도 이제는 오고가는 형편으로 폈다.
냉정하게 말해서 장로교회 정치가 한국에 온전하게 실행된 적은 한 번도 없지만, 이제 시작인 셈이라는 것은 그동안 시커먼 흑암을 신앙의 선배들이 묵묵히 걸어왔다는 뜻이겠다.
적어도 이런 고민들은 하니까 말이다.
이렇게 조금이라도 알려지기 전에 준비를 해왔던 분들을 생각해보면 어떨까? 어렴풋이 듣기로 대략 10명이라 치면 9명이 떠날 정도라 한다. 얼마나 고독하고 외로웠을지 짐작이 간다. 그 가운데 단 1명이 그자리를 지켜서 묵묵히 버텼기에 특강 종교개혁사란 책도 나왔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 이유는 복음의 다음세대 때문에 그렇다.
종교개혁도 마찬가지의 정신을 함양했을 것이라 본다. 지금 현실도 중요하지만 다음 세대에 말씀을 제대로 전하기 위해, 온전한 교회를 가꿔나가도록 하기 위해 그들이 연구한 진수를 후대에 남겼다.
지금은 절망도 좀 있고 불만도 많지만 후대에 역사적(?)인 신학자 및 목회자가 우리나라에 나올 수 없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둠 가운데 빛'이 어떤 의미인지 어렴풋이 알아간다.........

2016년 12월 17일 토요일

스코틀랜드 국민언약(1638)의 세계사적 의의

1638년도에 스코틀랜드가 거룩한 분노로 행동한 이 사건은 세계사적으로도 아주 중요한 사건입니다. 여기에는 국왕이 종교와 법과 신하의 자유를 존중한다는 조건 하에 충성을 하겠다는 내용이 포함되는데, 바꿔 말하면 이것은 국왕이 우리를 존중하지 않으면 무력으로 저항할 수 있다는 정당성까지도 부여했던 것입니다.

- 특강종교개혁사 p.143 -

2016년 12월 16일 금요일

명분없는 전쟁

자고로, 정통성에 문제가 있거나 통제가 잘 안되는 나라의 권력자가 쉽게 유혹을 받는 것이 바로 이런 명분 없는 전쟁입니다. 그걸로 국론을 통합하려는 겁니다.
(특답이 p.127)

시편 84편

1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장막이 어찌 그리 사랑스러운지요

2 내 영혼이 여호와의 궁정을 사모하여 쇠약함이여 내 마음과 육체가 살아 계시는 하나님께 부르짖나이다

3 나의 왕, 나의 하나님, 만군의 여호와여 주의 제단에서 참새도 제 집을 얻고 제비도 새끼 둘 보금자리를 얻었나이다

4 주의 집에 사는 자들은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항상 주를 찬송하리이다(셀라)

5 주께 힘을 얻고 그 마음에 시온의 대로가 있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6 그들이 눈물 골짜기로 지나갈 때에 그 곳에 많은 샘이 있을 것이며 이른 비가 복을 채워 주나이다

7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어 나아가 시온에서 하나님 앞에 각기 나타나리이다

8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여 내 기도를 들으소서 야곱의 하나님이여 귀를 기울이소서(셀라)

9 우리 방패이신 하나님이여 주께서 기름 부으신 자의 얼굴을 살펴 보옵소서

10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

11 여호와 하나님은 해요 방패이시라 여호와께서 은혜와 영화를 주시며 정직하게 행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아끼지 아니하실 것임이니이다

12 만군의 여호와여 주께 의지하는 자는 복이 있나이다

2016년 12월 6일 화요일

기쁜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눅15:7)

한 영혼이 아버지 품으로 돌아올 때 이미 아버지 곁에 있는 지체들이 있는 것보다 더 기뻐한다는 말씀이다. 회심은 그만큼 아버지께서 총력을 기울이시는 일 중 하나라는 얘기다.
하지만 현대 한국교회에서 이러한 회심을 경험하는 지체들을 향해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가?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것 만큼 아니더라도 진심으로 활기가 넘치는지 모르겠다.
혹은 진정 아버지 앞으로 돌아온 지체들을 향해서 기성교회의 목회자들은 어떻게 반응하고 있는가?

양떼들을 돌볼 직무를 받은 직분자들은 이런 일에 세심히 주의를 기울이면 안된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로 각 지체들의 영혼 하나하나가 진심으로 회개를 행하는지를 살피지 않으면 안된다. 특별히 성도들은 목회자의 영혼상태가 진심으로 아버지를 사랑하는지를 점검해야 한다.

비록 그가 부족한 목회자여도 다시금 아버지의 참뜻을 알고 돌이켜 강단으로 나아오는 모습을 보는 기쁨이 우리에게 있었으면 좋겠다. 아버지께서는 지금도 쉬지 않고 일하시며 계수된 백성들을 모으시는데 총력을 기울이신다.

아버지의 일을 아무도 막을 수 없으며 우리가 눈을 붙이고 잠이 든 후에도 양들을 돌보시고 먹이시며, 길을 잃었을 때는 다시 찾아오신다. 특히나 우리안에 있는 양들보다 이탈해 있던 양을 되찾아 오시는 것을 기뻐하시는 아버지이시다.

그만큼 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게 되는 것은 교회안에서도 대축제이자 기념적인 일이라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그날까지 우리는 말씀을 땅끝까지 전파해야 할 사명을 띈다. 우리의 직장, 일터, 가정 말씀이 퍼지지 않는 곳은 없다.
성령께서 당신의 말씀을 통해서 일하셔서 영혼들을 불러들이는 광경은 기적을 보는 것이다.

나는 다시 한국교회가 이런 기적을 목도하는 일에 민감하게 반응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건물증축보다.... 성도수 충족보다... 진심으로 한 영혼, 영혼에게 하나님의 사랑과 말씀을 전달하는 재기능을 되찾기를 기도한다.

아버지 도와주시옵소서. 비록 소수의 교회가 한국에 남을지라도 진정으로 아버지의 사랑을 삶으로 살아내도록 이끌어 주시옵소서. 아버지의 뜻이 곧 우리의 뜻이나이다.
당신 뜻대로 행하옵시고 나아가시옵소서. 사랑하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드렸나이다. 아멘.

어머니의 책 추천

초등학교 시절에 '삼국지'에 빠져서 내내 그것만 읽었던적이 있다.
당시에는 (고)요코하마 미쓰테루 화백이 그린 '전략 삼국지 60권'이
유행하는 시기이기도 했다. 주변 친구들은 너도나도 삼국지에 빠져서 무용담을 늘어놓기 일수였다.(당시 삼국지 게임도 많이 출시됐던 시기였다.)

유행따라 내내 삼국지만 읽던 내게 어머니는 '열국지'를 추천하셨었다. 당시 삼국지를 무척 좋아하던 나는 재미없는 '열국지'를 왜 읽어야 되냐고 물었다.

어머니는 딱 한마디만 하셨다.
"중상모략을 담은 책이니까."

어머니는 신앙생할을 시작하신뒤로 정치는 늘 중용을 택하셨다.
나는 그것이 무슨 이유인지를 안다. 정치에 '중도'는 없다라는 말이 있긴 하지만 어머니의 입장은 '중용'이 없으면 '좌', '우'도 없다는 주의셨다. 신자로써 어머니는 세상정치는 분별해야 된다는 입장이셨기 떄문이다. 그래서 진보든 보수든 세상이 지향하는 바는 결론은 하나라고 넌지시 알려주셨다. 이제와서 돌아보면 예수믿는 신자로써의 정체성을 가지고 올바른 '공의'를 택하라는게 어머니의 가르침인듯 싶기도 하다.
세월이 많으 흘러서 이제는 어머니가 그땐 이런 얘기를 하셨다... 이 책을 추천해 주셨다 말씀드리면
"내가 그랬나?..."라고 답변을 하신다. 생각해보니 당시 어머니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 또래다.

어머니께서 지금은 잊으셨겠지만 그때를 돌아보면 왜 열국지를 추천하셨는지 알 것도 같다........
그래서 구매가 고민이 된다.

2016년 11월 16일 수요일

목회/ 찰스 J. 브라운 (서평)

세움북스의 번역신간인 '목회'를 다 읽었다. 이 책은 목회를 준비하는 신학생과 목회자뿐만 아니라 성도가 읽어도 감동과 큰 유익이 있다. 저자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목사로써 올바른 목회가 어떤 것인지를 간결하고도 용이하게 안내한다.
덧붙여 이재근 목사님의 찰스 J.브라운 목사에 대한 소개가 서두에 있기 때문에 그의 목회관에 대해 조금 더 와닿는다. 막상 해설을 건너뛰고 본문으로 들어가도 내용이 그리 어렵지가 않기 때문에 교회를 사랑하는 성도들이라면 편하게 읽을 수 있다.
(하지만 꼭 해설은 읽어보시라......)
그가 자신의 목회 경험을 통해 안내하는 목양법은 원리적이면서도 실천적이다. 특히나 부록에 실려있는 목양에 관한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충분히 고려되야만 할 사항이다. 내가 직간접적으로 경험한 한국교회의 모습은 설교와 목양의 균형이 조화롭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분명히 언급할 수 있는것은 설교가 그렇게 훌륭하지 않더라도 목양의 이행에 성실히 임한다면 목회자의 설교에 대한 이해가 풍성해진다는 것이다. 나는 설교를 듣는 청중으로써 그것을 경험한 바 있다.

