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2월 1일 수요일

군웅할거(群雄割據)

많은 사람들이 시국이 난세라고들 한다.
한국교회의 현실도 그렇게 비춰지고 있다. 그래서 기라성 같은 '영웅'의 출현을 기다리는 심리가 점점 더 커지는 것 같다.
교회내에서도 '진리의 영웅'(표현하자면)이 등장하기를 바라고 있는 듯 하다. 혹은 목회자 또는 성도가 '영웅'이 되고 싶어하는 심리도 종종 본다. (영웅심리의 그림자는 자신도 모르게 자기를 '신격화'하는 결과를 낳기도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나는 교회에 '영웅'이란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본다. (물론 어떤 경건서적 시리즈는 제목마다 '영웅'이라는 단어가 들어가기는 한다. 책 내용은 나쁘지 않다.)
왜냐하면 난세를 기록한 '연의'나 '사료'를 들춰봤을 때 영웅의 등장은 패자를 가리기 위한 '군웅할거'를 불러일으킨다. 즉, 많은 영웅들이 각각 한 지방에 웅거하여 세력을 과시하게 된다는 말이다. 또는 여러 영웅들이 세력을 다투어 땅을 갈라 버티게 되기도 한다.
영웅들의 전쟁이 오래 지속되면 지친 군중들이 딱 한 가지 생각으로 귀결되게 된다. 그것은 어느 영웅이던지 간에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말고 난세만 평정해주기를 바라는 것이다.
달리 말해 그런 상황에서 성도들이 사람에 대한 기대를 두지 않고 하나님께로 둔다면 다행이다. 그러나 지교회에서 위엣 말과 같은 상황이 벌어진다면 이후에 매우 난처해지고 만다. 이렇게 되면 되려 목회자가 우상이 되어버리게 되는 위험성이 더 클 것이라 본다.
그러나 루스드라에 복음을 전파하던 바울과 바나바의 태도는 달랐다.
물론 그 두 선배가 솔직한 심정으로는 하나님이 쓰신 위대한 인물로 보이기는 한다. 루스드라 사람들을 향해 외치는 이들의 고백은 당황이 섞여있지만 겸손하고 아름답다.
"우리도 여러분과 같은 성정을 가진 사람이라"(행 14:15)
물론 교회에서 영웅이란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다 나쁘다는 의미는 아니다. 훌륭한 경건자가 배출되는 것은 하나님께서 하신 일이며 보기에 따라 '영웅'을 보내신 것으로 보여질 수도 있다. 하지만 한편으로 그렇게 생각되어 지는게 조금 씁쓸하기도 하다. 그러나 선하신 하나님께서 당신의 교회를 선하게 이끄심을 믿기 때문에 안심하고 쓰는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도 있다.

