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상신학의 결과는 현실과 동떨어진 삶의 적용이라는 것에 있으나 그것은 곧 아픔의 결여로 볼 수 있겠다. 양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제자리에서 제아무리 많은 이론과 간접경험들을 숙지한다 할지라도 아픔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죄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당해보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당해봤어도 너도 당해봐라는 식이 많다.
단단한 자존심과 고집이 철옹성 같은 자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반대로 설득하려 한다. 스스로가 생채기를 가하고 있음에도 감지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동안 무뎌져 온 감성은 타인의 마음을 쉽게 짓 밟는다.
이것이 신앙적 훈련으로 번지면 슬픔을 잊은 사람이 되고 만다.
양들을 바라볼 때의 애통함과 슬픔이 없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흐려진 것과도 같다.
목자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더욱이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신앙적 싸이코패스와도 같다. 데이비드 웰스가 지적한 '양심의 실종'은 불신자들을 향한 말이 아니다. 교회 내에 양심이 실종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양심의 회복이 시급한 것은 성도중에서도 대다수의 목회자 직분에 속하는 것 같다. 자신들만의 아픔에 갖혀서 성도들의 아픔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결과다.
이 세상에 안힘든 사람은 없다. 양들을 위해서 섬기는 직분을 걷는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이 더 많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부당한 것 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자신들이 인내하고 있다고 선언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더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이해를 요구하지만 사실 서로가 정 반대인게 정상이다.
이런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 터무니 없어 보인다는 '복음'이다.
서로가 일치되지 않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이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의 결여로 나타나는 것은 '슬픔'에 대한 무감각과 '아픔'에 대한 무지다. 언행의 표현에서 그것이 잘 묻어난다.
자신도 아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통증에 무감각 할 수 있다. 게다가 통증에 무감각한 자들이 발휘하는 힘은 무시무시하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에 괴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괴력에 휘둘리는 것은 결국에 자신 주변의 이웃일 뿐이다....
가급적 나는 괴롭더라도 아픔을 더 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아픔에서 회피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가려 하기에 슬프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나 살자고 뛰어내린 경험이 있기에...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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