"주일의 설교가 좋지 않더라도 최선을 다해 성도들을 심방한다면 설교가 작은 힘이라도 발휘한다는 것입니다. 반면에 좋은 설교를 하더라도 양떼의 가정을 성실하게 심방하지 않는다면 설교의 능력을 많은 부분 잃게 됩니다." - p. 153

나는 이 책을 통해 원리적인 부분에서는 목회가 어때야 되는지를 간접적으로나마 이해 할 수 있었다. 그리고 저자인 찰스 목사님의 목회자로써의 인품이 얼마나 훌륭했었는지를 느꼈다.
그가 목회자이기 전에 그리스도 안의 성도였다는 것을 발견했다. 한편으론 부럽다.
성도들에게 한번쯤은 읽어보시기를 꼭 추천 드린다. 나는 교회의 성도들이 경건한 어른으로써 성장했을 때 반드시 해야할 의무중 하나가 올바른 신학자 및 목회자를 찾는 일이라 여긴다.

"이에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주소서 하라 하시니라"(마 9:37-38)

한 사람의 목회자를 배출한다는 것은 교회의 모든 영혼들이 신중을 기하고 구해야 하는 바다.
오늘날 대부분의 경우와 같이 전체 성도의 검증과 회의 및 투표 없이 담임목사 개인의 면담과 추천서 한장으로 신학교에 지원하는 일이 줄어들었으면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도들 또한 목회자가 어떤 직분인지 목회가 어떤 행위를 하는 것인지를
알아야 할 필요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비록 찰스 J.브라운이 우리나라의 목사는 아니지만 장로교회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스코틀랜드의 한 목회자를 통해 생각들을 다듬으셨으면 하는 장로교인의 마음으로 이 책을 꾸욱...... 추천한다.

2016년 11월 15일 화요일

시편 103편

1 <다윗의 시>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의 거룩한 이름을 송축하라
2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의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3 그가 네 모든 죄악을 사하시며 네 모든 병을 고치시며
4 네 생명을 파멸에서 속량하시고 인자와 긍휼로 관을 씌우시며
5 좋은 것으로 네 소원을 만족하게 하사 네 청춘을 독수리 같이 새롭게 하시는도다
6 여호와께서 공의로운 일을 행하시며 억압 당하는 모든 자를 위하여 심판하시는도다
7 그의 행위를 모세에게, 그의 행사를 이스라엘 자손에게 알리셨도다
8 여호와는 긍휼이 많으시고 은혜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고 인자하심이 풍부하시도다
9 자주 경책하지 아니하시며 노를 영원히 품지 아니하시리로다
10 우리의 죄를 따라 우리를 처벌하지는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우리에게 그대로 갚지는 아니하셨으니
11 이는 하늘이 땅에서 높음 같이 그를 경외하는 자에게 그의 인자하심이 크심이로다
12 동이 서에서 먼 것 같이 우리의 죄과를 우리에게서 멀리 옮기셨으며
13 아버지가 자식을 긍휼히 여김 같이 여호와께서는 자기를 경외하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나니
14 이는 그가 우리의 체질을 아시며 우리가 단지 먼지뿐임을 기억하심이로다
15 인생은 그 날이 풀과 같으며 그 영화가 들의 꽃과 같도다
16 그것은 바람이 지나가면 없어지나니 그 있던 자리도 다시 알지 못하거니와
17 여호와의 인자하심은 자기를 경외하는 자에게 영원부터 영원까지 이르며 그의 공의는 자손의 자손에게 이르리니
18 곧 그의 언약을 지키고 그의 법도를 기억하여 행하는 자에게로다
19 여호와께서 그의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의 왕권으로 만유를 다스리시도다
20 능력이 있어 여호와의 말씀을 행하며 그의 말씀의 소리를 듣는 여호와의 천사들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1 그에게 수종들며 그의 뜻을 행하는 모든 천군이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22 여호와의 지으심을 받고 그가 다스리시는 모든 곳에 있는 너희여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2016년 11월 1일 화요일

나단의 부재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죄는 지적되어야 한다."
- 마르틴 부써(Martin Butzer / 1491.11.11 - 1551.2.28.)
 
"죄에 의해 괴로워하고, 그래서 참 회개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해 사람은 죄인에게 죄를 지적하고, 죄를 들쳐 내야 한다.
이것은 '정죄'와는 다른 내용의 지적이다. 어떤 사람에게 잘못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그에게 그 잘못을 확신시키는 것이다."
교회의 실제적인 예로는 '권징'이 있다. 사랑으로 행해야지만 효력이 있으며 이것이 부재되면 '정죄'의 범주에 속한다.
참으로 어려운 일이지만 교회는 반드시 인간의 '죄'에 대해서 지적해야 할 의무를 띄고 있다. 타인이 하나님께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그가 범한 완악한 죄에 대해서 반드시 지적해야 한다.
대표적인 예로는 나단이 다윗의 범죄를 폭로한 것이다. 특히나 공적인 직분의 자리에 앉은 자가 대대적으로 드러난 죄를 저질렀을 때 그 일이 가져다 주는 파급은 너무나도 크다.
이를 방치했을 시 교회의 질서가 흔들리게 되며 한 영혼뿐만 아니라 여러 영혼을 시험에 들게하는 심각한 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권면과 권징은 신중해야 하지만 시행되지 않아야 할 것이 아니다.
교회가 각 성도들에게 회개할 것을 강력히 요구한다는 것은 '죄'에 대해 적나라하게 언급한다는 것이다. 부써의 표현을 빌리면 죄인이 "나는 죄를 지었다. 나는 은혜를 원한다. 나는 개선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동되고 진전하여, 그리고 죄 때문에 참으로 충격을 받고, 겸손해 하는 단계까지 가게끔 해야한다.
권면하는 자든 당하는 자든 같은 범주에 속해있다. 
하지만 교회 안에 드러난 죄에 대해 적법하게 지적하는 일과 강단에서 회개를 강력히 선포하는 일들이 심각하게 줄어들어 있다.
나단 선지자 같은 존재의 부재는 교회의 기능들을 심각하게 저하시킨다. 현시대는 죄와 공의를 부르짖는 일이 심각하게 어려움을 겪고있다. 하나님이 정의를 부르짖는 곳에 '정의'를 행하지 못하면 그것은 뜻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된다. 마찬가지로 '죄'라고 폭로하고 계신 곳에서 그것을 '죄'라 지적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가 된다.
이 시대의 모든 직분자들은 나단과 같은 치유자로 성장되어야 한다.
다윗이 품고 있던 사악한 악을 강력하게 지적하고 확신시킴으로 해서 하나님과의 깨진 관계를 회복시키도록 도와야 한다.
먼저는 자신부터가 그런 직분잘 성장하기를 바래야 할 것이다....
"상처 입은 양들에 대한 치유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수행을 통해 성취하기를 원하시는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이기 때문이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갈6:1-2)
- 2016년 11월 1일 마르틴 부써의 참된 목회학 제9장을 읽고 남긴 기록

상하고, 상처 입은 양들을 어떻게 싸매주고, 치유할 것인가? -마르틴 부써

첫째, 상처받은 양들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에 의해 치료받아야 하며, 특별히 목회상담자들(영혼을 돌보는 자들)에 의해 치료받아야 한다.

둘째, 이 치료는 상하거나 상처입은 모든 양들에게 주어져야 한다.

셋째, 상처받은 양들을 치료하는데 사용되는 처방과 약에 관한 것이다.

이것들은 일차적으로 모든 그리스도인들의 책임이다.

그리스도께서 결국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살아계시고, 그의 사역을 행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칙적으로 이 사역에 자신들을 헌신해야만 하는 사람들은 영혼 돌봄과 죄에 대한 처방약을 준비하도록 특별히 임명받은 사람들이다. 통치자들 역시 이 관점에서 신실하게 그리고 효과적으로 그들의 직무를 수행하기 위해 영혼 돌봄의 특별한 의사들과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해 미리 준비함으로써 이 사역에 대해 공헌을 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영혼(사람)이 복종하게 하셨던 통치자들의 직무에 속하기 때문이다.
모든 영혼들(사람들)이 옳게 그리고 올바르게 살고, 아버지께서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구너세를 주셨던 그리스도이신 우리 주께 모든 것들 안에서 정직하게 그리고 부지런하게 섬기기 위해 통치자들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수행해야만 한다.



*죄를 인정하고 회개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죄는 지적되어야 한다.

죄인이 "나는 죄를 지었다. 나는 은혜를 원한다. 나는 개선하기를 원한다"라고 말할 정도로 감동되고, 진전하여, 그리고 죄 때문에 참으로 충격을 받고, 겸손해 하는 단계까지 가야한다.
그렇지 않으면, 죄인이 완전히 돌아선 것이 아니다. 그러나 또한 죄인은 그리스도안에서 다시 위로를 받고, 모든 옳은 것을 추구하려는데 온전히 열심을 내고,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그때 그의 내적 존재 안에 있는 상한수족에 의해 고통 받던 상처가 참으로 싸매지고, 치유된다.

2016년 10월 31일 월요일

두 렙돈 넣은 과부(막 12:41 - 44)

21C는 물질적으로는 풍족한 사회이다. 여전히 빈익부 부익빈의 격차가 크지만 대부분의 국가는 극단적인 빈곤으로부터 벗어난 상태이다. 특히나 한국은 현재 정치적으로나 사회적으로나 매우 혼돈한 상태이지만 적어도 최극단의 빈곤은 벗어난 국가중 하나이다.
한국교회는 그동안 받은 은혜로인해 교회가 양적으로나 규모적으로나 성장했지만 이것을 모두 은혜로 간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초대교회나 현재나 우리는 여전히 물질주의와 성공주의의 만연한 시대속에 살고있고 풍족함은 우리의 신앙의 터전을 공허하게 만들고 있다. 결과적으로 우리의 소비문화는 신앙의 성장에 기여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마가복음에 등장하는 두렙돈을 바친 여인의 모범은 예수께서 보여주신 신자의 태도중 하나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 여인의 신앙모습을 모험적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한다.
고대 이스라엘 사회에서 과부는 사회적으로 가장 위험하고 미천한 신분이다. 당시 극빈층의 약자에게 두 렙돈이란 굉장히 큰 금액이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 여인은 자기 재산 모두를 하나님께 바쳤다. 주기도문의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를 몸소 실천한 것이다.
그녀는 하나님으로부터 모든 것이 나옴을 알고 삶으로 고백한 것이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족한 사람이였다.