2017년 1월 28일 토요일

정통과 보수

[정통과 보수]
나는 종교개혁의 한 갈래인 장로교회가 보수적이라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정통적'이라는 표현에 가깝다고 여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보수와 정통이란 표현을 구분하는 젊은이다.
보수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보전하여 지킴
2. 새로운 것이나 변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전통적인 것을 옹호하며 유지하려 함.
정통의 사전적 정의는 다음과 같다.
1. 바른 계통
2. 적장의 혈통
3. 사물의 중심이 되는 요긴한 부분.
보수와 정통은 언뜻 가까워보이지만 내 주관으로는 미세하게 다르다.
나는 정통을 Guardian(수호자, 후견인) 으로 이해하고 보수는 Conservatism(전통적인 것을 옹호함)으로 이해한다. 물론 보수란 단어를 부정적으로 보는 시각은 아니지만 교회적으로 현시국에서는 경계의 대상이 될 듯 싶다.
전통적인 것을 옹호한다는 의미에서 풍기는 뉘앙스는 정통을 보존한다는 가정하에 자신들의 옛기질을 그대로 이어오겠다는 생각도 덤으로 따라오는 것 같다. 이런 태도는 결국 '정통'을 허울로 세우고 고집을 본질로 내세우는 경우가 많아 보인다.
정말 진리를 수호하는 Guardian의 역할을 하고 싶다면 그 좁은길을 쓸쓸함을 딛고서라도 지켜줘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진보가 튀어나가더라도...보수가 고집을 부리더라도 가디언은 그 자리를 지키고 있기에 그 두 영역이 기준을 잡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장로교회는 현시국에 그 역할을 하도록 준비되어야 하지 않겠냐는 말이다.
장로교회가 다른 교단에 비해 우수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나 진리라는 것을 수호하는 역할에 있어 역사적으로 잘 갖춰진 시스템이 있었고 그로인해 후대인 우리가 잘 전달받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섭리가운데 종교개혁자들의 의지는 개혁교회와 장로교회의 유산으로써 남겨졌다. 그러나 보수라는 깃발의 미명하에 자신들의 고집까지 끌어넣으면서 언제까지 성도들이 절규하도록 만들지 모르겠다. 결정적으로 수호자는 '듣는 귀'가 발달되어있고 보수와 진보는 '말하는 입'이 발달되어있다.
교회의 진보든 보수든 자기말만 할 뿐 대부분이 성도와 소통하지 않는다. 더욱이 청년들에게 접근하는 법은 매우 미비하다. 툭해야 기타튕기고 사이킥 날리며 신들린 듯이 점프나 해대는 것을 나는 소통이라 보지 않는다.
그렇게 우리들이 비판하는 TV에서 등장하는 설민석, 김태호PD, 라영석PD등 이상으로 청년들에게 교리나, 성경이나, 교회사등을 쉽고 재미있게 가르칠 수 있는가? 조승연 작가, 이종범 작가만큼이나 청년들의 고충을 이해하고 조언해 줄 수 있는가?
김제동의 걱정말아요 그대만큼 직업이 다양한 사람들의 의견을 듣고 비판하지 않은체 건강한 길로 가도록 독려하는 프로그램은 고민해 보았는가? 무한도전처럼 교회가 종교개혁의 현대적 실천에 대해서 하나님 빽 하나만 믿고 치밀한 계획하에 무모하게 도전해 보았는가?
나는 개혁주의란 슬로건을 내세운 교회가운데 결정적인 소통의 창구 없이 미디어 및 문화를 비판하는 것에 대해서 이젠 변호해줄 말이 없다. 가디언으로써의 소명을 받았다면 적어도 정죄의 가리개를 벗고, 가시밭길에 서있는 한 영혼을 향해서 맨발로 걸어가는 각오를 갖추기를 기도하는게 현명한 처사인 줄을 알았으면 좋겠다.
나는 학사모를 쓴 신학자 군단보다 단 한명의 발로 뛰는 신학자에게서 그리스도를 본다. 부디 '전통'이기 보다는 성경중심의 '정통'이기를 바래본다......

2017년 1월 11일 수요일

이는 우리 죄악이 많아 정수리에 넘치고 우리 허물이 커서 하늘에 미침이니이다(스 9:6)

경건한 삶을 꾸준히 단련해온 신자가 고백할 수 있는 기도이다. 에스라는 자신의 죄를 넘어 민족의 죄까지도 묵상하며 하나님께 용서를 구한다. 그는 민족의 죄를 자신의 죄처럼 여기며 용서를 구한다. 삶의 중심이 하나님으로 단단히 이성과 감성을 무장한 자만이 이런 기도가 내뿜어져 나온다. 공동체의 잘못까지 자신의 죄로 여기며 기도할 수 있는 힘이 어디서 나오겠는가? 내 자신이 참으로 부끄러워진다. 소속된 공동체가 죄를 저질렀을 때 그것을 직분자나 죄를 범한 대상자들을 향하여 정죄와 비판을 가할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선 그것 또한 나의 죄로 여기고 하나님과의 독대의 시간을 가져 보았는지 자문하게 된다. 사람은 죄인이기 때문에 조건만 갖춰지면 얼마든지 실컷 죄를 지을 수 있는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단지 조건이 충족되지 않았기에 해당 죄에서는 잠시 자유할 수 있는 것이다.

