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년 12월 27일 화요일

기적의 간과(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인간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 가능케 되는 상황을 보고 기적이라 이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엎을 때도 같은 표현을 쓴다.

특히나 종교성이 있는 자들은 기적을 '신'의 영역으로 여기는데 우리들 앞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한 두번씩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현대의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적'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우리는 많은 일들을 설명할 수 없다. 특히나 가까이에 기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사실 내가 예수님께 구원을 받고 신앙이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기적처럼 느껴지지만, 신앙생활이 익숙해질 수록 그런 기쁨과 역동성은 차츰 반감되기 마련이다.
교회의 다양한 내부적 상황와 세상의 외압적인 요인은 때때로 신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이런 시기가 경건이 흔들리는 시기인데 사실 신자 모두가 답을 아는 사안이지만 버텨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는 반복되는 일상과 신앙생활의 회의로 인해 기적 같은 상황들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신자된 자의 삶은 날마다 기적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도 기적이거니와 그리스도 공동체와 교제한다는 것도 기적이다.
자연 만물의 운행속에 숨겨져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고 무엇보다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우리는 인생가운데 요행을 한 방 쯤은 바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인생의 극단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에도 침묵을 답변으로 받는 일이 얼마나 수두룩 하던가?......

이런 것을 느낄 때 쯤이면 인상이 반쯤 찌푸려지고 한 숨이 푹푹 쉬어지면서 원망의 촉수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이런 것들이 하나, 둘 누적되면 절망밖에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만나게 한 과부가 이런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부의 삶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역경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가득한 인생이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 여인을 만나게 해 모자가 먹고 살도록 해주는 기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전부인 자녀를 빼았겼을 때에 그녀는 처한 상황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여인은 여기서 회개한다.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죄에 있고 그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구했다. 원망과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결코 기적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것을 엘리야에게 고했다는 것은 그녀가 아버지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베푸실 때에 인간을 통해서 베푸신다. 어쩌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을 눈앞에서 체험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구원자체도 기적이지만 눈앞의 성도들의 교제와 교회가 치리되는 것과 그밖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랍다. 한시도 인간과 떨어지실 줄 모르는 분이다. 무뎌진 우리는 어쩌면 이런 기적들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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