예수께서는 이 여인을 신앙의 모범으로 우리에게 소개하신다. 하지만 이 말씀은 강단아래에게 앉아있는 성도들에게 은혜와 거북함을 교차시키는 말씀으로도 유명하다.
기성교회의 목사들의 잘못이 크다. 진정한 신앙의 모범으로써 우리에게 설교를 한 것이 아니라 교회의 규모성장을 위한 구절로 악용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무리 좋은 설교로 이 구절을 전한다 하더라도 뿌리 깊은 상처가 있는 성도들에게는 이 말씀에 대한 설교와 적용은 여전히 거북함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이 여인을 여전히 언급하고 계심은 우리가 그만큼 물질에 찌들어 있다는 얘기겠다.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마 22:37)란 말씀은 우리에게 지금도 요구하시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지 확인하신다.
하나님의 관심은 늘 신자에 대한 사랑으로 가득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기꺼이 자신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자들에게 풍성한 사랑을 안겨주신다. 연약한 우리는 현재적 상황에 치우쳐서 이러한 신뢰에 힘을 실지 못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그리고 주변의 상황들 가운데 무분별하게 요구되는 경우도 넘치기 때문에 교회는 이 말씀을 실천에 옮길 때 신중해야 한다.
현대일수록 더욱 그러하다고 본다.

그러나 두렙돈이 굳이 '돈'을 뜻한다고 보지 않는다. 정녕 물질적인 재산이 가진것이 아무것도 없는 자라면 자신의 '재능'을 바치는 것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재능' 또한 하나님께서 신자에게 주신 선물이기 때문에 당신께로 다시 소급됨이 당연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늘 받은 모든 것들이 위에서 부터 나옴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 중에 소유되는 것은 사실상 아무것도 없다. 모든 것은 하나님의 소유이지 우리는 그저 빌려쓰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누리고 있는 것들을 내것으로 착각하는 순간 그것은 교만과 욕심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반역이자 엄연한 죄이다.

두 렙돈을 바친 과부가 부러워진다. 이런 용기는 하나님께 극진한 사랑을 받을 때 비롯된다.
하나님에 대한 신뢰가 두터움은 성령님과의 교제가 그만큼 깊고 풍성하다는 얘기겠다.
주먹에 꼭 쥐고 있는 그 물질을 기쁨으로 바쳐야 할 때인듯 싶다.

2016년 10월 28일 금요일

내면

다양성과 갈등 그리고 화합의 공존...
그러나 결국에는 어긋남의 결말들...

죄에 대해 생각할 때 나를 돌아보며 그 안에 있는 것들이 쏟아져 나온다. 그리스도의 은혜가 나를 비출때  그림자도 짙어진다.
뿌리를 뽑아내고 근절시키는 그 은혜가 드리울 때 나의 괴로움이 드러나는것은 괴로우나 기쁨이 그분이기에 위안을 얻는다.

아버지 나의 마음을 어루만지시고 회복시켜주소서....

2016년 10월 13일 목요일

청년의 때

너는 청년의 때에 너의 창조주를 기억하라 곧 곤고한 날이 이르기 전에, 나는 아무 낙이 없다고 할 해들이 가깝기 전에(전 12:1)

지혜자는 가장 젊은 날에 창조주이신 하나님을 기억하라고 권면한다. 인간의 생애에서 가장 힘이 넘치고 생명력이 넘치는 때는 청년의 시기다. 인생의 가장 유력한 시기에 하나님을 섬긴다는 것은 정말 복된 일이다. 나이가 먹어서는 자연적으로 신체의 기능이 퇴행되 의욕이 저하되기 마련이다. 한시라도 그리스도를 먼저 뵌 자들은 청년의 때에 가장 많은 인도를 받는다. 어려서 부터 회심할수록 가장 좋다고 생각된다.
다만 먼저된 자가 나중되고 나중된 자가 먼저 된다는 그리스도의 말씀 역시 유효하다.
청년의 때에 열심이였어도 돌아서는 영혼들이 교회안에는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무엇에 열심이였느냐가 중요하다. 교회안에서 다른 이익이나 여타의 봉사등만으로 하나님을 잘 섬기는 것이라 국한해 버렸다면 그것이야말로 은혜의 범위를 현저히 좁혀버린 처사라 할 수 있다. 하나님은 될 수 있는한 신자에게 가장 많은 복을 내려주시며, 그것은 당신을 잘 섬기기 위한 방향으로 인도받는다.

하지만 가장 큰 선물은 젊은시기에 하나님을 알았다는 것이다. 신체적으로 가장 왕성한 시기에 하나님을 알아간다는 것은 몸과 마음과 지성이 맹렬하게 타오를 때다.
인간의 젊은날에 주어지는 체력이라는 선물은 보편적인 은사다.  이 시기에 경건을 잘 훈련받아오면 늙어서도 그리스도에 대한 신뢰가 흔들리지 않는다.
18C의 목회자 J.C라일은 청년의 때에 가장 열심히 하나님을 섬기라고 조언한다.
왜냐하면 늙어서는 아무런 힘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젊어서 방탕하게 놀다가 죽기전에 예수를 믿는다는 고백은 거짓된 고백이다. 성경에서 그런 경우는 십자가 우편에 메달려있던 강도 한명 외에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씀의 해석은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죄악의 목끝에 메달려있을지라도 당신의 백성은 끝까지 구원하신다는 위로로 받아들여야 한다.

성경전체게 임종전에 신앙을 고백하여 구원을 받았다는 언급한 어느곳에도 없다.
성도의 인생에는 성화라는 과정이 분명히 존재한다. 열매 맺는 삶 없이 천국문에 발을 들이는 것은 보장되지 않는다. 물론 구원을 전적으로 그리스도께 달린 것이나 이 지상에 우리가 죄에 대한 대가를 치르고 과정가운데 복음의 전파와 우리의 삶이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과정이 반드시 동반된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루라도 젊었을 때 하나님을 더 알아가는 것은 복된 일이다.
될 수 있는한 하나님께 지혜를 구해야 하며, 그의 말씀에 순종함을 힘써야 한다.
지상에 완전한 순종은 없으나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백성이 죽어서 그 얼굴을 뵙기 전까지
신자의 경건을 책임지신다. 청년들이여 이제 깨어 굳게서서 남자답게 강건할 때다!

2016년 10월 1일 토요일

말씀, 성례, 권징

길가다가 타 교단 권사님이나 집사님들이 주시는 전도지를 예의상 받는다. 그 분들의 신앙을 크게 의심하지 않지만 전도지에 소개된 교회는 의구심을 많이 들게 한다.

종교개혁선배들의 작업중 가장 큰 수확은 말씀에서 올바른 교회를 분별하는 방법을 발견해 냈다는 것이다.
이는 로마 카톨릭의 오류적 해석을 반박하면서 얻어낸 성과인데, 그것은 말씀, 성례, 권징이다. 쉽게 설명하면

올바르게 복음을 선포하고 잘 가르치고 있는지
성례를 말씀에 근거하여 잘 시행하고 있는지
올바른 치리와 질서로 운영하고 있는지

3기준다 말씀에 근거를 두고 있다.
나는 개혁주의 신학이 오랫동안 묻혀있던 한국교계는 위의 3기준에 모두 미달된 상태였다고 판단한다.

그러나 희망적이게도 소수의 교회들이 종교개혁의 표어를 다시 되새기고 진리의 깃발을 거머쥐는 좋은 움직임들을 보여줬다.
그럼에도 괴로운 것은 이 교회들중에서도 종교개혁의 정신을 잘못 오해하거나 의미없는 남발을 지속적으로 자행하고 있다는 것이다.

한국적 풍토에서 발생된 잘못된 서열적 문화가 깃들어 교회의 치리와 질서 형태를 뭉게는 경우가 근래들어 발생하고 있다.
개혁주의 지향이란 슬로건을 들고 바른 복음 선포를 지향함으로 방황하는 성도들에게 한 줄기 희망과도 같았다. 다만 규모가 커짐으로 해서 오는 치리의 반향이 부작용이였다.

올바른 말씀선포와 성례까지는 어느정도 회복되는 듯 했지만
적용에 근거를 두는 치리적 부분에서 함정을 보였다.
개혁주의 슬로건을 내걸지라도 교회정치에 대한 부분까지 심도있게 몰입하고 공부하는 목회자들은 아무래도 더 소수인듯 하다.

그렇게 되면 상식없는 치리를 할 위험성이 있다는 것을 눈으로 확인하고 말았다. 앞으로도 많은 고민이 있겠으나 이를 어떻게 바라보고 판단해야 할지 근심이 쌓인다.

하나님께서 도움을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2016년 9월 26일 월요일

어찌 근심이 없을쏘냐?

사람이 구원받은 이후에 근본적인 근심과 걱정은 해소되지만
이 지상을 살아가면서 죄성들로 인해 괴로움은 남아있다.
지상교회의 치리는 완전하지 않으나 그리스도와 그의 말씀으로 인하여 온전한 것은 사실이다.

성도는 이러한 사실을 말씀에서 부지런히 확인하고 적용하며
교회가 올바르게 운영될 수 있도록 힘써야 할 것이다.
성령께서 반드시 교회안에서 일하시기 때문에 우리는 괴로움 가운데서도 즐거움을 누리고 건강한 신앙생활을 영위해 나갈 수 있다.