성도가 하나님 앞에서 철저히 자신을 돌아보지 않으면 타인보다 자신이 나은 줄 안다. 
지체의 죄를 자신의 죄로 여기고 권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은 의인인 것 처럼 행동하며 쉽게 지적을 가한다. 정죄의 돌팔매는 쥐기 쉬우나 정작 자신이 돌을 맞는다는 생각은 하지 못하는 것이 사람이다. 

철저하게 말씀으로 자신을 복속시키지 못하면 권면에 사랑은 담기지 않는다.
말씀에서 에스라는 지금 이스라엘 민족이 당하는 고통이 조상의 죄에서 부터 자신을 포함한 이 세대의 죄 때문임을 정면으로 받아들이며 고백하고 있다.
동시에 진노중에도 긍휼함을 베푸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잊지 않으며 건져주심에 대한 감사를 표현한다.

각 시대에서부터 오늘날에까지 교회는 문제가 없었던 적이 없었다. 지상에 완전한 교회란 없다는 말이 대변하듯 초기에 건강하게 세워졌던 교회도 말기로 가면 병적인 부패가 발생된다. 그러나 그속에서도 경건자는 늘 양육되며 하나님의 교회는 무너지지 않고 완전함을 자랑한다. 

하지만 병든 교회안에서 발생한 죄를 나의 죄로 고백하는 것은 참으로 쉬운일이 아니다.
대부분의 심리는 좋지 않은 결과를 자신이 자초한게 아니므로 이웃들을 탓하는 경우가 더 많다. 그러나 진정한 경건자라면 이 결과 또한 자신의 죄로 받아들이며 하나님께서 궁극에는 선하신 길로 인도하실 줄을 믿고 기도하며 있는 자리에서 최선을 다 할 것이다.

그래도 보통 사람의 눈으로 보기에는 참 쉽지 않아 보이는 길이다.....  

2016년 12월 27일 화요일

아픔을 교훈삼아

한병수 목사님과 오랜만에 통화를 했다.
지교회 치리의 안타까움과 어려움에 대한 호소를 서로가 나눴다.

어려운 시기일수록 기도와 그 아픔을 교훈삼아 상황을 정면으로 받아들이고 나아가야 함을 배운다. 이 상황에서 경건한 어른으로써 어떻게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그 방향성의 키는 하나님께서 쥐고 계심을 보게된다.

인간은 완전하지 않다.
교회 선함은 하나님께서 키우시고 기준을 잡으신다.

이럴수록 선하신 방향으로 이끌어 주신다는 것을 반드시 믿고 기도하며 행동에 임해야 함을 반성하게 된다.


기적의 간과(왕상 17:21)

"그 아이 위에 몸을 세 번 펴서 엎드리고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인간은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들이 가능케 되는 상황을 보고 기적이라 이른다.
불가능을 가능으로 뒤엎을 때도 같은 표현을 쓴다.

특히나 종교성이 있는 자들은 기적을 '신'의 영역으로 여기는데 우리들 앞에 설명할 수 없는 수많은 일들이 한 두번씩은 주변에서 일어나는 것을 본다.
현대의 과학이 발전하면서 '기적'에 대한 기대와 확신은 점점 줄어드는 추세지만 여전히 우리는 많은 일들을 설명할 수 없다. 특히나 가까이에 기적이 펼쳐지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다.
이것은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일어난다.

사실 내가 예수님께 구원을 받고 신앙이 생겨났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기적처럼 느껴지지만, 신앙생활이 익숙해질 수록 그런 기쁨과 역동성은 차츰 반감되기 마련이다.
교회의 다양한 내부적 상황와 세상의 외압적인 요인은 때때로 신자의 삶을 피폐하게 만들 때가 있다.