다만 개인의 욕심에서 자유하지 못할 시 교회에서 일어나는 파급은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특히나 직분자들의 마음에서 일어나는 욕심은 교회전체에 균열을 가하게 된다.

그러한 상황을 맞이함으로 인해서 찾아오는 근심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물론 기도와 인내로 상황을 지켜보지만 당장에 일어나는 사안에 대해 상처받는 영혼들이 한 두 사람이 아니다.

나는 이러한 상화가운데서 어떻게 하나님 뜻을 분별할 것인가?
머리로써는 알지만 적용에서 올바른 본보기의 선배들을 직접 보지 못했기에 너무나도 힘들다.

장로교회의 정치가 한 번도 시행되지 못한 한국의 상황에서 나는 과연 어떤 선택과 결정을 내려야 하는 것인지 고민이다.
물론 교회는 그리스도의 것이기에 보편성을 띄는 것이 맞다.

하지만 장로회라는 치리를 채택한 이 가운데서 교단의 체계는 성경을 토대로 이뤄진 것이기에 이 또한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교회 치리제도라 믿는다.

온전한 장로회 시행이 가능할까?...지금으로써는 아직 미흡하다는 것을 잘 알지만 너무나도 갈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답답할 노릇이다.

2016년 9월 12일 월요일

듣는것

잠언1장을 다시 묵상했다. 꽤 오랜 공백을 두다 오랜만에 자리에 앉아 하루를 돌아보며 독대의 시간을 가진 것이다.
짧은 시간이지만 참 달콤했다... 이렇게 좋은 시간임에도 하루가 고되서 퍼지기 일수였다.

그런 시간들도 필요하다고 하지만 개인의 참된 안식은 하나님의 말씀에서 더 강하게 누리지 않던가?
대체 뭣이 중헌디?~ 란 말이 뇌리를 스친다.
하나님 말씀 듣는것보다 좋은것이 어디있겠는가?......

"오직 내 말을 듣는 자는 평안히 살며 재앙의 두려움이 없이 안전하리라"(잠 1:33)

잠언의 핵심은 "여호와를 경외하는 것이 지식의 근본"이나
그 지혜는 듣는 것을 의미한다. 말씀을 듣는다는건 곧 순종과 직결된다.

지혜자 역시 순종이 제사보다 나음을 강조하거니와 적용하면
1000번의 회개보다 단 한 번의 순종이 더 가치있음을 의미한다.
참된 신자라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것이 즐거울 수 밖에 없다. 억지 눈물을 토하고 중언부언 기도하며 특정구절만 달달달 외우는 것보다.

단 한 구절이라도 영혼을 다해 읽고, 짧더라도 창자가 끊어질듯이 기도하며, 삶에서는 무게있게 살아가는 것이 옳다 생각한다.
이것이 힘들지만 인도하시는 이가 계시기에 믿고 나아갈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비록 시간이 걸릴지라도 ''속도보단 방향"이란 격언이 여기에도 어울릴 것 같다.

사실 신앙의 성장에 이 말이 가장 잘 어울린다.
"속도보단 방향"

인생의 성공여부, 즐거운 인생관 이런것보다...
나의 신앙의 좌표가 제대로 인도받아 움직이는지 분별하고
점검 받아봄이 중하다.

하지만 우리는 어리석어서 말씀을 읽을 때 특히나 잠언에서
성공요소들을 찾으려고 한다. 무언가의 학습법에 적용한다던지 사회생활의 노하우를 찾는다던지에 말이다.

종종 일부 각 교회 청년들에게 아침마다 잠언을 읽는다는 이야기를 듣고는 한다. 아침에 출근할때와 일터에서 얼마나 힘이되는지 모른다고 고백한다. 사실이라면 참 기쁘고 감사한 일이다.

단지 이 친구들의 삶에서 고백한 내용과 달리 굉장히 큰 결함적인 소식이 들려올 때..... 과연 말씀을 어떻게 읽은걸까?란 생각이 물씬 밀려온다.

한편으로는 나도 함부로 적용을 내뱉고 있지는 않은가 싶기도 하다. 듣는다의 의미에서 입술을 여는 주체는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자. 들어보지도 않고 내 선상에서 자유롭게 해석하여 벌어진 결과에 대해서는 사실 유구무언이다.
물론 우리의 존재는 언제나 할 말이 없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거들떠도 안봐도 되는 우리에게 친히 찾아오셔서 입술을 여신다는 것 자체가 몸둘 바를 모르는 일이다.
그 말씀을 온전히 듣고 있다는 것이 허락되지 않으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듣는다는 것은 그러므로 행복한 일이다.
안듣거나 떠들기 급급하다는것은 참으로 곤욕이다.

2016년 8월 21일 일요일

교육을 생각하며

미래 교회세대에 희망은 성경이 제시하는 '복음'밖에 없다.
문제는 변화하는 시대에 자라나는 후세대들이 올바른 분별적 사고와 경건성을 갖추도록 하는데 있다.

16-17C에 성경을 근간으로한 신앙고백서의 탄생은 그런 일환이였다. 그전에 모든 사람들이 성경을 읽을 수 있도록 한 번역작업이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였다.

자라나는 신앙세대에게 가장 기초적인 교육은 성경읽기이며 그다음은 '교리' 학습이다. 제자훈련, 큐티모임등 여러 일환의 프로그램이 있지만 어느것 하나 균형있는 대안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판단을 내린다.

성경안에 경건생활의 기초법이 모두 담겨 있기 때문에 본문탐독은 중요하며, 삶을 살아가는데 말씀을 적용하는 측면에서 분별력을 장착시켜주는 역할은 교리이다.

그 다음에 신앙을 근간삼아 시대의 기술과 역사 흐름을 배우는 것이다. 우리의 능력, 시간, 노력의 원천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것이기 때문에 온전히 그분만을 위해서 사용해야 한다.

예수께서 가르치신 바 대로 신자의 삶은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다. 자라나는 후세대에 이 모범을 솔선해서 보이고 가르쳐야 할 의무를 우리는 하나님께로 받았기 때문에 고민해야한다.

지금의 대다수 교회들은 교육의 갈피조차 잡지 못하는 실정이다.
의식이 있는 교회와 신자들이라면 당연 이 비참한 현실가운데서 진리의 깃발을 나부껴야 할 사명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현실은 처참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일하시기에, 그의 기뻐하시는 뜻이라면 반드시 이뤄질 것을 믿고 나아가야 한다.

2016년 8월 2일 화요일

코메니우스의 교육목적

[코메니우스의 교육목적]
"모든 사람이 모든 주제를 철저함(방법)으로 가르침을 받아야 함을 확실하게 하는 것."
1. 모든사람(every one)은 지금 전체적인 교육(universal education)
의 유익을 받아야만 한다.
2. 그들은 모든 내용(every respect)으로 교육을 받아야 한다.
3. 그 결과로 그들은 전적으로 문화인(Wholly civilised)이 되어야 한다.
- 판소피아 교육 中 -
코메니우스의 논지를 따라가다보면 모든 성도는 '자유로운 의무'하에 신학을 교육 받아야함이 당연해 보인다. 혹자는 교만을 이유로, 혹자는 무용을 이유로 성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침에 있어 여러 거부감을 나타낸다.
나는 건강한 목회자분임에도 불구하고 그분에게 신학하지 말라는 얘기를 들어봤다. 하지만 고전속 선배들의 교육관을 탐구할수록 그들은 성도에게 신학해야함을 힘주어 요구했다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들의 교육관 중심에 자리잡고 있는 것은 삼위일체였다.
그리고 교육관의 근거 구절은 로마서 11:36, 골로새서 1:28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을 통하여 소급되는 사물의 지식들이 참된 것이고 그분을 통하여 바라보고 그분을 향하여 다시 소급되지 않고서는 온전한 지식을 살아낸 것이라 볼 수 없다. 거기에 전체지식은 오직 하나님께만 전적으로 속해있는 것이기 때문에 두렵고 떨림으로 경외의 자세를 갖추어야 함을 권면한다.
코메니우스가 위의 목적을 오늘날에 비추어 보면 불신자라 할지라도 전체교육의 혜택을 누릴 자유는 있다.
보태서 16C 신학자 부카누스의 견해를 빌려서 설명하자면 불신자도 신학을 배울 수 있지만 적용할 수 있는 대상들은 오직
성도밖에 없다는 것을 염두에 두고서 말이다.
즉, 코메니우스의 교육관 속에는 참된 지식을 전달해야하는 전도적 사명도 담겨 있는 것 같다. '모든 사람'이란 강조가 맘에 확 와닿는다.
가르치는 자는 참으로 더 깊이 배우고 겸손해야 함을 숙지한다......

2016년 8월 1일 월요일

웨스트민스터 총회 내의 장로파

[웨스트민스터 총회내의 장로파]

1643년 웨스트민스터 총회의 장로파는 두 진영으로 갈라져 있었다고 합니다.
장로교가 신적인 권위를 가졌다고 주장하는 무리와 단순히 유용하고 실질적인 수단으로 본 무리입니다. 전자의 대표는 스코틀랜드 총대들이였고 후자는 에드워드 레이놀즈였습니다.

같은 장로파인데도 서로 다른 이해의 차이에 한번 더 놀랍니다. 다만 장로회가 신적인 권위가 있다고 함으로 해서 그들이 장로회가 최고다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성경적 근거를 토대로 이것이 지상에서 가장 성경적으로 교회를 운용할 수 있는 방법임을 제시한 것이라 봅니다. 물론 그들은 장로회체제를 당시 영국사회(?)로부터 인정 받고 싶은것도 있었습니다.

후자의 입장에 대해서는 놀랐습니다. 어떤 이해로 그 주장을 했는지는 좀 더 찾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 외부적으로도 신학적 위기가 코앞이고 내부적으로도 이런 갈등이 있었다는건 알 수 있었습니다.

이런 첨예한 상황들 가운데 두드러지게 활약했던 인물이 바로 조지 길레스피 경 입니다.
결론은 아론의 싹난 지팡이가 어서 나오기를 기다립니다.....아 궁금하다. 책에서도 싹이 나오나? 싹수(?)있는 책인가?~~

2016년 7월 11일 월요일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하나님이 존재하신다(히 11:6)는 믿음의 확신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은, 기도하는 영혼에게 많은 방법으로 기운을 복돋워 준다. 그리고 하나님이 자신의 기도를 들으신다는 소망을 일으켜 준다.

- 토마스 굿윈 <믿음의 본질 中>

기도의 기초에 믿음이 자리잡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구절이다. 즉 , 믿음없이는 하나님께 아무것도 소급될 수 없다. 기도에 있어서 믿음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것은 하나님을 향한 신뢰의 마음이 작음을 뜻한다. 이런 상태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은 하나님께 기쁨으로 와닿을 수가 없다.

기도의 뿌리인 믿음이 연약하다면 그에 대한 응답또한 불확실 하다고 볼 수 있겠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기뻐하시지 않는 기도에 대해 은혜를 베풀지 아니하신다.
하지만 히브리서 기자가 기술한데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간다면 찾는 자들에게 상주실 것을 반드시 약속하고 성취하신다.

이렇게 보면 기도는 매우 즐거운 것이며 하루라도 빼먹으면 베기지 못하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나의 하루 일과를 돌아보면 기도를 못했음에 괴로워하는 일이 더 많은 것 같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의 기도에 늘 귀를 기울이고 이미 이뤄주실 것들을 가득 지니고 계심에도 확신의 연약함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일이 더 많다.

굿윈의 해석을 읽으면서 기도는 빡빡한 의무가 아니라 하나님과의 자유로운 소통과 교제라는 점이 더 크게 와닿는다. 기도의 양보다는 얼만큼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기느냐가 더 중요해 보인다. 아기의 부모를 향한 손발짓이 애간장을 녹이듯 기도는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수단이면서도 직접적인 교감의 소통구다.

하나님께서는 신자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계시며 베풀기를 주저하지 아니하신다.
하지만 우리의 상황과 스스로의 자존감이 이것에 대해 반감을 가져다 주기도 하는 것 같다.
그렇게 생각하면 기도를 한다는 것은 어렵다.

무응답에 대한 반감이 어떤식으로 나타날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그것 또한 응답이라지만 체험으로 각인되기 까지는 성도마다 다르다. 이것이 딜레마라면 그렇다고 볼 수 있겠다. 오히려 그런 반감을 지닌 성도들은 무응답도 응답이라는 것을 모르는 것이 아니라 '사랑'이 고픈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든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성숙한 성도들에게 이런 지체들을 향하여 기도와 구제를 행하도록 명령 받는 것일지도 모른다.

어려운 상황가운데 하나님을 찾음은 지극히 정상적인 것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게 아무것도 없다는 겸손의 자리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오히려 아버지께서 그 상황가운데로 인도하셔서 자신을 찾게 하셨음이 올바른 표현일 것 같다.

많은 직장인 형제, 자매들이 기도할 시간이 없다고 하소연 한다. 하지만 성경 어디에도 양것 기도해야 들어주신다는 구절은 없다. 오히려 성도가 기도를 하지 않는 상황에 오래 처하게 된다면 매질(?)을 해서라도 당신께로 나아오게 하신다. 시간 없음도 한 낮 핑계거리 밖에 안돼기에 할 말이 없어진다. 오히려 "하나님과 하나님의 속성들, 그리고 신적 약속들의 진실성과 신실성 같은 것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확신"을 은근히 내팽겨 치고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2016년 7월 9일 토요일

수기(手記), 타이핑(typing)

디지털 시대가 되면서 글도 타이핑으로 대부분 작업한다.
지금 작성하고 있는 내용도 타자로 휘갈기는 내용이다.
시간도 단축되고 여러모로 주어지는 편리함도 많이 주어진다.

그러나 속기로 글을 작성할 수 있게 되면서 내공실린 글이 아니게 됨이 너무나 큰 것 같다.
워드, 한글로 문서를 익숙하게 사용하면 어느 문장이 어색한지, 단어가 무엇이 틀렸는지를 금새 골라낼 수 있다. 이런 고난도 기술은 다양한 글을 많이 읽고 써봄으로써 얻어지는 것이지만 어느정도는 전문 글쟁이들의 영역이기도 하다.
이런 공력을 얻는 것은 하루 아침에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컴퓨터가 대중에게 보급되면서 많은 사람들은 쉽게 글을 작성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그만큼 가벼운 글도 쉽게 휘날릴 수 있게 됐다.
분당 1000타 이상 나오는 대한민국의 보편적 국민이라면 단 한마디를 너무나도 손쉽게 남긴다.

하지만 우리가 손으로 글을 써본지는 이제 얼마나 되는걸까?
타자로 글을 잘 쓰면 수기로도 잘 쓸 줄 알았는데 막상 격어보니 아닌 것 같다.

오히려 손으로 글쓰는게 더 어렵다. 혹은 깊이 생각하는 습관이 결여됐다고 생각도 든다.
조선시대 대문호중 하나인 박지원은 글을 쓰다가 문장이 마음에 안들면 처음부터 다시 썼다고 한다. 타인이 보기에 문제가 없는 문장이였음에도 말이다.

디지털 세대의 우리는 백스페이스 한번 눌러 삭제해버리면 끝이지만 그 시대에는 한 문장을
정성들여 써야 했던 시기다. 과거에 깃펜을 휘갈기던 서양학자들도 마찬가지였다.
동양에서는 문방사우가 선비를 대표하는 상징이면서도 '도(道)'를 닦는 도구였다.

예의를 철저히 훈련받고 사람이 얼마나 글을 신중하게 써야하는지를 배웠다고 본다.
다만 오늘날은 얼마나 워드문서를 짧은 시간안에 편집 작성하는 것이 더 중요해 보인다.
댓글 한마디도 얼만큼 상대를 센스있게 조롱하고 비아냥대느냐가 재치있는 사람이다.

되려 진지하고 아날로그적인 글들은 이제 인기가 없다.
자판은 편하지만 가벼워서 타이핑인듯 하다. 재밌는 글만 쓰는 도구인가 보다.
타이트하고 핏하게 작성하지만 무게는 없어야 한다. 손가락에 힘을 빼고 모든 사람에게 공감을 가져다 주되 즐거워야만 한다.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가 공자는 붓을 잡는 손의 검지 하나로 장수를 쓰러뜨렸다. 좀 과장된 것도 없지 않아 있지만 필력이라는게 어떤 것인지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라 생각한다. 진정한 글은 사실 무게가 있다. 얼마나 진중하고 심도있게 써댔으면 손가락에 그런 괴력이 깃들었나 싶다.

반면 나는 열손가락으로 평범한 사람을 밀어도 다 분질러지는건 아닐지 모르겠다.
손으로 글을 쓰다보면 참 드럽게 못쓰는 내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재밌고 쉬운 글도 좋지만
그보다는 진리를 옮겨적을 때 그 무게를 감당할만한 필력이 생기고 싶은 욕심이 사실
간절하다.......

2016년 6월 30일 목요일

과거의 글, 오늘의 글

SNS에 나름 수 많은 글을 남겼다. 어떻게 보면 이게 다이어리의 역할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개인다이어리는 따로 쓰고있지만)

SNS를 첫 이용했을 때의 글들을 보면 낮빛이 창백해지고 화끈거리는 느낌을 감출수가 없다.
어찌보면 회심전과 회심후의 글로 나눠어 질 수 있겠다.

쓸떼없는 글들을 많이 남겨서 타임라인에 공해를 유발했을지 몰라도 반성되는 차원이 많다.
더불어 페친들과 주고 받은 글들을 보면 그들도 과정중에 있었음을 두고두고 확인한다.
(아 그땐 그랬지... 맨주먹 불끈쥐고 멋모르고 펀치라인(?)을 새겼네...)

역시 글은 일점일획이라도 신중하게 써야한다는 교훈을 얻는다. 타임라인에 페친이신 목사님이 페북글에 대한 단상을 남기셨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모습이 다르다는거에 동의하지 않으신다는 말씀이셨다. 와닿는 얘기다. 여기다 글을 남기는 나의 모습도 분명히 내 부분이다. 글을 꾸며썼다면 그 꾸미는 모습이 나의 모습이고 정직히 썼다면 정직한 그것이 나의 모습이다.

이번 주보 칼럼은 부분적으로 '글'에 관해 썼다.
글의 사전적 의미 첫번째는 "생각이나 일 따위의 내용을 글자로 남긴 기록"이다.

무언가를 느끼거나 생각하거나 경험한 내용을 기록으로써 남긴 것이다. 어찌보면 글도 나를 비춰보는 도구중 하나인 것 같다.
하지만 대외적으로 남겼다면 대중이 나를 보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글은 신중하게 작성해야 한다.
먼저는 글이 나를 비추고 두번째는 타인이 글을 통해 나의 일부를 바라보기 때문이다.

과거의 글, 오늘의 글
모두 내 모습의 일부이다.

2016년 6월 27일 월요일

믿음의 본질2 - by 토마스 굿윈

믿음의 본질 1권은 믿음의 대상에 대해서 다룬다.
제 2권은 믿음의 행위에 대해서 다루는데 각각 하나님의 영역과 인간의 영역으로  나눴다고 볼 수 있겠다. 그러나 굿윈이 이것을 둘로 나눠서 보았다는 것이 아니라 독자들에게 이해시키기 위해 논리적으로 구분하였음을 염두에 둬야겠다. 믿음의 본질이 말하고자 하는 핵심적인 내용은 무엇이 바른 믿음이고 올바르지 않은 믿음인지를 전개해 나아가는데 있다.