이런 시기가 경건이 흔들리는 시기인데 사실 신자 모두가 답을 아는 사안이지만 버텨내기가 여간 힘든 것이 아니다. 이런 시기에는 반복되는 일상과 신앙생활의 회의로 인해 기적 같은 상황들을 감지하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따지고보면 신자된 자의 삶은 날마다 기적이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 있는 것도 기적이거니와 그리스도 공동체와 교제한다는 것도 기적이다.
자연 만물의 운행속에 숨겨져있는 하나님의 섭리를 감지할 수 있다는 것도 기적이고 무엇보다 말씀이 믿어진다는 것 자체가 큰 기쁨이다.

그래도 사람인지라 우리는 인생가운데 요행을 한 방 쯤은 바라게 됨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인생의 극단 가운데 하나님의 도움을 간절히 바라고 있음에도 침묵을 답변으로 받는 일이 얼마나 수두룩 하던가?......

이런 것을 느낄 때 쯤이면 인상이 반쯤 찌푸려지고 한 숨이 푹푹 쉬어지면서 원망의 촉수가 마음을 간지럽힌다. 이런 것들이 하나, 둘 누적되면 절망밖에 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만나게 한 과부가 이런 심정이었는지 모른다. 선지자를 만나기 전까지의 과부의 삶은 극심한 가뭄으로 인한 역경과 가난과 굶주림으로 인한 괴로움으로 가득한 인생이였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그 여인을 만나게 해 모자가 먹고 살도록 해주는 기적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인생의 전부인 자녀를 빼았겼을 때에 그녀는 처한 상황에 대한 원망이 가득하다. 여인은 여기서 회개한다.

아들의 죽음이 자신의 죄에 있고 그것에 대한 용서를 하나님께 구했다. 원망과 괴로움이 가득했지만 그녀는 결코 기적을 간과하지 않았다. 이것을 엘리야에게 고했다는 것은 그녀가 아버지께서 어떻게 일하시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능력을 베푸실 때에 인간을 통해서 베푸신다. 어쩌면 우리는 수 없이 많은 기적들을 눈앞에서 체험하고 있는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구원자체도 기적이지만 눈앞의 성도들의 교제와 교회가 치리되는 것과 그밖에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아버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얘기다. 아버지의 일하심은 참으로 놀랍다. 한시도 인간과 떨어지실 줄 모르는 분이다. 무뎌진 우리는 어쩌면 이런 기적들을 간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본다.

2016년 12월 26일 월요일

아픔의 결여

탁상신학의 결과는 현실과 동떨어진 삶의 적용이라는 것에 있으나 그것은 곧 아픔의 결여로 볼 수 있겠다. 양들이 어떠한 상황에 처해있는지는 직접 가서 보지 않으면 해결될 수 없다.

제자리에서 제아무리 많은 이론과 간접경험들을 숙지한다 할지라도 아픔은 직접 당해보지 않으면 모르는 것이다. 사람의 죄성이라는 것이 그렇다. 내가 당해보지 않으면 상대를 이해하지 못한다. 혹은 당해봤어도 너도 당해봐라는 식이 많다.

단단한 자존심과 고집이 철옹성 같은 자는 타인의 아픔을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아픔을 반대로 설득하려 한다. 스스로가 생채기를 가하고 있음에도 감지하지 못한다.
오랜 시간동안 무뎌져 온 감성은 타인의 마음을 쉽게 짓 밟는다.

이것이 신앙적 훈련으로 번지면 슬픔을 잊은 사람이 되고 만다.
양들을 바라볼 때의 애통함과 슬픔이 없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마음이 흐려진 것과도 같다.
목자가 이런 상황에 처해있는 것은 더욱이 위험하다.

이것은 마치 신앙적 싸이코패스와도 같다. 데이비드 웰스가 지적한 '양심의 실종'은 불신자들을 향한 말이 아니다. 교회 내에 양심이 실종됐다는 얘기다.

그러나 정작 양심의 회복이 시급한 것은 성도중에서도 대다수의 목회자 직분에 속하는 것 같다. 자신들만의 아픔에 갖혀서 성도들의 아픔을 감지하지 못하는 것은 안타까운 결과다.
이 세상에 안힘든 사람은 없다. 양들을 위해서 섬기는 직분을 걷는다는 것은 남들보다 더 희생을 요구하는 상황이 더 많다는 것이다.

마치 이것은 부당한 것 처럼 포장되는 경우가 많다. 실제로 자신들이 인내하고 있다고 선언하지만 오히려 하나님은 더 내려놓으라고 말씀하시는 경우가 많다.
목회자들은 성도들에게 이해를 요구하지만 사실 서로가 정 반대인게 정상이다.

이런 과정에서 요구되는 것이 세상이 보기에 터무니 없어 보인다는 '복음'이다.
서로가 일치되지 않지만 결국에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가 된다. 이것도 기적이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진정한 사랑의 결여로 나타나는 것은 '슬픔'에 대한 무감각과 '아픔'에 대한 무지다. 언행의 표현에서 그것이 잘 묻어난다.

자신도 아프다고 하지만 실제로는 통증에 무감각 할 수 있다. 게다가 통증에 무감각한 자들이 발휘하는 힘은 무시무시하다. 아픔을 느끼지 못하기에 괴력을 발휘한다.
그러나 그 괴력에 휘둘리는 것은 결국에 자신 주변의 이웃일 뿐이다....

가급적 나는 괴롭더라도 아픔을 더 누리고 싶은 심정이다. 그러나 나의 육체는 아픔에서 회피하기 위해 모든 신경을 곤두세워 사방팔방으로 튀어 나가려 하기에 슬프다.
침몰하는 타이타닉에서 나 살자고 뛰어내린 경험이 있기에...더욱 그렇다.

2016년 12월 22일 목요일

전갈채찍(왕상 12:11)

열왕기상 12장 11절에서 르호보암의 젊은 가신들은 그가 솔로몬의 권력보다 한층 더 크니 백성들에게 무거운 짐을 짊어지라고 청한다. 사람이 커다란 권력을 쥐었을 때 대체적으로 그 힘을 휘드르고 싶어한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목으로 보여진다.

앞서 아버지인 솔로몬이 육신 생활로 인해 고역을 짊어졌던 기성세대는 백성들의 불평이 높아졌기 때문에 선으로써 나라를 안정시키기를 바랬다. 불평이 많은 백성들을 대할 때에는 신중해야 하나 르호보암은 경솔한 목양자였다.

그는 결국에 그들에게 아버지대보다 더한 노역을 짊어지게 한다. 오늘날 교회에서도 이런 양상은 쉽게 발견되고 있다. 성도들의 불만은 이전 섬김에서 격는 고충과 상처들로 얼룩져서 나타날 때가 많다. 그래서 이런 문제를 다룰 때는 매우 신중해야하며 영혼(인간)에 대한 이해가 깊어야 한다.

르호보암의 모습은 드러난 전갈채찍이지만 오늘날에는 그 채찍이 선명하게 드러나지 않는다.
목회자가 이 길이 옳다고 한 결정이 전갈채찍인 경우도 많다. 경우에 따라 그런 모습은 대부분 개인의 욕심일수도 있다.

전갈채찍은 어찌보면 명예욕이 생겼을 때 가장 잘 쥐게 되는 것 같다.
물론 르호보암의 이런 패악함은 아버지의 계획하에 일어난 일이다.(왕상 12:15) 솔로몬의 죄로 인해 나라를 분열시키려는 뜻이였다.

특히나 목자의 죄는 교회전체의 위기를 초래한다는 경고로도 보인다.
이런 일이 일어났을 때 성도들은 특히나 자신을 돌아보고 교회를 위해 기도하며,
고역을 삼키더라도 아버지의 품에 더 머물러야 한다. 이런 상황일수록 피폐해지는 영혼들이 많이 발생하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힘이 들지만 아버지께서 일하시기에 우리는 버틸 수 있다........