2권은 실천적인 방향을 담았기에 믿음에 대한 의지, 확신, 기도를 설명하고 후반부인 3편에 이르러 믿음의 속성에 대하여 설명한다. 개인적으로 굿윈의 믿음의 본질이 탁월하다 여겨지는 것은 그의 실제적인 삶에서 올바른 믿음이 무엇인가를 실질적으로 피부에 와닿는 체험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본다.

그는 이전에 아르미니우스 주의자였으나 리처드 십스의 권면으로 개혁파칭의로 돌아선다.
웨스트민스터 총회에서 그가 칭의에 대한 담론가운데 체계적이고 실제적으로 변증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런 체험도 있었기 때문일 것이라 본다.

그는 믿음의 적용 행위를 확신과 기댐으로 설명한다. 믿음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받는것이지만 확신은 인간의 의지로 키울 수 있다고 바라봤다. 왜냐하면 이미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소유가 되어주셨다는 전제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확신만 있어서는 안돼고 그리스도께 기댐이 필요한 것이다. 회개함 없이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기 때문이다.

확신은 은혜의 방편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키워나갈 수 있다. 신자가 죄성으로 인해 헤메고 바닥을 기어도 하나님께서는 포기하시지 아니하신다. 굿윈은 이런 상태의 신자가 처방받을 수 있는건 속히 회개하고 은혜의 방편들을 활용하여 확신을 굳건히 해야함을 권면한다.
이는 신자가 죽는날까지 계속된다.
그리고 예정에 관해서는 신중한 태도를 취하도록 일침을 가한다.

"믿고자 하는 자가 기댐의 행위를 발휘하기도 전에, 혹은 약속에 주의를 기울이기도 전에, 혹은 다가올 칭의를 추구하기도 전에, 자신이 특별히 예정됐는지 아닌지 확신하는 것을 첫 번째 과업으로 만들면 안 된다. 많은 사람이 여기에 걸려 넘어진다."

흔히 구원파의 이단적인 오류가 여기에 속한다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그들은 예정을 칼빈만의 것으로 취급하고 부인하기에 아이러니컬 하지만 말이다. 구원파의 체계에서는 확신과 기댐은 찾아볼 수 없다. 한 번 구원받으면 그걸로 게임 끝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그들에게는 지속적인 하나님과의 교제와 순종과 죄에 대한 비참이 없다.

굿윈이 활동하던 당시에도 구원파의 전신(?)이라 볼 수 있는 율법폐기론자들이 활동하고 있었을 때니 이런 잘못된 믿음에 대한 성경적 변증은 이 저서에 충분히 담겨있다.

읽어 나갈수록 오늘날 신앙적 고민들에 대해서도 충분히 조언으로 적용될만한 것들이 풍성하다. 고전은 이래서 손에서 뗄 수 없나보다.

2016년 6월 15일 수요일

사람이 귀를 돌려 율법을 듣지 아니하면 그의 기도도 가능하니라(잠 28:9)

섬칫하고 두려운 말씀이다. 지혜자의 쓰디쓴 권면이 마음을 쓰리게 한다.
진정한 경건자는 하나님 말씀에 먼저 순종하는 자라는 것을 배운다.

사무엘이 사울왕에게 뱉은 무거운 권면은 "순종이 제사보다 낫나이다"(삼상 15:22)였다.
일천번의 제사보다 하나님은 당신의 말씀에 단 한마디라도 순종하기를 원하신다는 뜻이다.
우리가 아무리 수없이 회개를 많이하더라도 죄에서 돌이키고 말씀에 순종하지 아니하면 하나님 앞에서 가증함을 부리는 것 밖에 안된다는 얘기겠다.

등골이 서늘하고 눈가에 물이 고인다. 성도라고 자처하는 자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보다 비참한것은 없으리라. 경건하게 신앙을 고백하고 교회내에서 바른 말을 선포하며 친절하게 보이는 것은 이웃에 눈에 참된 신앙인으로 보일지 모른다.
다만 하나님의 눈을 속일 수 없다는 것을 자주 망각함은 너무나 빈번하다. 마음속에 죄악을 품으면 주님께서 듣지 아니하신다(시66:18)는 말은 우리는 정말 잘 안다.

하지만 아버지가 순종이 없으면 듣지 아니하신다 말한다. 이것에 대해 나는 감히 반박의 여지가 없음을 깨닫는다. 헛된 봉헌을 더이상 가져오지 말라고 말씀하심을 멀리하고 지속적으로 가져다 주는 미련함을 품을까 두렵다. 그것들을 괴로워 하심을 경고하셨음에도 반역죄는 너무나도 즐거움으로 포장되있어서 지속의 채찍을 가한다.

기도와 순종은 하나다. 기도가 곧 삶이라는 말은 아버지 말씀에 순종하기로 작정하고 귀를 열었다는 얘기와도 같겠다. 마치 건강한 아이가 부모의 부름에 즉시 듣고 나아와 경청하듯 하나님께서 부르시면 바로 반응하여 나아가는게 정상이다.

하지만 헛된것에 몰두하여 하나님의 말씀에 귀기울이지 아니하고 입술로만 가겠다고 뱉는 것은 스스로가 죽음을 자청하는 것과도 같을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이 백성이 입술로만 공경하고 마음이 자신에게서 멀다고 말씀하신 경고는 오늘날 교회에 더 강력하게 요구되는 것은 아닌가 싶다.

기도의 시간이 짧다고 책망해서도 안되고 길다고 해서 자랑거리도 아니다. 
되려 두려운 것은 상황에 비판적인 시각과 경계를 지나치게 한 나머지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경건을 부인하는 자가 되는 어리석음을 범하게 되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오늘날 우리의 입술에서도 쉽게 이런 시대에 제대로 된 기독교인으로 사는게  어떻게 가능하냐는 말을 너무나 잘 뱉는다. 차라리 솔직해서 좋다고 말할지 모르겠다.
맞다 솔직하다. 그러나 행함은 참 믿음의 증거다. 지상에 완전한 순종은 없으나 그 가운데서도 지속적으로 백성들의 순종을 요구하시고 이끌어내시는 그분의 기적을 감상하라.
교회자체가 그 증거가 아니던가?  
 
오히려 나의 믿음이 여전히 작은것은 아닐련지 모르겠다.......

2016년 6월 14일 화요일

빼앗긴 가르침의 직분

"사실 교회를 다스리는 자들이 가르침의 직분을 우상에게 떠넘긴 것은 다른 이유 때문이 아니라 곧 자기들 자신이 가르칠 능력이 없는 벙어리들이었기 때문이었다."
(칼빈 기독교강요(상)/크리스찬 다이제스트 역판 p.126 )
오늘날 일부의 성도들은 과거의 선배들이 살았던 시대와 오늘날의 현실이 다르기 때문에 그들의 말 대부분이 적용되는게 힘들다고 말한다. 이러한 인식은 칼 트루먼이 지적한 바 대로 진보된 기술문명으로 인해 옛것을 소중한 것으로 여겨지지 않는 태도가 자리잡혔기 때문이다. 최신이 아니면 받아들이지 않는 생활패턴은 정통의 소중함 약화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결론에 동의한다.
칼빈의 지금 저 발언이 어떤이들에게 고리타분한 것이라 치부해도 나는 지금도 유효하다고 생각한다. 시대정황상 교황주의자들을 향하여 강한 비판을 행한 것이지만 오늘날 가르칠 능력이 현저하게 저하되있는 우리도 그 대상이라는 부인할 수 없을 것 같다.
칼빈의 저 말을 곰곰히 생각해보면 교회안에 가르칠 능력이 현저히 저하되면 우상으로 대체시킨다는 얘기로 들려진다.
하나님께서 교회내에 참된 교사들을 세우신다는 것은 매우 은혜라는것을 알수있다.
교사들은 양들이 헛된것에 진리르 빼앗기지 않도록 권면하고 가르치고 인도해야 할 의무를 하나님께로부터 위임받았다. 이를 제대로 행하지 못했을시에 교회안에 닥치는 위기는 매우 심각하다 볼 수 있겠다.

2016년 6월 13일 월요일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요(잠25:2)

하나님의 일은 감추어진 것과 드러난 일들로 구분되어 진다.(신29:29)
드러난 일들은 우리에 속하지만 감추어진 일들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다. 양자 모두 불가분적으로 하나님 안에 있으나 인간에게 드러나게 하지 않은 것은 그분만의 것이다.

즉, "하나님 자신이사 그가 직접하시는 일은 가려져 있다는 얘기다."(박윤선 주석 참조)
대표적으로 예정의 지식이 그렇다. 오늘 개혁신앙 세미나에서도 이것에 대한 유익은 오히려 교회에 실천적 적용으로 이어진다 나눠주셨다.

개혁신앙이 비판받는 일면에 '예정론'을 근간으로 냉정하고 딱딱하단 평이 있다. 하지만 교회사적으로 살펴보면 올바른 예정론이 신자의 발목을 낚아챈 경우는 없다.

오히려 상처를 준 방향은 예정을 오인한 자들이 이웃에게 냉철한 회초리를 휘둘러서 발생된 경우들이다.

잠언의 지혜자가 권면한 대로 일을 숨기는 것은 하나님의 영화다. "박윤선 목사님은 이와같이 은닉되어 있다는 사실은 우리 신앙의 대상이 될만하다." 주석했다.

이는 오히려 우리를 하나님 앞에서 겸손케 하고 사랑을 더 무르익게 한다. 우리는 누가 택자이고 유기자인지 모른다는 사실은 이웃을 향하여 섣부른 판단을 하지 못하게 한다.
오히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음을 간과하지 않도록 이끈다. 또한 무질서한 신자들을 대하는 태도에서도 사랑으로 보듬을 수 있는 인내를 선물받는다.

그래서 종교개혁 선배들이 예정을 묵상하며 뱉은 말은 다음과 같다.

"오늘 구원받지 못한자 내일 구원받을 수 있다."

그러나 불손한 태도를 가진 성도들을 향해 은근한 잣대를 들이댔다는 사실이 부끄럽다......

2016년 6월 12일 일요일

균형

때로는 박식하고 이성적인 사람일지라도 숱한 논쟁의 한가운데 휘말리면 비인격적인 태도가 나오는 법이다. 그래서 늘 한 발자국 떨어져서 신중하게 주제를 관찰하고 파악할 필요가 있다.

상대가 잘못된 의견을 펼치더라도 그것에 대해서 과격한 반응은 위험하며 되려 서로가 상처입는 경우가 많다. 일반적인 상식으로도 이해되는 범주지만 되려 신자들 사이에서 이런일이 발생하는 경우에는 곤혹스러울 때가 많다.

현재 한국의 음란한 문화 때문에 경계의식이 고조되어 있다. 이런 것들이 교회 내부로 침투하기 쉽기 때문이다. 특히나 청소년과 청년층이 주된 타겟이다.

하지만 사전에 말씀을 중심으로 교육이 지속되어 왔다면 '균형'을 잃을리는 없었을 것이라 판단된다. 되려 너무 심각한 우려가 긴장된 상황들을 촉발 시키는건 아닌지 모르겠다.

물론 교회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죄들은 과감히 쳐내야 할 것이다. 먼저는 하나님께서 그것들을 싫어하시고 내버리시기 때문이며 둘째로 교회는 하나님 나라이므로 세상의 것들을 들어설 수 없다.

신자들끼리의 내분이 너무 격분하다. 조금만 진정하고 은혜로 식혀짐이 필요한 듯 싶다.
인격적으로 비춰졌던 지체들도 이런 문제로 인해서 실족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우리는 이런 사태에 있어서 교회안의 영혼들이 깊은 상처를 입지 않도록 지켜봐주고 다독여줌이 필요하다.  오히려 교회 외부의 문제로 민감하게 반응하다 내부의 영혼들을 못돌보는 경우들이 많은 것 같다.

2016년 6월 8일 수요일

대저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잠 24:16)

신자가 절망속에서도 영원히 낙심하지 않음은 아버지께서 건져주실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회심한 이후의 삶속에서도 옛 습관을 미처 다 떨어내지 못하여 다시 돌아갈 수 있다.
지혜자는 경건한 자라도 일곱 번 넘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18C의 보스턴 목사는 저서 '인간 본성의 4중 상태'에서 하루에 7번 넘어질 수 있다고도 가르킨다. 말씀에 견주어 보았을 때 벗어난 말은 아니다. 신자는 급격한 실족으로 인해 구원받기 전의 자신은 하나님 앞에서 철저한 죄인이었음을 다시 점검하게 된다. 결국 그리스도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우리는 결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할 수 없는 것이다.

구원받은 이후의 삶은 결코 순탄하지 않다. 천로역정이라는 단어가 암시하듯이 좁은길은 쉽게 지나갈 수 있지 않다. 천국으로 가는 길에 어두운 유혹에 빠져 정도에서 이탈하여 굴러 떨어질지라도 안심할 수 있는 것은 하나님께서 신자의 손을 놓지 않다는 것에 있다.

신자가 일곱 번 넘어져도 다시 일어날 수 있음은 결국 하나님 덕분이다. 하지만 성도의 시선에서 누가 진실된 의인인지 분별하기가 쉽지 않다. 물론 교회안에는 하나님께서 주신 말씀과 표지들이 있어 신자와 분별하는것이 그다지 어렵다고 볼 수만은 없다.

대신 구원의 주체는 하나님이시기에 우리가 함부로 지체를 평가하는 것에 있어서는 매우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이다. 한 번 실족했다고 하여 과격하게 상대를 폄하하고 판단하는 것은 신중하지 못한 태도다. 지혜자의 가르침만 보아도 믿는 자도 일곱 번이나 실족할 수 있다.

하지만 교리적인 지식이 늘어날 수록 상대를 평가하게 되는 태도는 너무 자연스럽게 잡힌다.
그만큼 죄성이 지독하기 때문에 사랑과 경건이 가득한 교리를  평가의 리트머스 종이로 전락시키는 것은 매우 쉬운일인 것이다.

교회에는 다양한 사람들이 있다. 다양한 성격과 성향들을 지닌 사람들이 모여 하나님께 예배드리고 교제를 나눈다는 것은 기적이지만 때론 다툼과 갈등이 비일비재하다. 지체의 과격한 성격과 성향을 참지 못해 공동체 내에 균열이 가는 상황은 어느 교회나 발생할 수 있다.
하지만 예수님은 형제를 늘 용서하라 가르치신다.

그런 의미에서 베드로의 질문은 참으로 깊다. 그는 의인도 일곱 번 실족할 수 있다는 말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주님, 내형제가 내게 대적하여 죄를 범하거든 내가 몇 번이나 그를 용서해주어야 하라이까? 일곱 번까지 하리이까?"

사실 사람이 일곱 번까지 용서하는 것은 매우 대단한 일이다. 불교에서조차 부처의 웃는 얼굴도 세번까지라는 말이 있다. 그런데 우리의 대선배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할 의사를 가지고 질문을 던진 듯 하다.

그러나 베드로는 용서에 한도를 그었다. 딱 일곱 번 까지 말이다.
예수님은 이 의중을 정확히 파악하시고 일곱 번 까지가 아니라 일흔 번씩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하라 답변하셨다. 산수적 의미의 70의 7승 개념이 아니라 그치지 않는 사랑으로 계속해서 용서하라는 뜻이렸다.

아버지의 긍휼의 손길은 접히지 아니한다. 나는 성격적으로 결함이 있거나 어려운 지체들이 미숙함을 자주 보이면 손을 접는 경우가 다반사다. 말씀을 알아가고 묵상함을 즐겁고 쉽다.
늘 적용에서 문제다.......

2016년 6월 7일 화요일

아이를 훈계하지 아니하려고 하지말라 채찍으로 그를 때릴지라도 그가 죽지 아니하리라(잠23:13)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고의적 혹은 악의적인 감정으로 불순종하는 성도에게 징계할 책임을 가지고 있다. 채찍으로 그를 때리는 경우가 생길지라도 훈계하는 것을 멈추지 말 것을 지혜자는 권면한다. 물론 여기서 채찍이 나타내는 의미는 폭력성은 띈 '체벌'의 방식이 아니라
'징계'를 행할 것을 말한다.

하니님은 이를 통해 그 영혼을 지옥에서부터 건저내신다.(잠 23:14) 그를 채찍으로 때려도 죽지 아니함은 하나님께서 그를 포기하시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록 그가 내면에 남아있는 죄성의 심각한 부추김으로 인해 죽음(교회로부터의 이탈)의 길로 나아갔더라도 아버지께서는 돌이키실 수 있는 것이다.

다만 징계를 행함에 있어서 오늘 우리가 이런 가르침에 취약해져 있기에 실행력에 있어 미흡하다. 그전에 권면과 권징이 시행되기에 앞서 신앙의 교육을 어린시절부터 공급받아 왔더라면 이를 시행함에 무리는 없었을 것이다. 신자가 성장함에 있어서 과격함과 미숙함이 드러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지만 그 정도가 심각한 것은 잘못된 교육을 받아서 일수도 있다.
(혹은 그 성도가 가짜이거나)

물론 이런 성도들에게 권징을 행함에 있어서 '비판'과 '권면'은 올바르게 구분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늘 마음에 새겨야 할 것이다.

"비판을 받지 아니하려거든 비판하지 말라"(마 7:1)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보기전에 나의 눈속에 있는 티를 보지 못함은 매우 치명적이다.
이는 내가 사랑이 없다는 것의 결정적인 증거다. 이런 손에 채찍이 쥐어지면 사랑의 징계가 아닌 가학적인 폭력으로 번진다. 교회내에서 자신이 옳고 타인이 옳지 않다는 태도는 위험하다.

이런 모습에 묘한 방어적 기질이 스멀스멀 올라오게 되는데 그럴때 내 뱉는 말은 늘 이렇다.
"나도 잘 못하지만...그건 아니지 않나?"는 식의 태도 말이다. 자신을 경계하며 신중히 뱉는 자세라면 다행이지만 나는 그렇지 못하다는 것을 돌아본다.

이런 태도로 인해 상대의 영혼이 가격받는다면 그것만큼 슬픈일은 없을 것이다.
더 안타까움의 한숨이 나오는것은 치명상은 내가 입는다는 것에 있다.
"주님의 눈은 지식을 보존하시며 범죄자의 말을 무너뜨리는데 있다"(잠22:12)고 하였다.

주님의 말씀은 결국 자신의 백성에게 제대로 된 훈계로 들어갈테지만 범죄한 자의 말은 무너뜨리신다. 묘하지 않은가?... 내가 사랑으로 훈계함을 잊고 상대를 정죄로 내뱉었어도 주님의 말씀은 보존될 것이지만 나의 말은 무너질 것이다. 치명상도 이런 치명상이 없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죄조로 내뱉어도 하나님께서 알아서 보존하시니 마음껏 내뱉으라는 말은 미련한 처사다. 상대에게 올바른 권면을 전하기 전에 먼저 매 맞아야 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

2016년 6월 3일 금요일

관계의 어려움

결혼을 했음에도 내가 아직도 가까운 사람들에게 신경 못쓰는 것을 확인한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풍성하면 인간에 대한 이해도 성장함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오늘 아내와 함께 본가에서 식사를 하는데 어머니와 아내의 심정을 못헤아린 것 같다.
괜한 눈치일수도 있겠지만 그렇지는 않은 것 같다.

새삼 말씀의 제 1차적인 적용은 가정에서부터 시작한다는 것도 틀린말은 아니라는 것을 돌아본다. 이런 상태로 무슨 '신학'을 하겠는가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이를 통해서 내가 얼마나 하나님과의 관계가 약해져있음을 확인한다.
하나님의 사랑이 흘러들어오면 자연히 이웃에게로 방출될 수 밖에 없다.

사랑은 개인만 받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확산되는 특징이 있다.
사랑의 시초석이자 시작인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흘러나온 사랑은 사방을 감동감화 시키고도 남는다.

그래서 사랑이 넘치다 보면 자연히 상대를 이해할 수 밖에 없다.
다만 우리안에 아직 죄성이 남아 있기에 사랑을 온전히 누리려고 할 때 방해받을 수 있다.
부지런히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먹지 못하면 사랑을 키우지 못한다.

관계의 서운함과 갈등은 사랑이 부족함에서 출발한다.
그래서 어려운 것이다......

2016년 6월 1일 수요일

청년들의 영광, 노인들의 아름다움

청년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요, 노인들의 아름다움은 백발이니라.(잠 20:29)

청년시기에 주어진 젊음이란 특권은 많은 도전을 가능케하는 원동력이라 볼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지긋이 들게되면 생각에 담아둔 것을 행동으로 쉽게 옮기지 못하기 마련이다.

육체적, 정신적, 상황적 배경등에 자연스레 제한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상이 언급한 "모든것에 시기가 있다"는 격언은 매우 일리가 있다.

지혜자는 청년들의 영광은 그들의 힘이라 말한다. 아무래도 젊을 때 하나님께서 던져주시는 은혜와 소명등에 열정적으로 뛰어들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한창때 허락되는 체력이 고된사역을 감당케하고 말씀을 배움에도 도전적으로 몰입하게 한다.

청년의 시기에 쥐어지는 한시적 은사는 체력과 젊음일 것이다. 그래서 한창이라도 어릴 때 회심한다는 것은 굉장한 호사를 누리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그만큼 낭비하는 시간을 줄이고 하나님께 더 집중하여 사역에 임하니 말이다.
체력까지 겸비되니 말씀이 지시하는 삶에 전투적으로 돌입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반면 나이가 지긋이 든 노인들이 취하는 아름다움은 백발이다. 청년들이 남아도는 힘으로 돌격적인 삶을 보여준다면 노인들은 현명하고 사려깊은 지혜의 삶을 살아낸다.

육체적 제약이 크지만 노인의 머리가 '백발'인 것은 그간 살아온 경험과 지혜를 상징적으로 나타낸다. 그들에게도 청년의 시기가 있었고 다른면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영접하고 섬겨왔을 것이다. 노인들은 이제 자연스레 '삶' 자체가 자연히 복음을 드러내는 상태로 여겨진다.

이는 나이가 지긋이 들어서도 신앙의 상태가 변함이 없는 자들에게는 뼈아픈 권면일 것이다.
사람은 죽음에 가까워 질수록 추악한 형태를 띄기 마련이다. 죽음직전에 있는 노인의 얼굴이 평안한 경우는 거의 없다.

하지만 신자의 노년은 아름답다 칭한다.
신자에게 죽음은 죄짓는 것을 그치고 그리스도께로 가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이를 먹는다는 것은 자연히 그리스도께 더 가까이 가는 것이라 표현해도 좋을 것 같다.

J.C라일은 힘이 남아도는 청년시기에 신앙의 열심을 갖고 살아가라고 권면한다. 왜냐하면 나이가 들어서는 섬길 힘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청년때 부지런히 훈련받은 경건은 나이가 들어서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리고 자연스레 후대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된다.

이를 통해 교회직분에도 나이가 중요함을 본다.
우리나라는 아직도 유교적 사고에 자유하지 못한 것을 지난 공동의회를 통해 확인했다. 연륜이 되야 장로로 섬길 수 있다는 사고는 일부는 맞지만 정확히는 아니다.

장로교회 헌법이 장로의 임직나이를 30으로 정한것은 성경적이라 볼 수 있다. 가장 신체적으로 왕성한 시기임과 동시에 활동적으로 섬김사역에 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지교회의 재량에 따라 나이제한을 조절할 수 있지만 직분에 대한 부름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께 있다. 단, 교회를 통해서 부름받을 뿐이다.
그래서 교회가 세운규정이 중요하고 다음으로 어느정도의 지교회 재량이 가용되는 것이라 본다.

만일 이것이 경험과 연륜이 중요시 되는 결론으로 회의가 흐른다면 나이있는 장로와 젊은 장로를 함께 세우는 것도 대안이다.

적극적 활동은 젊은 장로가 맡는 반면 계획과 방향제시에 있어서는 나이든 장로가 적합할 것이다.

다만 한국교회에 이런 것들이 성립하기 위해어는  많은 시간과 세대들의 순교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래서 두렵다.

2016년 4월 27일 수요일

신자들의 회의를 바라보며

오늘날 한국교회는 잘못된 신앙관으로 말미암아 여러모로 부패한 것 투성이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란 없지만 시대적 환경이 어둡다보니 각종 피해사례가 난무하다.

이런 과정속에서 신앙의 선배들 유산인 개혁신학이 다시금 부각을 나타냈지만 대다수의 선배들이 모범적인 모습을 보이지 못한 것 같다. 신학을 이데올로기화 하여 무기로 삼아 자신의 권위와 이익을 착취하는 형태가 어찌나 그리 많은지 모른다.

이런 상황속에서 순수한 의도를 가지고 접근한 여러 사역자들과 성도들이 상처입는 경우가 빈번하게 됐다. 내가 회심할 시기에 개혁주의 신학도 적절하게 다시 수면위로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유행의 물꼬가 터지면서 여러교회에서 신앙고백서와 교리에 관심을 기웃거렸다.
처음 대륙의 개혁주의 신학자들과 영미 청교도 신학자들의 저서를 접했을 때 한국이 불모지라는 사실이 느껴졌다.

이런 귀한 서적들이 있는데도 읽는 성도들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그런 책들이 내 손에 들어오게 된 것도 결코 우연은 아닌듯 싶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이것이 한국 현실에 적합하지 않은 교리들이라는걸 지적하는 움직임이 드러나면서 갈등이 하나하나 깊어져갔다.

그것을 발견하기 시작한 때가 2013년에서 14년 사이부터였다. 생각보다 개혁신학에 대한 회의가 너무나도 깊게 드리워져 있었고 이미 철저하게 지켜온 어느 지교회는 방벽을 세우고 세상에 영향을 미치지 않고 있었다.

교단의 문제도 한몫했다. 내가 속해있는 합동교단의 부패가 너무나도 심각했던지 개혁을 울부짖는 젊은 신학자들을 자본과 권력으로 때려 짓밟고 있었다. 세상은 교회에 관심이 없어 큰 부패가 드러난 것 아니면 신경도 안쓰지만 내부적으로 부교역자들이 몸살을 앓기 일수였다.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 성도들은 그저 잠재적 피해자들이었을 뿐이다.

이런 모종의 핍박(?) 과정에서 부교역자들이 종종 개종하거나 이단에 빠지는 사례들도 있었다. 아니면 신학적 분쟁이 이골이 난 나머지 성도들에게 신학을 가르치는 것을 제한하자는 견해를 가진 교역자들도 있었다.

개혁주의 신학을 추구할수록 배고프고 헐벗고 굶주리고 스트레스 받는 일이 늘어나면서
이 신학에 거센 비판을 가하면서도 지지하는 기묘한 형태들도 보인다.

그런 상황들에 처한 자들이 진실된 자일수도 있지만 매우 피를 토하고 있는 상태인걸로 보인다. 그런 사람들과 대비했을 때 나는 은혜라고 해야할지 아니면 아직도 뭘 모른다고 해야할지를 모르겠다.

다만 그런 아픈지체들을 품어줄 수 있는 넓은 마음과 관용을 주시기를 바랄뿐이다.
나 또한 예수님께서 만나주시기 전까지는 죄인이였다. 삶에서 무수히 방황했음에도 그렇게 여기지 않고 떳떳히 살아왔다. 천성이 소심하여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지만 지금 돌아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분명히 있음을 되짚을 수 있다.

회의에 빠진 교역자와 성도들을 바라보며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를 생각하게된다.
교회의 잘못?...신자 스스로의 잘못?... 두 가지다 원인이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여기서 얘기할 수 있는건 이렇게 시대와 상황이 어두울수록 하나님께서 세우신 진실된 교회는 빛을 내뿜는다는 것이다. 소경인 자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겠지만 연약하더라도 아버지께서 택한 신자라면 그 희미하고 미세한 빛을 감지할 수 있다.

근시는 먼곳에 있는 형체가 불분명 해도 분명 빛과 사물을 감지하고 인식할 수 있다.
연약한 신자들을 돌아볼 수 있는 마음을 나와 주위의 성도들에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내가 그것을 인식할 수 있음은 하나님께서 그곳에서 쓰시리라는 의도이실지도 모른다.

추수할 것은 많으나 추수할 자가 부족하니 기도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요새 마음에 멤돈다.
하나님께서 나를 추수할 자로 쓰실수도 있거니와..내 자손을 통해서 쓰실 수도 있다.

우리가 언제나 깨어있어 아버지께서 필요로 하시는 곳에 쓰임받고 영광돌리는 삶게 되기를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